어둠에게도 이름이 있다

네덜란드의 '더스킹(Dusking)' 문화를 보면서

by박 스테파노
- 빛의 결핍이라는 오래된 착각
- 잠들지 못하는 밤의 존재감
- 왕국의 빛과 민중의 미광
- 어둠을 환대하는 용기


암스테르담의 저녁. 한 중년 사내가 창가에 앉아 있다. 불은 켜지 않았다. 낮의 소음이 잦아들고, 노을이 방 안으로 걸어 들어온다. 그는 그것을 맞이한다. 커튼은 없다. 이 도시의 창은 애초에 가리기 위해 나 있는 것이 아니다. 벽이 아니라 문이다. 빛이 스러지는 속도만큼 사내의 숨도 느려진다. 그는 스위치에 손을 얹지 않는다. 어둠이 오는 것을 지켜본다. 막지 않는다. 그것은 기다림이라기보다, 오래 미뤄둔 인사에 가깝다.


수백 년 전, 델프트의 한 화가도 창가에 있었다. 그는 촛불 하나를 켜두고, 정작 그 빛이 닿지 않는 자리를 더 오래 들여다보았다. 붓은 빛보다 어둠에 더 오래 머물렀다. 왜였을까. 빛 한 점을 화폭에 앉히기 위해서는, 먼저 그것을 에워싼 어둠의 두께를 알아야 했기 때문이다. 빛은 어둠을 배경으로 삼을 때에만 빛이 된다. 화가는 그것을 알았다.


두 장면 사이에는 몇백 년의 시간이 있다. 그러나 응시의 자세는 조금도 다르지 않다. 어둠을 쫓아내지 않고 그 곁에 앉는 일. 더스킹(Dusking)이라 불리는 네덜란드의 오랜 저녁 의식은 바로 이 자세에서 출발한다. 낮과 밤 사이, 개와 늑대의 시간이라 불리는 그 짧은 경계에서 사람들은 아무것도 하지 않는다. 다만 어두워지는 것을 바라볼 뿐이다.




빛의 결핍이라는 오래된 착각


아우구스티누스는 어둠을 실체로 보지 않았다. 그에게 악은 선의 결핍(privatio boni)이었고, 어둠은 그 결핍을 설명하는 가장 오래된 비유였다. 빛이 없는 곳을 우리는 어둡다고 부르지만, 어둠 자체는 존재하지 않는다고 그는 말했다. 있는 것은 다만 빛의 부재뿐이다. 이 오래된 문법은 서구의 사유 속에 깊이 뿌리내렸다. 어둠은 언제나 극복해야 할 결여였고, 빛은 굳이 증명할 필요 없이 그 자체로 선이었다. 그러나 이 문법을 한 걸음 물러나 바라보면, 다른 질문이 남는다. 어둠은 정말 아무것도 아닌가.


더스킹은 이 문법을 소리 없이 반박한다. 네덜란드의 집들은 유난히 크고 낮은 통창을 갖는다. 커튼은 애초부터 걸지 않는다. 창은 내부를 가리는 벽이 아니라, 안과 밖을 잇는 통로로 지어졌다. 해가 저물면 사람들은 불을 밝히던 손을 잠시 멈춘다. 텔레비전도, 스탠드도 켜지 않는다. 그저 소파나 창가에 앉아, 오렌지빛 노을이 청회색으로, 다시 짙은 남색으로 바뀌어가는 순서를 지켜볼 뿐이다.


editorial-illustration--semi-flat-vector-with-lith.png▲ 빛 한 점을 앉히기 전, 화가는 먼저 어둠의 두께를 그렸다. ⓒ Visual Concept & Art Direction: PSTPHNS


어둠이 방 안 깊숙이 차오르는 그 완만한 속도를, 사람들은 서두르지 않고 받아 적듯 바라본다. 전기를 아끼려는 절약의 습관에서 시작되었다는 설명은 절반의 진실일 뿐이다. 더 깊은 곳에는, 어둠을 결핍이 아니라 하나의 온전한 사건으로 맞이하려는 태도가 있다. 방 안의 사물들이 윤곽을 잃고 그림자 속으로 걸어 들어갈 때, 그들은 그 사라짐을 손실로 계산하지 않는다. 어둠은 빛이 물러간 자리가 아니다. 빛과 나란히 걸어 들어오는 또 하나의 손님이다.




잠들지 못하는 밤의 존재감


레비나스는 이 손님을 다른 이름으로 불렀다. 그는 모든 존재자가 사라진 뒤에도 끝내 남는 익명의 있음을 '그저 있음(il y a)'이라 명명했다. 불면의 밤, 사물의 형체가 지워진 자리에 그럼에도 남는 것. 안과 밖의 구별이 사라지고, 나와 세계의 경계가 흐려지는 그 웅성거림. 그에게 어둠은 무(無)가 아니었다. 오히려 무가 불가능해지는 자리, 존재가 마침내 존재 그 자체로 남는 자리였다. 모든 것을 지운 뒤에도 지워지지 않는 무엇. 어둠은 바로 그 무엇의 다른 이름이다.


더스킹의 삼십 분은 이 있음을 몸으로 통과하는 시간이다. 방 안의 사물이 윤곽을 잃어갈 때, 창밖의 거리와 창 안의 거실도 서서히 하나로 섞인다. 지나가던 이는 어둠에 잠겨가는 실내의 정적을 느끼고, 안에 앉은 이는 스러지는 거리의 빛을 자기 안으로 들인다. 사생활과 공동체를 가르던 경계는 이 시간 동안 잠시 무너진다. 무너짐이되, 침입은 아니다. 서로를 훔쳐보지 않고, 다만 같은 어스름을 나눠 갖는 일이다. 무엇이 사적인 것을 사적이게 하는가. 커튼이 아니라 빛이었을지도 모른다. 불이 꺼진 방에는 감출 것이 없다. 어둠 속에서는 안도 밖도 모두 같은 얼굴을 하고 있으므로. 그 얼굴 앞에서, 숨길 이유도 숨을 이유도 사라진다.


editorial-illustration-in-restrained-european-maga.png▲ 커튼 없는 창 앞에서, 안과 밖은 같은 얼굴을 한다. ⓒ Visual Concept & Art Direction: PSTPHNS


이 시간은 네덜란드만의 것이 아니었다. 스웨덴 사람들은 그것을 '어스름의 시간(Skymningstimmen)'이라 불렀다. 긴 겨울을 견디는 이들에게 그것은 촛불조차 켜지 않은 채 침묵을 나누는 안식이었다. 이탈리아의 마을에서는 사람들이 저녁이 되면 거리로 나와 천천히 걸었다. 목적지 없는 이 산바카라, 파세자타(Passeggiata)는 저녁의 공기를 마을 전체가 함께 맞는 동적인 환대의 의식이었다.


우리에게도 그런 시간이 있었다. 조선의 선비들은 대청마루에 앉아 임풍영월(臨風詠月, 바람을 맞으며 달을 읊음)했다. 촛불을 서둘러 켜지 않고, 산 그림자가 마루를 덮어오는 것을 지켜보았다. 자연을 통제할 대상이 아니라 삶의 풍경으로 끌어안는 차경(借景)의 마음이었다. 형식은 저마다 달랐다. 그러나 몸의 자세는 같았다. 어둠에게 자리를 내어주는 일.




왕국의 빛과 민중의 미광


더스킹이 매일 저녁 되풀이하는 이 응시는, 사실 화가들이 캔버스 앞에서 평생 되풀이한 응시와 다르지 않다. 델프트의 화가, 요하네스 페르메이르(Johannes Vermeer)는 〈우유 짜는 하녀〉(1658년경, The Milkmaid)와 〈창가에서 편지를 읽는 여인〉(1657년경, Girl Reading a Letter at an Open Window)에서 빛을 방 전체가 아니라 오직 한 지점에만 허락했다. 빛은 어둠과 대치할 때에야 사물의 질감을 드러냈다. 렘브란트 반 레인(Rembrandt van Rijn)은 여기서 한 걸음 더 나아갔다. 그의 명암법(Chiaroscuro)에서 어둠은 인물을 지우는 배경이 아니라, 인물을 떠받치는 밀도 있는 물질이었다. 〈야경〉(1642년, Night Watch)의 검은 배경은 빈 공간이 아니다. 그것은 인물의 존재감을 완성하는 또 하나의 몸이다.


조르주 디디-위베르만은 이 어둠 속의 빛에 다른 이름을 주었다. 그는 세상을 압도하는 '왕국의 빛(luce)'과, 그 어둠을 산발적으로 스쳐 지나가는 '민중의 미광(lucciole)'을 구분했다. 반딧불은 결코 모든 빛의 빛으로 도래하지 않는다. 다만 어둠 속을 지나가며, 파괴가 절대적이지 않다는 것을 증언할 뿐이다. 그렇다면 우리가 지켜야 할 것은 어느 쪽인가. 모든 것을 밝히는 빛인가, 어둠 속에서도 꺼지지 않는 하나의 미광인가.


editorial-illustration-reinterpreting-rembrandt-st.png▲ 어둠은 그를 지우지 않는다. 다만 떠받칠 뿐이다. ⓒ Visual Concept & Art Direction: PSTPHNS


오늘의 도시는 왕국의 빛으로 가득하다. 꺼지지 않는 조명, 서치라이트처럼 사람을 비추는 화면들. 그 안에서 우리는 스스로 상품처럼 밝혀지기를 욕망한다. 잠들지 않는 간판과, 잠들지 못하는 얼굴들. 그러나 더스킹의 창가에 앉은 사람은 그 화려한 조명 대신, 촛불 하나만큼의 미광을 택한다. 화가가 오랜 시간 화폭 위에 남기려 했던 것도 결국 그 미광이었다. 왕국의 빛이 아니라, 어둠 속에서도 끝내 꺼지지 않는 작은 빛. 미광은 크지 않다. 다만 꺼지지 않을 뿐이다.




어둠을 환대하는 용기


빛을 결핍의 반대말로 배운 사람에게, 어둠을 받아들이는 일은 두려움과 맞서는 일처럼 느껴진다. 그러나 더스킹이 가르치는 것은 다른 종류의 용기다. 존재를 결핍으로 읽지 않는 용기, 사라짐을 손실로 계산하지 않는 용기다. 어둠은 삶의 유한성을 가장 정직한 얼굴로 보여준다. 낮의 노동과 증명이 저물고, 아무것도 더 증명할 필요 없는 정적이 도래할 때, 소멸은 공포가 아니라 안식으로 바뀐다. 매일 저녁 삼십 분, 스위치를 미루는 그 작은 유예는 그래서 사소하지 않다. 그것은 하루에 한 번, 스스로에게 어둠을 허락하는 의식이다.


split-composition-editorial-illustration-in-restra.png▲ 왕국의 빛은 모든 것을 비추지만, 꺼지지 않는 것은 작은 미광이다. ⓒ Visual Concept & Art Direction: PSTPHNS


다시 암스테르담의 창가다. 사내는 여전히 불을 켜지 않는다. 어둠이 그의 방을 다 채웠다. 사물의 이름들도 함께 지워졌다. 그러나 그는 무언가를 잃었다고 느끼지 않는다. 오히려 하루 중 가장 정직한 순간에 도달했다고, 그는 어렴풋이 느낀다. 델프트의 화가가 어둠의 두께를 먼저 익힌 뒤에야 빛 한 점을 화폭에 앉혔듯, 사내도 어둠을 온전히 통과한 뒤에야 비로소 자신의 하루를 완성한다. 어둠에게도 이름이 있다. 그 이름을 나직이 불러주는 일, 그것이 더스킹이 우리에게 오래전부터 건네고 있던 초대장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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