에세이 한 편을 삼일째 붙잡고 있다. 도통 진전이 없다. 도입부를 쓰고 나서부터 막혀버렸다. 겨우 마음을 다잡고 억지로 몇 줄을 썼는데 도로 지워버렸다. 쓰고 지우기를 반복하는 동안 반나절이 지나버렸다.
머리를 식힐 겸 옥상에 올라가서 바람을 맞았다. 산그림자가 도로까지 내려왔다. 햇무리를 벗어던지고 해는 수리산너머로 사라졌다. 산마루 끄트머리에 걸려있는 희고 긴 꼬리만 남실거렸다.
가끔 글이 안 써지는 날이 있다. 그럴 때는 산바카라을 하거나 샤워를 한다. 간단하게 기분전환을 하면 그만이다. 하지만 오늘같이 글을 쓰기 힘든 날은 소용이 없다.
분위기를 환기하는 방식은 그다지 도움이 되지 않는다. 글이 안 써지는 것과 글을 쓰기 힘든 것은 아예 다른 문제다. 내가 고를 수 있는 선택지는 하나뿐이다. 예고 없이 내리는 소나기를 피하듯이 그저 기다린다.
시간이 지나면 거센 빗줄기는 잦아들고 내면을 들여다볼 여유를 찾는다. 가만히 앉아서 이틀을 흘려보냈다. 그래도 삼일째인 오늘은 어제나 그제보다는 낫다. 500자를 쓰는데 사흘이나 걸렸지만 괜찮다.
느리더라도 앞으로 나아가고 있다는 의미다. 작은 용기를 냈다. 용기도 결국 합리화다. 필요하다면 무슨 이유를 갖다 붙이더라도 괜찮다. 글을 쓸 때 인간은 누구나 철저하게 혼자가 된다.
불안하고 복잡한 마음을 어르고 달래는 것은 결국 내 몫이다. 당장 붙잡고 의지할 수 있는 대상은 나 밖에 없다. 내면을 들여다보고 글을 짓는 행위는 외로움과 괴로움을 동반한다.
사건이나 감정을 글로 쓰려면 현실을 직시하고 과거를 인정하는 과정은 필수다. 그러다 보면 아물지 않은 내면의 상처를 건드리거나 복잡하게 뒤엉켜있는 감정의 응어리를 만질 때도 있다.
세월을 맞고 무뎌졌지만 끄트머리는 여전히 날이 서있다. 닿으면 날카로운 통증이 올라온다. 낡은 기억을 들여다보다 가슴이 답답해지면 창문을 열고 맑은 공기를 깊게 들이마셨다.
소화되다만 묵은 감정들이 속에서 역류했다. 게워내듯이 글을 썼다. 오래 묵은 기억과 뒤엉켜있는 감정을 남김없이 뱉고 나면 곧바로 피로감이 몰려왔다. 소파에 축 늘어진 채 창 밖으로 시선을 던지거나 멍하니 천장을 응시했다.
쓰다 지쳐서 산바카라을 하고 돌아와서 다시 쓰는 행위를 반복하다 보면 하루가 저물었다. 글을 쓰기 힘들었던 날의 기억을 모아 보면 대체로 비슷하다. 내 것이지만 내 뜻대로 되지 않는 마음을 대면하면 매번 무력감을 느꼈다.
감정을 정리하고 지난날을 되돌아봤다. 몸이 물에 젖은 솜처럼 무겁다. 외로움으로 변한 그리움을 안고 현실로 돌아왔다. 피로감을 덜어내고 싶어졌다.
안에서 밖으로 눈을 돌렸다. 가만히 서서 땅거미가 몰려오는 저녁 풍경을 두 눈에 담았다. 옥상에서 본 명학동은 물이 빠진 낡은 옷을 걸치고 있는 것 같았다. 그늘이 지면서 환한 햇살이 불어넣었던 색감은 천천히 사그라들었다.
앙상하게 뼈를 드러낸 건물들은 어느새 잿빛으로 변했다. 쓸쓸하고 공허한 기분을 털어내고 싶었다. 옥상을 내려와서 옷을 갈아입었다. 가벼운 차림으로 나왔다.
고가교가 보이는 산본 방향으로 가려다 말고 발걸음을 돌렸다. 안양로를 따라 걸었다. 꼬리 잡기를 하는 퇴근길 차량행렬 뒤로 눈부신 노을이 따라붙었다. 산그림자는 저무는 햇살을 이불 삼아 모로 누웠다.
명학육교에 잠시 서서 역을 지나는 1호선 서동탄행 열차를 구경했다. 은색 비늘을 달고 구불대는 모습이 꼭 뱀 같았다. 달리는 전철이나 기차를 보고 있으면 마음이 차분해진다.
어릴 때나 지금이나 똑같다. 이유는 잘 모르겠다. 설명할 수 없는 일들은 받아들이는 편이 낫다. 플랫폼을 벗어나있는 꼬리칸에 떠나고 싶은 바람을 몰래 싣었다. 걷다 보니 안양천이 나왔다.
차들이 늘어서있는 퇴근시간 호계대교 위로 노을이 내려앉았다. 크기는 제각각이지만 차창마다 똑같은 저녁하늘이 붙어있다. 담쟁이덩굴이 감싸고 있는 다리 표면이 노랗게 물들었다.
온기를 품은 손길이 삭막한 콘크리트를 어루만졌다. 순식간에 생기를 되찾았다. 군데군데 녹물이 배어 나온 자리와 풍화작용이 남긴 삭막한 균열을 보듬었다. 자연은 도시의 상처를 치유한다.
시간은 성실하게 흔적을 지우고 세월은 착실하게 흉터를 뒤덮는다. 삶도 비슷하다. 소나기에 두들겨 맞은 땅은 해가 나오면 단단하게 굳는다. 햇살이 닿은 자리를 한참 동안 바라보다 발길을 돌렸다. 달라진 것은 아무것도 없지만 마음은 한결 가벼워졌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