선물 같은 날

by김태민

가을이 선물을 남기고 갔다. 노란 은행잎이 옥상 위에 어지럽게 흩어져있었다. 밤비가 집 주변 은행나무들을 쓸고 지나갈 때 흩날려왔나 보다. 창고에서 빗자루를 꺼냈다. 노랗게 물든 나뭇잎을 쓸어서 걷어냈다.


가볍게 바람을 쐬러 올라왔는데 청소를 하게 될 줄은 몰랐다. 빗질을 하다 잠시 고개를 들었는데 가을볕에 물든 관모봉이 보였다. 산 너머 보이는 하늘이 물감을 푼 것처럼 선명한 푸른빛으로 가득했다. 모네가 즐겨 사용했던 세룰리안블루를 닮았다.


정말 좋은 날이다. 티 없이 맑고 푸른 하늘을 볼 수 있는 오늘 같은 날이 일 년 중 며칠이나 될까? 투명한 햇살에 물든 수리산이 유난히 아름다웠다. 매일 보는 동네 풍경인데도 처음 보는 사람처럼 한참 동안 구경했다. 기분 좋은 우연을 만났다.


바람을 쐬러 옥상에 올라오지 않았다면 평소처럼 글을 쓰고 있었을 시간이다. 바카라상에서 잠시 벗어났을 뿐인데 행복을 선물 받았다. 일상에 찾아오는 작은 우연은 소소한 기쁨을 준다. 누군가에게 이야기할 만큼 특별하지는 않지만 제법 인상적인 경험을 선사한다.


평범했던 오후가 특별해졌다. 삶의 아름다움은 별 것 아닌 순간에 의미를 부여할 때 모습을 드러낸다. 매일 흘려보내는 시간 속을 들여다보면 모르고 지나쳤던 행복이 숨어있다. 생활 속에서 마주치는 작은 우연은 행복을 발견하는 계기로 이어진다.


행복은 작아도 행복이다. 측정하거나 비교할 필요가 없다. 크기와 기준 역시 중요하지 않다. 때 묻은 피로감을 씻어내고 잠시나마 미소 짓게 만든다면 충분하다. 하늘을 올려다보면서 어깨를 짓누르고 있는 불안감을 깨끗이 털어버렸다.


한동안 별 것 아닌 걱정거리들을 잔뜩 쌓아두고 있었는데 역시나 별일 없이 지나갔다. 가슴 깊은 곳 바닥 아래 고여있던 해묵은 감정들을 날숨과 함께 뱉어냈다. 몸과 마음이 한결 가벼워졌다. 아무 이유 없이 몰려오는 불안이나 걱정은 별 다른 이유 없이 사라진다.


갑자기 변하는 날씨처럼 나빴다가 좋아지고 흐렸다가 다시 맑아지기도 한다. 언제인지는 알 수 없지만 모든 일에는 적당한 때가 있다. 앙상하게 마른 달이 차오르는 것처럼 때가 되면 다 본래 모습으로 되돌아간다. 기승을 부리는 늦더위도 9월 초입에 내리는 비와 함께 사그라든다.


좋아하는 가을을 맞이할 수 있어서 다행이라는 생각이 머리를 스치고 지나갔다. 올 한 해도 기억에 남을 만큼 소중한 순간들이 많았다. 다사다난한 날들이 지나고 나니 행복만 남았다. 긴 여름이 언제 가나 싶었는데 어느새 남은 달력은 석 장뿐이다.


가을볕은 바닥에 새하얀 경계선을 그렸다. 부드러운 실바람이 이마에 맺힌 땀을 훔쳤다. 청소를 마무리하고 그늘에 앉아 정면에 보이는 풍경을 감상했다. 관모봉 능선을 따라 늘어서있는 단풍나무들이 선명한 색감의 띠를 만들었다.


마치 붉은 비단으로 만든 현장(懸章)을 두른 것 같았다. 반짝이는 햇살이 훈장처럼 가지런하게 매달려있었다. 시선을 고정한 채 보고 있었더니 마음이 평온해졌다. 매일 걷던 골목길 대신 가본 적 없는 새로운 길을 골랐을 때도 비슷한 경험을 했다.


올여름 만안도서관을 다녀오던 길에 작은 정원을 발견했다. 낡은 담장을 뒤덮은 청포도덩굴 사이로 연보랏빛 라일락이 고개를 내밀었다. 봄과 여름이 맞물리는 평온한 점이지대에 서있는 것 같은 기분이었다. 그리움과 반가움이 교차하면서 마음이 차분하게 가라앉았다.


그때도 지금처럼 살아있어서 참 다행이라는 생각을 했다. 작은 행복에서 비롯되는 삶의 아름다움을 확인하는 순간마다 매번 안도감을 느꼈다. 반복되는 날들 속에서 만난 특별한 순간들이 쉼표 역할을 했다. 오늘도 그런 날이다. 멋진 하루를 선물 받았다.


토요일 연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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