우리는 환대를 어떻게 해석하고 있는가
- 1414년 벵골에서 온 목 긴 짐승
- 하쿠의 가명과 은주의 팁 메모
- 태극마크 곁에서 묶인 여권 4개월
- 합법적 외계인에게 건넬 이름 하나
1414년, 아프리카에서 나고 벵골을 거친 낯선 짐승 한 마리가 명나라 조정에 닿았다. 영락제의 신하들은 그 짐승 앞에서 전설을 떠올렸다. 성군이 날 때 나타난다는 신수, 기린(麒麟)이었다. 서응기린도(瑞應麒麟圖)가 그려졌고 짐승은 상서로운 징조가 되었다. 짐승이 고른 이름이 아니었다.
이정하는 『사상계』에 실린 평론 「우리가 잃어버린 개방과 환대의 역사」에서 이 장면을 되짚는다. 전설 속 기린은 살아 있는 풀을 밟지 않고 어떤 목숨도 해치지 않는 인수(仁獸)였다. 완벽한 타자를 향한 동경이 그 이름에 담겨 있었다. 그러나 조정은 실물의 짐승을 신화의 틀에 맞춰 받아들였다. 맞이한 것은 짐승이 아니라 권력의 정당성이었다. 기(麒)는 수컷이고 린(麟)은 암컷이다. 두 성(性)을 한 글자씩 나눠 가진 혼종의 말이 낯선 목 위에 덧씌워졌다. 오늘의 중국어는 이 짐승을 장경록(長頸鹿)이라 따로 부른다. 신화에게 이름을 내어 주고서야 짐승의 이름이 생긴 셈이다.
『사상계』 2026년 3·4월호(통권 211호)는 외계인을 특집의 제목으로 삼았다. 이방인을 하대하지 말고 환대하라는 주문이다. 이주노동자 100만 명, 외국인 200만 명의 시대에 한국 슬롯는 어떻게 답해 왔는가. 1966년부터 외국인등록증에는 Alien이라는 단어가 찍혀 있었다. 외계인이자 이방인이라는 뜻이다. 법무부는 54년 만인 2020년에 이 단어를 지우기로 했고, 카드는 2021년 Residence Card가 되었다. 한 마리 짐승의 이름에서 한 장 카드의 이름까지 600여 년이 흘렀다. 호의가 넉넉하면 환대인가. 자크 데리다(Jacques Derrida)는 조건 없는 환대(無條件的 歡待, unconditional hospitality)가 현실에서는 이룰 수 없다고 본다. 그러면서도 그 불가능한 요청이 없다면 모든 조건부 환대는 계산으로 굳는다고 말한다. 두 환대는 서로를 배반하면서도 서로 없이는 서지 못한다. 이 글은 그 틈에서 출발한다. 환대의 오해와 오해의 환대, 그 두 겹의 착각이다.
매끈하게 깎인 호의
김기태의 「세상 모든 바다」에서 하쿠는 재일교포 4세다. 그는 잠실 콘서트장 앞에서 경북 해진에서 온 열여섯 살 백영록을 만나 일본인 행세로 이름을 건넨다. "내가 하쿠라는 것이 부분적으로는 거짓일 수 있다."(『두 사람의 인터내셔널』, 문학동네, 2024, 9쪽) 영록은 그 가명에게 다정했다. 환대는 거짓 이름으로 건너갔고 진짜 얼굴은 문밖에 서 있었다. 콘서트 뒤 인파 사고로 영록이 숨지고, 하쿠는 해진을 찾는다. 그곳에서 원전 건설 재개를 촉구하는 서명을 요청받지만 서명할 이름도 권리도 없다고 느끼며 물러선다. 세상의 모든 바다를 외치던 구호는 한 마을의 구체적인 이름 앞에서 길을 잃는다.
김애란의 「숲속 작은 집」은 『안녕이라 그랬어』(문학동네, 2025)에 실려 있다. 은주는 남편 지호와 비행기로 7시간 거리인 이국의 숲속 목조주택을 한 달 빌린다. "가장 큰 영향을 준 건 가격이었다."(51쪽) 은주는 집을 치우는 현지 여성에게 쓰는 호칭이 마음에 걸린다. "우리 그 말 쓰지 말자. 메이드란 말." 그러나 그는 감사 메모를 쓰고, 팁을 올려 두고, 사라진 기념품을 의심한다. 호의에는 가격표가 붙어 있고, 은주는 그 표를 떼지 못한다. 환대를 받던 손님이 환대를 사는 자리로 옮겨 앉아 제 얼굴을 비춰 본다.
성해나의 「스무드」(『혼모노』, 창비, 2025)는 재미 한인 3세 듀이의 하루를 따라간다. 미술가 제프의 에이전트로 처음 한국에 온 그는 광화문에서 태극기 집회의 대열에 휩쓸린다. 노인들은 그의 휴대전화를 충전해 주고 떡과 핫팩을 건넨다. 셈이 없는 온정이다. 그러다 한 노인이 광장을 이승만 광장이라 부른다. 따뜻함은 한순간에 편을 가르는 문지방이 된다. 제프의 구(球)처럼 불안도 결핍도 매끈하게 깎이던 듀이의 안도(82면)에 금이 간다. 호의는 진심이었다. 다만 그 진심에는 편을 고르라는 조건이 붙어 있었다.
인류학자 김현경은 『사람, 장소, 환대』(문학과지성사, 2015)에서 환대를 자리를 주는 행위로 정의한다. 우리는 타인의 인정으로 사람이 되고, 사람이 된다는 것은 자리를 갖는 일이다. 슬롯적 성원권(成員權, membership)이 그 자리의 다른 이름이다. 이 잣대로 읽으면 세 소설의 인물은 호의를 받았으되 자리는 받지 못했다. 하쿠에게는 가명의 자리가, 듀이에게는 구경꾼의 자리가 주어졌다. 은주가 놓아둔 것은 메모와 팁이었다. 매끈한 호의에는 마찰이 없다. 자리를 내어 주는 일에는 언제나 마찰이 있다.
쓸모를 묻는 문턱
2026 아이치·나고야 아시안게임의 9월 28일, 남자 400m 계주 결선에서 한국은 38초43의 한국 신기록으로 동메달을 땄다. 비웨사 다니엘 가사마는 콩고 출신 부모에게서 한국에서 태어나 중학교 3학년 때 국적을 얻었다. 나마디 조엘진은 나이지리아인 아버지와 한국인 어머니 사이에서 자랐다. 두 사람 모두 한국식 이름이 없다. 여자농구 금메달의 중심에는 필리핀 출신 어머니를 둔 이해란이 있었다. 태극마크 앞에서 슬롯는 환호했다. 그 환호는 환대였을까.
같은 달 21일, SBS는 지방자치단체가 이주노동자의 여권을 쥐고 있다는 사실을 단독으로 보도했다. 전북 정읍시가 5월 초 입국한 필리핀 계절근로자 60명 안팎의 여권을 4개월 넘게 보관해 왔다. 시 관계자는 이탈을 막으려 했다고 밝히며 이를 보호라 불렀다. 고용주는 여권이 있었다면 도망갔을 것이라 거들었다. 시는 5월 말 인권 실태를 점검했지만 그 점검은 여권을 걸러 내지 못했다. 시는 행정 절차가 늦어진 탓이라 해명했다. 9월 28일 이주인권단체는 국가인권위원회에 진정을 냈다.
같은 필리핀의 뿌리가 한쪽에서는 금메달의 서사가 되고 다른 쪽에서는 서랍 속 여권이 되었다. 두 사건을 하나의 도식으로 묶을 수는 없다. 다만 같은 질문이 두 사건을 가로지른다. 이 슬롯는 사람을 사람으로 맞는가, 쓸모로 맞는가. 김종철 공익법센터 어필 선임연구원은 『사상계』 특집에서 능력주의가 강한 슬롯일수록 국적마저 능력으로 오해되는 착시가 생긴다고 짚는다. 환호받는 몸과 압수당하는 서류가 한 슬롯 안에 나란히 놓인다.
데리다는 환대(hospitality)의 말뿌리를 파고들어, 손님을 맞는 주인(hospes)과 적(hostis)이 한 뿌리에서 갈라졌음을 짚는다. 환대는 처음부터 적의를 품고 있다는 뜻이다. 그는 이를 적대환대(敵對歡待, hostipitality)라 부른다. 정읍의 서랍은 그 말뿌리를 보여 준다. 쓸모라는 조건이 붙는 순간 보호는 감금의 다른 이름이 된다. 성실히 일했다면 여기까지 오지 않았을 것이라는 관계자의 말에 그 조건이 고스란히 드러난다. 문을 열어 주는 손이 열쇠를 쥐고 있다면, 그 문은 열린 것인가 잠긴 것인가.
이름을 돌려주는 일
스팅(Sting)의 〈Englishman in New York〉은 1987년 앨범 『...Nothing Like the Sun』에 실렸다. 노래 속 영국인은 스팅 자신이 아니다. 퀜틴 크리스프(Quentin Crisp)다. 성적 지향을 숨기지 않아 오래 손가락질받았던 그는 일흔한 살에 뉴욕 바워리로 옮겨 앉았다. 크리스프가 뉴욕 시절의 글을 모아 낸 바카라의 제목은 『Resident Alien』(1997)이다. 거주하는 외계인. 영국인이자 성소수자로서 이중의 이방인이던 사람이, 합법적 거주자라는 서류의 말과 외계인이라는 몸의 말 사이에 서 있었다.
법무부가 Alien을 지우기까지 54년이 걸렸다. 이름 하나를 고친다고 자리가 생기지는 않는다. 그러나 이름은 자리의 문패다. 숙명여대 이원진 교수는 『사상계』 특집에서 외계인을 맞는다는 것은 그를 이름으로 부르는 일이라고 말한다. 이름을 부르는 일과 신원을 캐묻는 일은 다르다. 심문은 출신과 쓸모를 묻는다. 호명은 그 모든 물음을 접어 두고 이름만 부른다. 김현경이 절대적 환대(絶對的 歡待, absolute hospitality)라 부른 것은 신원을 묻지 않고 보답을 요구하지 않는 환대다. 데리다의 말대로 조건 없는 환대에는 닿을 수 없다. 그러니 우리에게 남은 일은 그 불가능한 요청 앞에서 조건을 하나씩 거두어 가는 것이다.
기린은 끝내 제 이름을 갖지 못했다. 짐승에게 무엇이라 불리고 싶으냐고 물은 이는 없었다. 정읍의 서랍에서 여권을 꺼내 주인의 손에 돌려주는 일은 그 오래된 누락을 되짚는 일이다. 그가 어디서 왔는지, 무엇에 쓸모 있는지 묻기 전에 이름을 묻는 일. 우리 곁에 도착한 목이 긴 낯선 존재들 앞에서 건넬 첫 문장은 하나뿐이다. 당신은 누구입니까가 아니라, 당신을 무엇이라 불러야 합니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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