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만무방'과 '그들도 우리처럼'
- 내 논의 벼를 내가 훔친 밤
- 수배자는 연탄 공장 잡역부가 되었다
- 일곱 살 아이가 탄 황지행 기차
- 마지막 내레이션이 남긴 질문
산골에, 가을은 무르녹았다.
김유정의 「만무방」은 이 한 문장으로 문을 연다. 이어지는 단락에서는 의성어와 의태어가 서로를 밀고 당기고, 풍경과 심정이 자리를 바꿔 가며 한국어가 이토록 다채로웠던가 싶은 문장을 펼친다. 이야기가 어디로 흘러갈지 가늠할 수 없는 자리에서 김유정은 강원도 산골의 자연을 하릴없이 늘어놓는다. 열거는 푸념에 가깝다. 이 풍경이 그 시절 미물들의 처지와 너무도 다르다는 푸념이며, 무르녹은 가을 앞에서 응칠이 취하는 삶의 태도를 닮은 푸념이다.
산골에, 가을은 무르녹았다.
아름드리 노송은 삑삑히 늘어박혔다. 무거운 송낙을 머리에 쓰고 건들건들. 새새이 끼인 도토리, 벚, 돌배, 갈잎 들은 울긋불긋. 잔디를 적시며 맑은 샘이 쫄쫄거린다. 산토끼 두 놈은 한가로이 마주 앉아 그 물을 할짝거리고. 이따금 정신이 나는 듯 가랑잎은 부수수 하고 떨린다. 산산한 산들바람. 귀여운 들국화는 그 품에 새뜩새뜩 넘논다. 흙내와 함께 향긋한 땅김이 코를 찌른다.
-김유정, 「만무방」
응칠은 전과자다. 산에서 송이를 캐며 하루를 잇고, 닭을 보면 본능처럼 잡아먹는다. 숲을 내려오던 어느 날 성팔이를 만나 동생 응오의 벼가 도둑맞았다는 소문을 듣는다. 불길한 예감이 덮친다. 소식을 전하는 성팔이의 표정이 석연치 않다. 응칠은 잠시 그를 의심하다가, 더 깊은 곳에서 자신을 의심하는 마음과 마주친다.
그도 한때는 성실한 농부였다. 다섯 해 전만 해도 빚더미에 눌려서나마 밭고랑을 지키던 사내였다. 빚이 삶을 삼키자 남은 길은 도박과 도둑질이었다. 아내와 아이들은 떠났다. 구걸로 이어 온 세월은 감옥에서 끝났고, 한 달 전 더는 버틸 수 없어 동생이 사는 마을로 돌아왔다. 자포자기와 기슬롯생을 앞뒷면으로 가른 동전 던지기 같은 하루를 그는 산다.
비극으로 기울기만 하는 시대에 그가 기댈 곳은 숲뿐이다. 답답한 속을 부여잡고 응칠은 숲으로 든다. 요즘도 자의로든 타의로든 숲을 찾는 이가 부쩍 많다. 가을로 무르익은 숲은 그의 근심을 흩어 놓는다. 울긋불긋 솟은 나무, 졸졸 흐르는 냇물, 흙냄새와 향긋한 내음. 이 숲에서만큼은 비참한 시간을 건너온 미물이 만무방 취급을 받지 않는다.
염치를 잃은 자들의 윤리
만무방은 염치없이 막돼먹은 사람을 가리키는 말이다. 1935년 7월 김유정은 《조선일보》에 이 소설을 연재하며 그 이름을 응칠에게 붙였다. 농토도 가족도 삶의 목표도 없이 산과 들을 떠돌며 송이를 캐고 닭을 훔치는 사내. 이름값은 충분해 보인다. 그러나 소설은 곧 되묻는다. 이 이름은 정말 누구의 것인가.
응칠은 동생의 벼를 도둑맞았다는 소문 앞에서 마을 사람들의 의심이 자신을 향하는 것을 안다. 그는 범인을 찾겠다며 밤 산속에 잠복한다. 어둠 속에서 붙잡은 도둑의 얼굴을 확인하는 순간 말을 잃는다. 도둑은 다름 아닌 응오였다. 근면한 농부였던 동생은 병든 아내와 빚더미에 눌려 추수조차 하지 못한 채 벼를 논에 썩히며 절망하던 사내다. 그가 내뱉는다. “내 것 내가 먹는데 누가 뭐래유?” 응칠은 분노에 휩싸여 아우를 매질한다. 그러다 죄바카라감과 허무에 잠긴다. 내 것을 내가 훔쳐야 하는 사람. 이 모순이 두 형제의 운명으로 남는다.
이 장면을 도덕으로만 읽으면 길을 잃는다. 제임스 스콧은 동남아시아 농민을 다룬 『농민의 도덕경제』에서 농민의 첫째 원칙이 이윤이 아니라 굶지 않는 일이라고 짚었고, 이를 생존 윤리(生存 倫理, subsistence ethic)라 불렀다. 거두어도 빚이 먼저 가져가는 땅에서 벼는 곡식이기보다 올가미에 가깝다. 그러니 추수를 하지 못한 사내가 제 벼를 몰래 베어 가는 일은 범죄이기에 앞서 절망이 쓰는 문장이다. 응칠의 폭력도 미움이 아니라 사랑의 잔여로 읽는 편이 맞다. 김유정의 세계에서 윤리의 물음은 선악이 아니라 기근과 구조 쪽에서 출발한다. 응오의 벼가 논에서 썩는 동안, 사람의 마음도 함께 삭았다.
「봄·봄」의 청년도, 「동백꽃」의 화자도, 「땡볕」의 농부들도 같은 자리로 밀려난 사람들이다. 김유정은 이들을 단죄하지 않는다. 평론가 김윤식이 김유정의 세계를 “웃음 속의 비극, 비극 속의 웃음”이라 했다고 전해진다. 실제로 응칠의 대사에는 절망이 농담처럼 스며 있고, 그의 무기력한 웃음은 울음의 그림자다. 산골 사투리의 생동감이 현실을 비추지만 그 밑바닥에는 비애가 앉아 있다. 웃음조차 허락되지 않는 지점에서 이 소설은 가장 깊어진다.
이 작품을 읽는 일은 미물(微物)들의 윤리와 마주하는 일이다. 미물은 하찮은 생물을 이르는 말이고, 슬롯가 가장 낮은 자리의 사람들에게 붙인 이름이다. 관계망에서 떨려 나간 사람에게 남는 것은 본능과 욕망뿐이라고들 한다. 김유정은 그것을 추악으로 보지 않는다. 생명의 최후의 불빛이며, “사람이 사람을 미워하지 않기 위한 마지막 몸부림”이라는 풀이도 전해진다. 삶이 이미 도둑맞은 땅에서 사람은 자신에게서조차 훔쳐야 살 수 있었다. 식민지 조선 농민의 자화상이다.
자연은 변함없이 아름답다. 들국화와 송이는 향기롭지만 그 향기에 스며든 사람의 냄새는 썩은 송이를 닮았다. 썩은 냄새는 곧 생명의 냄새다. 김유정은 그 냄새를 숨기지 않는다. 사람이 얼마나 비루해질 수 있는지 드러내되, 그 비루함 속에서 사라지지 않는 존엄을 붙든다. 소설의 마지막, 응칠의 눈물을 감싸는 어둠은 단순한 슬픔의 어둠이 아니다. 기댈 데 없는 미물들의 밤이다. 모두가 제 죄와 슬픔을 끌어안고 겨우 버티는 밤이다. 김유정은 그 밤을 비추지 않는다. 어둠 속에서 여전히 살아 있는 숨소리를 받아 적을 뿐이다.
미물들의 어제는 우리들의 오늘이 된다. 어제가 오늘이 아니기를 바랐던 날들의 초상은 1980년대 한국 영화에 자리 잡고 있다. 그 속의 사람들은 어제의 그들이 오늘의 내가 될 수밖에 없다는 필연의 중력에 끌려 세상의 중심에서 가장자리로 떠밀린다.
가명으로 눌러앉은 청년
1990년을 한국 영화는 르네상스를 기다리는 마중물의 시간으로 기억한다. 1990년대 초중반에는 기획영화라는 방법이, 후반에는 한국형 블록버스터라는 이정표가 산업의 방향을 틀었다. 그 여명 직전인 1980년대 후반, 영화들은 낮게 움츠린 채 어정쩡한 자세를 취하고 있었다. 그 형국을 잘 보여 주는 작품이 1990년이라는 경계의 시간에 나온 〈그들도 우리처럼〉(1990, Black Republic)이다.
감독 박광수는 〈칠수와 만수〉(1988)로 데뷔해 ‘문제적 감독’이라는 수식어를 얻었다. 〈그들도 우리처럼〉은 그의 두 번째 연출작이다. 그의 화면은 누군가에게는 불경한 도전이었고, 다른 누군가에게는 먹먹한 위로였다. 영화는 1991년 싱가포르국제영화제에서 아시아 장편 은막상(Silver Screen Award)을 받았다.
80년대 어느 탄광촌, 서울말을 쓰는 청년 기영(문성근)이 일자리를 찾아 헤맨다. 광부 자리는 끝내 얻지 못한다. 낯선 이방인처럼 연탄 공장 숙직실에 눌러앉아 차갑고 눅눅한 방에 몸을 기댄다. 그는 시위 주동 혐의로 쫓기는 대학생이고, 기영은 그가 쓰는 가명이다. 이곳에서는 이름이 무엇인지가 중요하지 않다. 탄광촌은 늘 일손이 모자랐으나 외지인에게는 문을 열지 않는다. 사람보다 무겁고 어두운 검은 세계의 질서만이 뚜렷하다.
지역 형사의 시선은 의심과 경계로 빛난다. 낯선 사람일수록 이곳의 벽은 견고하다. 잦은 파업과 인구 이탈로 사람마저 지쳐 가는 땅이다. 사업주의 부동산 투기에 말려든 탄광촌은 폐광의 위기 앞에 서 있고, 갱도 광부들은 생존권을 걸고 마지막 파업을 벌인다. 노동의 외침만 메아리칠 뿐 아무도 온전히 손을 들어 주지 않는다. 그런데도 이 땅은 끝내 기영을 품는다.
연탄 공장 사장의 외아들 성철(박중훈)은 다방과 술집의 폭군으로 군림한다. 다방에서 제 시간과 몸을 티켓으로 파는 영숙(심혜진)은 그의 폭력에 시달리다 기영에게 마음을 둔다. 파업의 먹구름 아래에서도 두 사람의 사랑은 무르익는다. 신분이 드러나 기영이 떠나야 하는 날, 함께 길을 나서려던 영숙은 앞을 막아선 성철을 죽이고 경찰에 끌려간다. 도망자는 떠나고, 남은 사람이 이 땅에 붙들린다.
영화는 연도도 지명도 적지 않는다. 시대의 표식을 남기려 하지 않는다. 그런데도 화면 가장자리에서는 1980년 4월 강원도 정선 사북의 그림자가 어른거린다. 동원탄좌 노동자와 가족들이 들고일어난 사북항쟁이다. 10년이 지나 만든 영화인데도 시간의 이질감은 없다. 1980년이나 1990년이나 탄광촌은 본질적으로 달라지지 않았다. 변하지 않는 가난과 절망이 화석처럼 굳어 있다.
여기서 시간은 진보를 약속하지 않는다. 무감각과 반복 속으로 스며드는 영원한 현재, 오늘이 지나가는 대신 하나의 상태로 눌러앉는다. 탄광촌의 검은 먼지는 공간의 흙이 아니라 삶의 퇴적물이다. 저항과 굴복, 기억과 망각이 그 안에서 한데 엉킨다. 영화는 흙먼지와 연탄재 사이로 빛과 어둠을 교차시키며 회색조의 서사시를 편다. 그 서사시에는 영웅이 없다. 견디는 사람들이 있을 뿐이다.
석탄은 한때 나라의 효자였다. 바깥에서는 값비싼 수출품이었고, 겨울의 길고 쓸쓸한 밤에는 따스한 심장이었다. 몸속 깊이 불을 품고 온전히 소진된 석탄은 허옇게 남은 잿더미조차 미끄러운 골목길을 지켜 주는 묵묵한 파수꾼이 되었다. 광부들의 노동 생산성은 국경을 넘어 독일에까지 알려졌고, 그들은 외화벌이의 역군으로 불렸다. 그러다 석탄은 기름에게 길을 내주었다. 탄광과 그 땅에서 땀 흘린 이들의 시대가 역사 속으로 서서히 저물었다.
영화의 영어 제목은 Black Republic이다. 온통 검은 먼지와 연탄재를 뒤집어쓴 작은 마을은 세상의 부조리와 모순을 압축한 축소판, 하나의 검은 공화국이다. 이곳 사람들은 서로가 서로의 그림자다. 누구 하나 편들지 못하고 누구도 손가락질하지 않으며, 검은 먼지 속에서 동질의 삶을 나눈다. 그들이 우리였고 우리가 그들이었다. 이름 없는 이들의 마을에서 가명으로 숨은 청년의 이름이 무엇인지는 끝내 중요하지 않다.
오늘이 상태가 되는 곳
사북은 정선이다. 내 기억 속의 탄광촌은 태백, 그중에서도 황지였다. 예전에는 황지로 오르려면 기차가 산비탈을 앞뒤로 지그재그 왕복하며 올라가는 진풍경을 겪어야 했다. 영동선과 태백선, 철암선은 한때 사람보다 석탄을 더 많이 실어 나른 노선이었다. 산자락 아래 펼쳐진 탄 적하장, 그 곁 배추밭의 검은 흙과 푸른 잎이 이루던 조화는 지금도 선명하다. 기차는 석탄을 싣던 길로 아이를 실어 날랐다. 그 길이 무엇을 싣고 다녔는지, 아이는 알지 못했다.
방학이면 어머니는 갓 일곱 살이 된 나를 친정이 있는 강원도 산골로 보냈다. 입 하나를 줄이려는 셈이었다. 간이역마다 멈춰 서는 기차로 8시간 넘게 달리면 태백선 황지역에 닿았고, 군청에 다니던 외삼촌이 부업으로 모는 택시가 기다리고 있었다. 그때의 황지와 지금의 태백은 겉모습이 크게 달라 보이지 않는다. 무심한 관찰인지, 오래 굳은 풍경 탓인지 알 수 없다. 일 년 내내 서늘하던 공기는 그리움으로 남아 가끔 가슴을 파고든다. 기억은 풍경을 붙들어 시간을 속인다. 속는 줄 알면서도 우리는 그 속임수에 기대어 수십 해를 한 걸음처럼 건넌다.
영화를 다시 보는 내내 마음 한구석이 먹먹했다. 35년이 넘는 세월을 건너도 그 시절의 모습은 낯설지 않았다. 가장 가난한 마을, 탄광촌의 그림자는 여전히 익숙했다. 오래된 기억의 틈에서 나는 나이가 들었음을 인정해야 했다. 언제까지나 청년일 줄 알았다는 착각이 깨졌다. 창백한 퇴폐미를 띠었던 문성근은 이제 굵직한 중년 연기의 대가가 되었고, 그 새까만 동네에서 한때 찬란했던 심혜진은 일일 드라마의 사모님이 되어 있었다. 스크린 속 청춘이 늙어 가는 것을 보며, 늙는 것이 배우만은 아님을 알았다.
영화 제목이 가리키는 그들과 우리는 누구인가. 이 물음은 자리만 바꿔 가며 해마다 다른 답을 요구하는 수수께끼 같다. 어제는 그들이 불쌍했고, 오늘은 내가 더 처연하다. 스스로를 무엇이라 규정하든 시간은 멈추지 않고, 그 흐름의 중력은 우리 모두를 조금씩 바꾼다. 찬란한 시간은 없었지만 누구에게나 꿈꾸던 날들이 있었다. 나는 오늘의 어둠을 희망이라 부를 수 있을까. 사라져 간 것들에 대한 묵념을 거두고 내일을 향해 한 걸음 내딛고 싶다. 쉰네 살이 되어서도.
우리가 오늘을 무엇이라 부르든 간에
이미 변화는 시작되었다.
사라져야 할 것들은
오늘의 어둠 속에서 절망하지만,
보다 찬란한 내일을 살아가는 이들은
오늘의 어둠을 희망이라 부른다.
— 영화의 마지막 내레이션
이 영화는 지역 슬롯의 기록에 머물지 않는다. 산업화와 도시화의 길목에서 소외되고 잊힌 탄광촌 노동자의 삶을 담았다. 노동자의 각성과 실천을 겨눈 〈파업전야〉와 달리, 이 영화는 노동의 현장을 멜로의 정서로 감싼다. 한국 노동영화사에서 이 작품이 차지하는 자리다. 영화 운동에서 단련된 박광수의 현실 인식은 한국 슬롯의 구조적 모순과 그 안에 갇힌 인간군상을 예리하게 겨눈다. 탄광촌의 어두운 풍경은 배경을 넘어 인간 존재의 고통과 부조리를 상징하고, 그 풍경 속 얼굴들은 빛이 닿지 않는 진실의 한 단면으로 남는다.
그러니 오늘은 고정된 실체가 아니다. 오늘은 끊임없이 다시 쓰이는 역사다. 영화는 그 변화의 무게를 오롯이 건네며 묻는다. 우리 모두가 그들이자 우리라는 사실을. 자리가 바뀌고 세월이 흘러도, 어둠 속에서 서로를 마주 보고 이해하는 일만이 희망일 수 있다는 것을.
잔존하는 것들의 가을
응칠과 응오, 기영과 영숙, 그리고 탄광촌 사람들은 세월이 쌓인 어둠 속에서도 사라지지 않는다. 생존의 몸부림은 흔적 없이 역사에 묻히지 않고, 부서진 문틈으로 스며들어 오늘의 뿌리를 드러낸다. 김유정의 산골과 박광수의 탄광촌은 서로 다른 땅이지만 같은 질문 위에 놓여 있다. 두 작품은 삶의 불가해한 아이러니를 각자의 방식으로 보여 준다. 한쪽은 문장으로, 다른 쪽은 화면으로 같은 어둠을 받아 적었다.
레이먼드 윌리엄스는 『마르크스주의와 문학』에서 문화의 요소를 지배적인 것, 부상하는 것, 잔여적인 것으로 나누어 읽었다. 잔여적인 것(殘餘的, the residual)은 과거에 형성되었으나 사라지지 않고 현재의 문화 안에서 여전히 활동하는 요소를 가리킨다. 낡은 것과는 다르다. 지나간 줄 알았던 것이 지금을 떠받치고 있다는 뜻이다. 석탄의 시대는 저물었어도 빚이 삶을 삼키고 거두어도 제 몫이 되지 않는 감각은 다른 이름으로 오늘의 일터와 식탁 곁에 남아 있다. 그 잔여가 응칠과 응오가 지켜 낸 미물의 윤리다. 응칠의 폭력과 응오의 도둑질은 범죄이기에 앞서, 가난과 억압 속에서 사람이 보낼 수 있는 마지막 신호다. 오늘의 우리도 눈에 보이지 않는 구조와 권력의 그물 속에서 최소한의 존엄을 지키려 몸부림치지 않는가.
삶은 가혹하고 선택은 늘 제한적이다. 조건이 불리하고 구조가 불공정할수록 사람은 더 원초적이고 절박한 선택 앞에 선다. 그 선택은 합법과 불법, 윤리와 비윤리라는 이분법을 넘어선다. 어제의 사람들은 답을 주지 않는다. 남은 질문만 분명하다. 우리는 어디에 기댈 수 있는가. 어디까지 스스로를 지킬 수 있는가. 영화의 내레이션은 오늘의 어둠에 이름이 둘이라고 말한다. 절망이라 부르는 쪽과 희망이라 부르는 쪽. 어느 쪽에 서는가는 어둠이 정해 주지 않는다. 그 어둠을 누구와 나누는가가 정한다.
가을은 거두는 계절이다. 그러나 이 땅의 가을은 거둘 것 없는 이들에게 가장 길다. 무르익음이 풍요가 아니라 결핍의 다른 이름이 되는 계절, 잔존이란 그 가을이 해마다 돌아온다는 말이다. 우리는 그 가을을 어떻게 읽을 것인가.
어제의 미물은 오늘의 우리이며, 오늘의 우리는 내일의 미물일 수 있다. 이 순환 안에서 삶의 진실이 드러난다. 사람은 웃고 울고, 때로는 서로를 구원한다. 검은 먼지와 흐린 가을 하늘 아래에서 미물들의 삶은 끝나지 않는다. 그것은 우리의 삶이고 우리의 역사이며, 앞으로도 이어질 기록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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