지수는 신탁 계약이 처음 이었다. 살면서 부동산 계약은 아파트 전세로 두 번, 해외에서 한 번이었는데 다행히 등기부등본이며 집주인 재정 상태 등이 양호한 편이라 계약할 때 어렵지 않았다.
"요즘 뭐 신탁 계약도 많아서요, 걱정마시고 그냥 저 믿고 계약하시면 되요~"
라고 부동산 아저씨가 말했지만, 지수와 허부장은 불안했다. 법대를 나온 허부장은 아는 법무사 형에게 계약서를 검토해 봐달라고 해야겠다며 난리다. 지수는 신탁 계약에 대해서 알아보기 시작했다. 등기부등본을 확인하고 40여장이나 되는 신탁 계약서를 다운받아 꼼꼼히 읽어보기 시작했다. 중요 사항에는 형광펜으로 줄을 긋고 잘 모르는 내용이 나오면 표시해두었다. 법무사든 부동산 중개인이든 신탁 계약에 대해 말을 하려면 내가 어느 정도 알고 있어야 할 것이 아닌가. 지수는 누군가에게 모든 걸 다 맡기지 못하는 그런 사람이었다. 사서 고생을 하는 사람이었다. 걱정이 많은 사람이었다. 그렇게 어느 정도 신탁 계약에 대해서 알고나니 지수의 머리 속에 매물의 계약관계가 그려지고 그녀가 내는 월세가 누구의 호주머니로 들어가는지, 만약에 부동산이 경매에 넘어가면 어떤 시나리오가 펼쳐지는지 대충 감이 잡혔다. 이제 이걸 토대로 남편과 이야기 할 일만 남았다.
"부동산 계약서부터 달라고해. 그런 다음 생각해 보겠다고 하라고"
지수의 피가 머리로 쏠린다.
'와씨 내가 니 비서냐? 그럴거면 니가 알아보고 니가 알아서 결정하고 니 맘대로 해. 왜 나한테 이래라 저래라야.' 목구멍까지 차오르는 말을 꾹꾹 누른다. 지수는 이럴 때마다 죽고 싶다. 그녀에겐 사람 간의 관계에서 오는 긴장감, 불협화음에서 오는 스트레스가 가장 크다. 스트레스를 넘어선 고통이다. 그래서 어렸을 때부터 착한 아이 신드롬이 있었다. 사람과의 긴장을 극도로 싫어해서 어떤 일이 생기면 혼자 끙끙 앓는다. 고민을 하고 또 고민을 한다. 내가 이렇게 말했을 때 이 사람이 이렇게 나오면 어떡하지? 그러면 나는 어떻게 말을 해야 이걸 잘 끝낼 수 있을까? 이러한 시나리오를 수도 없이 만들어 머리 속으로 돌려본다. 싸우지 않고 가장 원만하게 끝내기 위해 착한 아이가 되기로 한다. 지수는 어렸을 때 위경련과 편두통으로 응급실을 오고 간 일이 잦았다. 그럴 때마다 원인을 찾지 못해 아이가 예민해서 신경성 스트레스인것 같다. 라는 이야기를 들었다. 그녀에게 펼쳐지는 온갖 상황과 그에 따른 감정과 그걸 원만하게 해결하기 위해 고민을 거듭하는 노력에서 오는 고통을 단순히 '예민하네요' 라고 한 줄의 문장으로 끝내버리는 것은 허무하고 억울하지만 어쩔 수가 없다. 그렇게 태어난 것을. 어쩌랴. 지수를 비서 따위로 치부하는 허부장의 태도에서도 그녀는 참는다. 이 모든 일의 중심에서 큰 싸움이 나지 않도록 스스로 중재인이 되기로 한다.
"저희가 신탁 계약이 처음이라서요, 부동산 계약서를 먼저 주시면 저희가 좀 알아보고 계약을 할지 안할지를 고민해 보면 안될까요?"
"사모님, 계약서는 계약을 하신다고 하셨을 때 써서 드리는 거지, 이렇게 검토용으로 먼저 계약서를 써서 드리는 경우는 없죠~" 부동산 아저씨 입장에서는 매매도 아니고 월세 매물을 이렇게까지 해야하나 싶은 마음일거다. 그것도 모르는건 바 아니지만, 임차인 입장에선 보증금과 매달 월세를 내는 일이고 거기다 빌라를 한 사람이 아닌 여러명이 돈을 모아 지은 상황에, 그 중 한 사람이 제 2은행권에 돈을 빌려 자금을 대었다. 빌라가 미분양이 되어 자금 회수를 못했고 이것이 신탁으로 운용이 되고 있는 이유인 상황에서 꼼꼼하지 않을 수가 없었다.
어떤 일을 결정할 때 챗GPT에 물어보는 것이 일상이 된 허 부장은 '임차인' 관점에서 계약시 주의해야 하는 것들을 리스트로 뽑았다. 일의 효율화를 위해 탄생 된 인공지능이 이런 경우에는 일을 더 안되게 하는 역할을 한다. 마치 창과 방패처럼 '임차인'과 '임대인'관점에서 계약시 어떻게 하는 것이 더 유리한 가를 뽑아내기 때문에 일을 해결하게끔 도와주는게 아니라 일을 빙빙 돌게 한다. 계약서를 업로드하면 한 문장, 한 단어의 꼬투리를 잡고 이건 이렇게 해석될 여지가 있으니 이렇게 바꾸고, 저건 저렇게 바꾸어라. 라고 '지시'를 내리니 신탁 계약서를 제대로 읽어보지 않은 허부장은 챗 GPT의 말을 곧이 곧대로 믿는다. 그러고는 지수에게 다시 부동산에 이걸 요청하고 저걸 이렇게 바꿔라라고 다시 '지시'를 내린다. 지수는 허부장의 일처리 꼬라지를 보니 될 일도 안되게 생겼다라고 생각을 한다.
"사모님, 임대인 쪽에서 계약 안하겠다고 하시네요. 사모님이 부탁을 하셔서 제가 혹시라도 계약 전에 신탁 동의서를 받아볼 수 있는지를 물어봤는데, 신탁계약의 기본도 모른다면서 저하고는 계약을 안하시겠다고 하시네요. 저한테 임대인이 전화해서 화를 있는대로 내시는데, 저도 이 매물은 진행안하고 싶네요. 혹시 계약하고 싶으시면 다른 부동산과 진행하시는게 좋을 것 같습니다"
하아...내 이럴 줄 알았다. 라고 지수는 생각했다. 그녀의 남편도 한 댓가리 성격에 왕고집이 있지만 그렇다고 부동산 아저씨한테 화를 내며 전화를 끊어버리는 임대인도 성격이 불같구나 싶었다. 그 임대인은 빌라에 거주중이라서 만약 계약을 하게 된다면 이웃이 될 사람인데, 몰랐으면 모르겠지만 성격을 안 이상 지수도 그 곳에 살고 싶지 않았다.
그럼 다시 원점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