경주 어디까지 가봤니? (2)

- 용담정, 도리마을, 정혜사지 13층 석탑, 그리고 독락당과 옥산서원

byeduist 이길재

가을 경주의 정취를 느낄 수 있는 곳을 추천할 때 빠지지 않는 곳이 용담정과 도리마을이다. 아직은 이르지만 앞으로 10월 말이 되면 많은 사람들이 가을단풍을 즐기려고 방문하는 곳이기도 하다.


경주시 현곡면 구미산(龜尾山) 기슭에 위치한 용담정은 1860년 수운 최제우선생이 하늘의 절대자(한울)가 저 멀리 높은 곳에만 존재하는 것이 아니라 모든 인간의 내면에 영성의 형태로 모셔져 있다는 '시천주(侍天主)'와 '사람이 곧 하늘'이라는 '인내천(人乃天)'의 깨달음을 얻고, 동학을 창시한 발상지로 천도교의 성지이다.


조선말 우리 역사에서 동학을 빼놓고 논할 수 없다. 조선말은 내부적으로 삼정의 문란과 세도정치로 민중 수탈이 극에 달했고, 외부적으로는 이양선의 등장과 서양 세력의 침탈 위험이 고조되던 대혼란기였다. 동학은 이 외세의 위협에 대응하여 유불선과 우리 고유의 민간 신앙을 종합하여 만들어낸 최초의 주체적 근대 사상이었다. 특히, 민중을 슬롯변화의 주체로 역사의 전면에 등장하게 만든 사상적 계기였다. 종교적 의미를 떠나서 동학에 담긴 인간 존엄, 생명 존중, 자주 평화의 가치는 여전히 우리 삶 중요한 이슈이다.


용담정 주차장에 내려 포덕문을 지나 계곡을 따라 숲길을 걸으니 오전의 피로가 다소 가시는 듯했다. 용담정에 오를 땐 맑은 물소리를 들으며 올라야 절로 숙연해지고 평온한 마음이 온몸으로 퍼지는 체험을 할 수 있는데 그동안의 가뭄 탓인지 맑은 물이 흐르던 계곡의 물이 말라 아쉬웠다. 용담정에는 수운 최제우선생의 영정과 그의 친필이 '거북 구(龜)'자가 쓰여있는 액자가 걸려 있었다. 용담정이 자리한 곳인 구미산은 거북 구(龜)와 꼬리 미(尾)를 쓰는데, 천도교에서 거북의 꼬리는 '오랜 역사의 뒤끝(꼬리)에서 완전히 새로운 역사가 시작된다'는 의미를 지닌다고 한다. 낡은 조선 후기의 슬롯적 모순과 서양세력의 위기 속에서 새로운 세상을 꿈꾸었던 선각자의 절절한 마음이 담긴 듯하여 한참을 들여다보았다.

용담정을 뒤로하고 발길을 도리마을로 옮겼다. 도리마을은 경주시 서면 도리길에 위치한 작은 시골 마을로 최근 가을철 은행나무숲 명소로 알려진 곳이다. 본래 묘목 판매를 목적으로 일정한 간격으로 빽빽하게 심은 은행나무들이 수십 년 동안 곧게 자라면서 독특하고 울창한 은행나무숲을 이루었다고 한다. 아직 노랗게 물들지 않아서인지 관광객의 발길도 없고 그러다 보니 마을이 철 지난 바닷가 같은 느낌이다. 하지만 10월 말이 되면 높게 솟은 은행나무 숲 사이로 들어오는 햇살과 떨어진 노란 잎들이 어우러져 출사지나 인생샷 명소가 된다. 연인이나 가족이 함께 꼭 한 번은 가볼 만한 곳이라 생각되었다. 오늘은 시골마을의 한적한 분위기를 느끼며 숲 속을 천천히 걸어보는 것으로 만족했다.

드디어 오늘의 마지막 답사지인 회재 이언적선생을 모신 옥산서원과 독락당을 방문하였다. 회재 이언적 선생은 동방오현(東方五賢)으로 불리며 성리학의 우주론과 인간 본성을 탐구한 주리론의 선구자로서 조선 성리학의 기초를 다진 학자로 추앙받고 있다. 옥산은 개인적으로 외가이기도 해서 어린 시절 방학 때나 명절 때 방문해서 물놀이도 하고 둘러보기도 했던 곳이라 익숙하다. 성인이 되어서는 수학여행이나 개인 답사 위해 자주 방문했던 곳이기도 해서 갈 때마다 늘 정겹고 반가운 곳이다.


독락당에 들어서기에 앞서, 인근 도덕산 자락에 있는 정혜사지 13층 석탑을 먼저 찾았다. 회재 이언적 선생이 독락당에 머물던 시절, 정혜사는 그의 사유와 산바카라의 공간이었다. 지금은 사라지고 절터엔 13층 석탑만 홀로 남아 자리를 지키고 있다. 자옥산과 도덕산을 좌우로 끼고 조선 성리학의 깊은 사유가 숨 쉬는 독락당 계곡 옆에 굳건히 서 있는 통일신라의 옛 석탑 정혜사지 13층석탑은 불교와 유교, 신라와 조선의 시간이 한 공간에서 자연스럽게 어우러지는 기품을 보여주었다.


이는 서악지구 고분군에서 신라의 고분군과 서악 삼층석탑, 그리고 도봉서당이 만들어낸 어울림과 유사한 느낌이었다. 통일신라의 전형적인 석탑은 불국사의 석가탑과 같이 3층 구조이지만 이 탑은 우리나라에서는 드물게 13층이라는 고층구조를 가지고 있다. 1층 탑신이 탑 전체의 절반을 차지할 정도로 거대하고 높게 제작한 반면 2층부터 13층까지는 탑신과 지붕돌의 크기가 급격하게 줄어들어 균형에 맞지 않는 듯하면서 절묘하게 조화를 이룬 아름다운 탑이었다.

석탑의 기품을 뒤로하고 드디어 독락당으로 발길을 옮겼다. 독락당은 회재 이언적 선생이 중앙정치에서 밀려난 후 낙향하여 지은 살림집이자 별업(別業)으로 중국 사마광의 독락원기(獨樂園記)에서 이름을 따왔으며, '벼슬길의 헛된 영화를 버리고 홀로 사유하며 학문의 즐거움을 누린다'는 뜻을 지니고 있다.


독락당은 솟을대문을 지나도 행랑채가 바로 막아서며 꺾여 들어가게 되어 있어 사랑채까지 가는 길이 복잡하고 미로 같은 느낌이었다. 실제 바깥 담벼락에서 독락당을 바라보면 내부가 잘 드러나지 않는다. 정치적 정쟁과 세속의 번잡함에서 벗어나 자기 내면과 학문에 오롯이 집중하고자 했던 절제와 은둔철학이 반영된 결과이다. 그런데, 독락당 사랑채 담장에는 특이하게 나무 살창이 뚫려 있는데 사랑채에 앉아 계곡을 바라보면 담장의 살창을 통해 밖으로 흐르는 계곡물과 자연을 바라볼 수 있게 되어 있었다. 이는 경계를 두되 자연과 끊임없이 소통한다는 유교의 무위자연사상을 인문학적으로 형상화 부분이다.


사소해 보일 수도 있으나 이를 통해 옛 선비의 자연을 대하는 태도를 엿볼 수 있었다. 과거 답사했던 담양 소쇄원에서도 비슷한 경험을 했다. 소쇄원의 담장은 담 밑으로 계곡물이 그대로 흐르도록 길을 터놓았는데, 형태를 다를지라도 경계를 두되 자연과 소통한다는 본질은 독락당의 살창과 통한다. 드디어 계정(溪亭), 선생은 계곡 암반 흐르는 물 위에 가는 기둥을 세워 정자를 올렸다. 그리고, 자연을 벗 삼아 사색하고 휴식하고자 했던 그 마음을 인간과 자연이 분리되지 않고 하나로 어우러지는 물아일체의 경지를 공간적으로 완성하였다.

계정을 뒤로하고 산길을 따라 10여분을 걸으니 옥산서원이 보였다. 독락당이 개인의 내면적 사유 공간이라고 한다면 옥산서원은 학문의 엄격성과 자기 수양을 위한 공동체의 공간이다. 옥산서원 입구 문의 이름이 예사롭지 않다. '역락문(亦樂門)', '역락(亦樂)'은 논어 <학이> 편, '유붕자원방래 불역락호(有朋自遠方來 不亦樂乎)', 벗이 먼 곳에서 찾아오니 또한 즐겁지 아니한가에서 따온 말이다. 유학자의 나라인 조선에서 학문을 연마하는 서원의 입구 문의 이름으로 이보다 더 좋은 게 또 있을까 싶다. 벗은 어떤 벗인가? 붕우(朋友)이다. 붕우는 학문의 뜻을 같이 하는 친구를 의미하는데 그 친구가 방문하니 얼마나 기쁘겠는가? 방문객을 환영하는 최고의 현판이지 싶다.


한때 인문학공부를 하면서 논어를 1년간 공부했는데, 당시 사부께서 늘 강조하셨던 말씀이 '삼호(三乎)'였다. 논어, <학이> 편 1장을 '삼호'라 칭하면서 배움에 소홀히 하지 않고 늘 겸손하기를 가르쳐주셨다. 논어의 대부분을 다 잊어도 이것만 기억이 나는데 여전히 행동은 어렵고 마음은 늘 좁디좁은 새가슴이라 늘 부끄러울 따름이다. 그래도 '역락문(亦樂門)' 현판을 보고 이런 생각을 하게 된 것만으로도 감사하게 생각한다.


학이시습지 불역열호(學而時習之 不亦說乎), 유붕자원방래 불역락호(有朋自遠方來 不亦樂乎), 인부지이불온 불역군자호(人不知而不慍 不亦君子乎)
- 논어, <학이> 편 1장


독락당과 마찬가지로 옥산서원에도 여러 현판을 볼 수 있었는데, 옛 선인들은 건물을 짓고 건물마다 이름을 붙였다. 현판은 이름을 붙인 자의 마음이 담긴 바로 몸가짐, 마음가짐 하나까지 뜻을 새겨 실천하고자 했던 마음이 고스란히 담겨 있다. 인을 구하는 집 <구인당(求仁堂)>, 학문과 경계는 끝이 없음을 뜻하는 <무변루(無邊樓)>, 명(明)과 성(誠)을 함께 닦아 나아가는 재실 <양진재(兩進齋)>, 경과 의를 함께 세우는 재실 <해립재(偕立齋)>, 인을 민첩하게 구하는 재실 <민구재(敏求齋)>, 남모르게 자신을 수양하는 재실 <암수재(闇修齋)>, 인을 체득하여 모시는 사당 <체인묘(體仁廟)> 등 어느 하나 소홀함이 없다.

역락문을 통해 안으로 들어서자 중심 누각인 무변루(無邊樓)가 앞을 가로막고 있었다. 오전에 다녀온 서악서원처럼 일반적인 서원은 누각을 훤히 열어두는 정자를 두는 경우가 대부분인데 옥산서원은 무변루나 안쪽의 구인당(求仁堂)의 정면이 모두 내부 중정을 바라보도록 단단히 밀집되어 있었다. 또한 건물 지붕 처마가 거의 붙어있을 정도로 긴밀하게 둘러싸여 있었다. 이러한 건축에 대해 세속의 유혹이나 외부 풍경에 마음을 빼앗기지 않고 오직 학문 정진과 마음을 바르게 하는 수양(거경궁리, 居敬窮理)에만 침잠하겠다는 성리학적 정진의 의지를 담고 있다고 한다. 그 의미는 충분히 이해가 가나 개인적으로는 답답하게 느껴져 사방으로 확 트인 서악서원의 영귀루(詠歸樓)가 더 여유로워 보였다. 서악서원에서 만났던 어른 말씀대로 선비들이 열심히 공부를 하다가도 가끔은 정자에 올라 자연을 벗 삼아 마음의 여유를 가져보는 것도 학문정진에 오히려 도움이 되지 않을까 하는 소박한 생각을 해보았다.

바쁜 하루의 답사를 마치고 역락문을 통해 밖으로 나오니 어느덧 해는 저물고 있었다. 비스듬히 아름드리나무 사이를 비집고 나온 햇살에 형형색색 노을빛의 옥산서원과 주변 모습이 이 세상이 아닌 듯한 느낌이 들었다. 경주는 늘 가까이 있고 자주 방문하기에 알고 있다고는 하지만 여전히 모르는 것투성이다. 어쩌면 어느 한순간의 한부분만 보고 다 아는 것처럼 살아가는 게 인간이 아닌가 싶다. '삼호'의 실행이 필요한 시점이다.


오늘 경주 답사를 마감하면서 회재 이언적 선생과 같이 자연을 벗 삼아 '독락(獨樂)'의 삶을 즐기고자 옥산서원 인근에 터를 잡은 회원의 집을 방문하였다. 주인의 정성스러운 손길이 닿은 공간은 주변의 자연과 잘 조화를 이루고 있었고 주인의 얼굴은 집과 닮아 있었다. 그의 마음과 공간을 살펴보면서 앞으로 은퇴 후 귀거래(歸去來)의 삶이 그려졌다. 주인의 넉넉한 정성이 담긴 비빔밥 한 그릇과 막걸리 한 잔에 답사의 피로를 씻어내며, 마음 가득 평온을 가득 채운 채 기분 좋은 경주 답사의 여정을 마무리하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