선잠

by김태민

선잠을 자다 깼다. 좀처럼 잠들기 힘든 밤이다. 빗방울이 창문을 두드리는 투명한 소리가 방안을 가득 채웠다. 이불을 덮은 몸 위로 늦가을 무서리 같은 쓸쓸함이 내려앉았다.


복잡한 미로 같은 꿈속을 헤매다 간신히 깬 것처럼 피곤이 몰려왔다. 머리맡에 손을 뻗었다. 핸드폰을 들고 시간을 확인했다. 5시였다. 빗소리를 백색소음 삼아 잠을 청하려고 했지만 실패했다.


몸은 무거운데 반대로 머리는 점점 맑아졌다. 가만히 누워서 천장을 응시했다. 하얀 천장이 영화관의 스크린처럼 보였다. 꿈인지 현실인지 분간하기 어려운 장면들이 눈에 들어왔다.


그러다 느닷없이 회상이 시작됐다. 멋대로 기억 속의 재생버튼을 눌러버렸다. 멈추고 싶었지만 뜻대로 되지 않았다. 사각지대에서 갑자기 튀어나온 자동차처럼 치고 들어왔다.


날 선 감정이 가슴을 세게 들이받았다. 돌아갈 수 없는 시절 속 돌이킬 수 없는 순간이 떠올랐다. 차고 건조한 겨울바람이 심장을 할퀴고 지나가는 것처럼 가슴이 서늘해졌다.


켜켜이 쌓인 날들은 세월이 됐지만 내면이 흔들릴 때마다 먼지처럼 흩날렸다. 들여다보고 있었더니 상처 아문 자리가 이상하게 시큰거렸다. 삶을 관통하는 어떤 사건은 환상통을 닮았다.


이미 오래전에 다 끝난 일인데도 불구하고 한 번씩 심하게 앓는다. 세월 아래 파묻고 사는 동안 다 괜찮아졌다고 여겼는데 틀렸다. 괴롭다기보다는 이유를 몰라서 답답했다.


접종을 마쳤는데도 독감에 걸렸을 때처럼 난감했다. 누군가를 탓하거나 미워할 수 없어서 자주 자바카라했다. 단호하지 못했던 과거를 비난하고 나약한 현재를 질바카라했다.


매번 그랬듯이 크고 무거운 죄바카라감을 떠안았다. 나는 등에 떼어낼 수 없는 패각을 짊어지고 사는 달팽이였다. 집과 한 몸이지만 정작 내 몸은 늘 낯선 길 위에 있었다.


남을 미워하고 싶지 않아서 나를 미워하는 것에 익숙해졌다. 트라우마라는 단어가 어색해서 외상에서 비롯된 통증을 갑자기 쏟아지는 가을소나기로 치부했다. 감정을 숨기고 비밀을 만든 다음 속으로 파고들었다.


빛이 새어 들어오지 않는 어둠 속에서 비가 멎을 때까지 내내 혼자 앓았다. 아릿한 통증이 늑골 사이를 붉게 물들였다. 의식은 선명했고 고통은 또렷했다. 순식간에 온몸이 핏물에 젖은 옷처럼 무거워졌다.


발목에 무거운 추를 달고 깊은 물속으로 가라앉는 것 같았다. 나쁜 꿈을 꾸는 게 낫다는 생각마저 들었다. 먹먹한 감정이 몰려들기 전에 벗어나려고 힘겹게 마음을 다잡았다.


예고 없이 나타나는 상실감 앞에서 자바카라하지 않기로 다짐했지만 쉽지 않았다. 나도 모르게 눈을 감았다. 입술 사이로 떨리는 한숨이 새어 나왔다. 이불 밖으로 나왔다.


가라앉는 감정이 바닥에 닿기 전에 몸을 움직였다. 곧장 베란다로 가서 창문을 열었다. 물기를 머금은 차가운 비바람이 들이쳤다. 폐 속 깊이 고여있던 답답한 응어리를 다 뱉어낸 다음 신선한 공기를 가득 들이마셨다.


코끝이 축축해졌다. 빗방울이 뺨을 톡톡 두드렸다. 정신을 좀 차리고 밖으로 눈을 돌렸다. 구름이 산등성이를 타고 내려오는 모습이 보였다. 사이좋게 서있는 명학동의 빨간 벽돌집들은 안갯속으로 숨어버렸다.


아카시아나무와 소나무가 빽빽하게 서있는 동네 뒷산의 숲만 푸른빛이다. 산자락 끄트머리는 하얀 손길이 닿지 않았다. 비에 젖어도 색을 잃지 않는 솔숲에 시선을 고정했다.


오래된 기억들이 꼬리에 꼬리를 물고 길게 이어졌다. 기차놀이를 하는 아이들처럼 긴 줄을 이루고 늘어서있었다. 직소퍼즐을 맞추는 심정으로 뒤섞여있는 과거와 현재를 시간 순서대로 배열했다.


그리고 흉터와 상처를 구별해 냈다. 상처가 아문 흉터 옆에 통증이 남아있는 환부를 찾았다. 나이를 먹어도 익숙해지지 않는 것들이 있다. 고통 앞에서 인간은 동물이 된다.


몸의 상처나 맘의 상처나 똑같이 아프다. 들리지 않는 아우성이나 보이지 않는 몸부림을 한동안 알아차리지 못했다. 무심했다. 상처를 들여다보면서 스스로를 다독였다.


떨림이 잦아들 때까지 시간을 흘려보냈다. 그 사이 천천히 날이 밝았다. 잠은 이미 멀리 달아나버렸다. 속앓이를 하느라 진이 다 빠져버렸다. 맹렬한 기세로 허기가 밀려들었다.


피로를 밀어내고 생존본능이 고개를 들었다. 냉장고에 있는 재료를 꺼내서 샌드위치를 만들었다. 스크램블에그도 곁들여 먹었다. 배를 채웠더니 기분이 조금 나아졌다.


비는 아침이 되면서 가늘어졌지만 내면에 드리운 먹구름은 여전히 잿빛이다. 힘든 밤이었다.

토요일 연재
이전 03화별과 기억