회색나비

by김태민

한낮의 맑은 햇살이 공기를 데웠다. 하얀 볕이 닿은 가지 끝에 벌써 꽃눈이 올라왔다. 봄은 온기를 품은 바람을 타고 온다. 빛바랜 이파리 몇 장을 편지처럼 남기고 겨울은 떠났다. 초라하게 한들거리는 모습이 마치 아쉬운 작별인사 같았다.


꽃샘추위도 끝물이다. 어느새 3월이다. 거실 창을 시작으로 온 집안의 창문을 활짝 열었다. 기분 좋게 바람을 쐬고 있는데 갑자기 낯선 냄새가 코 끝을 스쳤다. 매캐한 탄내가 섞여있었다. 진원지를 찾으려고 고개를 돌렸더니 시야에 낯선 장면이 들어왔다.


회색나비다. 눈을 비비고 다시 봤더니 불에 그을린 종이였다. 타다 남은 재가 바람에 남실거리는 모습을 보고 착각했다. 잿빛 날개를 단 나비인 줄 알았다. 근처 공사장에서 불을 피웠나 보다. 불태우고 나면 흔적이 남는다.


연기와 탄내는 숨길 수 없다. 불길 밖으로 뛰쳐나온 불티는 금세 사그라들지만 재는 제법 멀리 날아간다. 덕천마을에 살았던 시절 집 근처에 고물상이 있었다. 파지와 비철을 팔러 오는 사람들은 추운 겨울날이면 한데 모여 불을 쬤다.


녹슨 드럼통 구석에서 타들어가는 골판지 박스는 계속해서 재를 토해냈다. 빨갛게 피어오르는 불꽃은 춤을 추는 것처럼 하늘거렸다. 불이 붙은 테두리를 단 골판지 조각들이 하늘로 떠올랐다. 열기 속에서 깜빡이는 불빛은 과학실에서 본 깜부기불을 닮았다.


머리에 빛나는 고리를 단 천사들을 떠올렸다. 하늘거리는 옷자락은 점점 투명해지더니 얼마 지나지 않아 완전히 사라져 버렸다. 어디로 갔는지 찾다 바닥을 봤더니 하얗게 쌓인 눈 위에 잿가루가 잔뜩 떨어져 있었다.


호기심에 집어 들었는데 손가락 끝이 새까매졌다. 불 앞에 둘러앉은 사람들은 머리에 앉은 재를 손으로 툭툭 털었다. 얼굴 생김새는 저마다 달랐지만 다들 등이 굽어있었다. 옷을 몇 벌씩 겹쳐 입은 탓에 체구는 커 보였지만 정작 몸은 작고 말랐다.


불길이 바닥에 누울 만큼 칼바람이 거세지면 그들은 말없이 간격을 좁혔다. 동그랗게 말린 서로의 어깨가 닿을 만큼 가까워졌다. 짧은 낮을 몰아내고 달려드는 춥고 긴 밤을 온몸으로 견뎠다. 귓가를 스치는 겨울바람은 산짐승의 울음소리처럼 날카로웠다.


고물상 앞 풍경을 처음 접하고 나는 동화바카라에서 본 인디언들을 생각했다. 모닥불을 가운데 두고 푸른 새벽을 기다리는 모습을 상상했다. 칠흑 같은 겨울밤이 새도록 하얀 재를 눈처럼 맞는 삶이 갖는 의미는 알지 못했다.


잿가루를 뒤집어 쓰고 불 앞에 서있는 사람들을 보고 있으면 기분이 이상했다. 가슴 깊은 곳이 천천히 내려앉는 느낌이 들었다. 표현력이나 어휘력이 감정을 따라잡지 못할 만큼 어린 나이였다. 마땅한 이름표를 붙이지 못한 채 계절을 흘려보냈다.


시간이 지난 후에 그때 느낀 감정이 무력감이라는 것을 깨달았다. 외할아버지의 장례식에서 흩날리는 재를 봤던 날에도 결은 다르지만 비슷한 무력감을 느꼈다. 외가 식구들은 버스에서 내려서 장지로 향했다. 삼베옷을 입은 사람들이 꽃으로 장식한 상여를 들었다.


마을 어른들부터 처음 보는 먼 친척들까지 꽃상여 뒤를 따랐다. 아이들은 어른들의 손을 잡고 걸었다. 가본 적 없는 낯선 곳으로 떠나는 외할아버지를 배웅하는 길이었다. 어깨를 짓누르는 무력감 속에서 좋은 추억들을 끌어안고 천천히 걸었다.


운구행렬은 긴 줄이 되어 산으로 이어지는 농로를 가득 채웠다. 눈이 부실만큼 날이 좋았다. 소나무로 만든 관 위로 햇볕이 내려앉았다. 종소리와 찬송가 소리를 타고 불이 붙은 종이조각들이 꽃상여 주변을 날아다녔다.


춤추는 나비 같아서 눈에 몰래 담았다. 투명한 겨울 햇살 아래 타오르는 종이는 재로 변해 흩어졌다. 눈물을 흘리는 사람들 사이로 바람이 지나갔다. 볼을 스치는 바람에서 온기를 느꼈다. 겨울답지 않게 따스했다.


재는 어느새 눈에 보이지 않는 먼지로 변했다. 순식간에 사라졌지만 마지막 순간을 담은 기억은 오래도록 변하지 않았다. 회색나비는 창문 너머로 보이는 봄하늘에 희미한 궤적을 남겼다. 힘없는 날갯짓이 과거의 그늘에 닿았다.

토요일 연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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