중종반정과 기묘사화 ㅡ중종이 사랑했던 조광조, 그리고 그를 죽이다
초롱초롱 박철홍의 조선사도 흐른다! 50
ㅡ 중종반정과 기묘사화 ㅡ
(중종이 사랑했던 조광조, 그리고 그를 죽이다)
갑자사화를 냉정하게 정치적으로 바라보면 단순히 연산군이 어머니 '폐비윤씨' 원수를 갚기 위해 일으킨 사건으로만 보기는 어렵다.
폐비윤씨 사건이 직접적인 명분과 계기가 된 것은 분명 하지만 그 이면에는 '연산군'이 기존 대신 세력을 제거하고 자신에게 충성하는 '임사홍'·'신수근' 등 궁중 측근세력을 강화하려는 권력재편 성격도 있었다.
당시 연산군의 호사스럽고 방탕한 생활과 잦은 연회, 토목공사 등으로 국가와 왕실 재정부담도 커지고 있었다.
당시 조선 경제환경도 서서히 변하고 있었다. 성종 때부터 농업생산력이 향상되고 15세기말부터 지방 장시가 늘어나면서 농촌에서도 물건을 사고파는 유통경제가 성장하기 시작했다. 중국과 교역도 점차 활발해졌고 민간상인들 활동영역도 넓어졌다. 이런 변화는 16세기에 들어가면서 더욱 본격화된다.
중국에서는 은 수요가 크게 늘어나고 있었고 조선에서도 대외무역에 필요한 은을 확보하려는 움직임이 나타났다. 상업이 발달하면서 돈과 물자 흐름도 이전보다 커졌다.
그러나 경제가 발전한다고 해서 모든 백성이 잘살게 되는 것은 아니었다.
토지를 잃는 농민도 늘어났고 양반과 권세가 토지겸병과 수탈도 계속되었다. 농촌을 떠돌다가 장사꾼이 되는 사람도 있었고 유랑민이나 도적 집단에 합류하는 사람들도 나타났다.
연산군 시대 실제인물 ‘홍길동’도 이런 시대에 등장했다.
실록 속 홍길동은 우리가 소설에서 만나는 의적 홍길동과는 다르지만 양반의 옷차림을 하고 지방관리까지 속이며 큰 무리를 이끌 정도로 이름난 도적이었다. 당시 백성들이 그를 어떻게 생각했는지는 정확히 알 수 없지만 훗날 홍길동이 의적으로 전설화된 데에는 이런 슬롯적 배경도 영향을 주었을 것이다.
경제가 성장하면 권력자들도 가만히 있지 않는다. 일부 훈구세력과 권세가들은 상인들과 결탁하거나 권력을 이용해 재산을 늘렸고 '성종' 때부터 중앙정계에 본격적으로 등장하기 시작한 사림들은 이런 권력형 부패를 강하게 비판했다.
훈구세력도 사림을 그냥 두지 않았다.
1498년(연산군 4) ‘무오사화’가 일어나 김종직 계열 사림들이 큰 피해를 입었다. 그러나 시간이 지나면서 훈구세력 내부도 하나가 아니었다. 연산군과 가까운 궁중 측근 세력이 새로운 권력중심으로 떠올랐다.
결국 1504년(연산군 10) ‘갑자사화’가 일어나면서 기존 훈신세력까지 대대적으로 숙청되고 남아 있던 사림도 다시 큰 피해를 입었다.
그러나 궁중세력 지나친 독주와 연산군 방종은 지배층 내부불만을 더욱 키웠다. 백성들 원성도 커졌다.
갑자사화로 큰 충격을 받은 기존 대신들도 이제 연산군을 더 이상 그대로 둘 수 없다고 생각하기 시작했다. 마침내 훈구세력을 중심으로 반정 움직임이 싹텄다.
전 이조참판 ‘성희안’은 지중추부사 ‘박원종’, 이조판서 ‘유순정’, 군자감부정 ‘신윤무’ 등과 함께 연산군을 몰아낼 계획을 세웠다.
그리고 여기 놀라운 인물이 또 한 사람 등장한다.
바로 ‘유자광’이다.
무오사화 직접적인 계기를 만든 인물 가운데 한 사람이었던 바로 그 유자광이다.
유자광은 얼자출신이었다. 하지만 세조·예종·성종·연산군 네 임금을 거치며 살아남았다. 출신 때문에 대신들 끊임없는 공격을 받았지만 왕들은 그의 능력과 충성을 인정했고 쉽게 버리지 않았다.
그런 유자광도 연산군 말기에는 정치적 입지가 흔들리기 시작했다. 그리고 마침내 중종반정 세력에 가담한다.
반정 성공 뒤에는 정국공신 1등에 바카라록 될 정도였으니 단순히 이름만 올린 정도도 아니었다.
대단한 생존력이다.
세조 때 등장해 예종과 성종을 거쳐 연산군 시대 무오사화에까지 깊숙이 관여했던 사람이 이번에는 연산군을 몰아내는 반정에 참여한 것이다.
유자광을 단순히 간신이라고 한마디로 규정하기 어려운 이유도 여기에 있다.
다음 편부터 두 편에 걸쳐 이 문제적 인물 유자광을 자세히 살펴보겠다.
처음 반정세력은 연산군이 장단 석벽으로 유람을 떠나는 날 거사를 실행하려 했다. 그러나 왕 행차가 취소되면서 계획에 차질이 생겼다. 여기에 연산군을 폐위하려는 격문이 서울에 나돌면서 더 이상 미룰 수 없게 되었다.
1506년 9월 1일, 박원종·성희안·유순정을 비롯한 반정세력은 훈련원에 무사들을 모았다. 이들은 연산군 왕비 신씨 오라버니이자 권력의 핵심이었던 '신수근'과 그의 아우 신수겸· 신수영 등을 제거하고 연산군 측근 세력을 무너뜨렸다. 그리고 백관을 거느리고 궁궐로 들어가 '자순왕대비' 윤허를 받아 연산군을 폐위했다.
중종반정 성공이었다.
연산군은 강화도 교동으로 쫓겨났다. 그리고 다음날 '진성대군'이 왕위에 올랐다.
조선 제11대 왕 ‘중종’이다.
그런데 중종은 준비된 왕이 아니었다. 반정세력이 자신을 왕으로 추대할 것이라는 사실조차 미리 알지 못했다.
전해지는 일화에 따르면 반정당일 자기 집으로 군사들이 몰려온다는 말을 들은 진성대군은 이복형 연산군이 자신을 죽이러 군사를 보낸 줄 알고 크게 두려워하며 자결을 하려 했다. 그러자 부인 신씨가 군사들 말머리가 어느 쪽을 향하고 있는지를 먼저 보자고 만류했다고 한다.
군사들 말머리가 집 바깥쪽을 향해 있었다. 진성대군을 공격하러 온 군사들이 아니라 보호하며 모셔가기 위해 온 군사들이었다.
그제야 자신에게 무슨 일이 일어난 것인지 알았다. 이처럼 중종은 반정 당일까지 자신이 왕이 될 줄 꿈에도 몰랐다.
그런 왕이 즉위 초기부터 자기 목소리를 내기는 어려웠다.
박원종·성희안·유순정 등 반정공신들 위세는 막강했다. 자신을 왕으로 만들어준 사람들이니 함부로 거스를 수도 없었다.
그저 조용히 왕 노릇을 배워야 했다. TV드라마 ‘대장금’에 나오는 중종처럼 수라간에서 만들어준 음식을 먹으며
“음~ 맛있구나!”
하고 있는 것처럼 보였을지도 모르겠다.^^
오죽했으면 중종은 자신 조강지처였던 신씨도 왕비로 데려올 수 없었다.
신씨 아버지가 바로 연산군 핵심 측근이자 반정과정에서 죽은 신수근이었기 때문이다.
반정공신들은 신수근의 딸이 왕비가 되는 것을 받아들이지 않았다. 결국 신씨는 폐출되어 궁궐 밖에서 평생을 살아야 했고 다시 왕비로 돌아오지 못했다.
여기서 유명한 ‘인왕산 치마바위’ 전설이 나온다. 신씨가 중종이 궁궐에서 볼 수 있도록 인왕산 바위에 자신이 입던 붉은 치마를 걸어놓았다는 애틋한 이야기다.
물론 역사적 사실이라기보다는 후대에 만들어진 전설에 가깝다.
그러나 이 전설이 오랫동안 사람들의 마음을 울린 것을 보면 반정으로 하루아침에 왕과 폐비가 되어 갈라져야 했던 두 사람의 운명이 그만큼 안타까웠던 모양이다.
중종이 왕위에 오른 지 십여 년이 지나자 상황이 달라졌다.
박원종·성희안 등 초기 반정공신들이 하나둘 세상을 떠나면서 중종도 조금씩 자신의 정치를 할 수 있게 되었다.
그러자 중종에게 새로운 고민이 생겼다. 반정공신들 힘을 견제할 새로운 정치세력이 필요했다.
그때 중종 앞에 나타난 사람이 바로 ‘조광조’였다.
그리고 이 무렵 담양부사 ‘박상’, 순창군수 ‘김정’, 무안현감 ‘유옥’이 중심이 된 '순창 삼인대사건'이 일어난다.
1515년 세 사람은 순창 강천사 계곡에 모여 중종반정 때 폐위된 중종 첫 왕비 '신씨'를 다시 왕비로 복위시켜야 한다는 뜻을 모았다. 박상과 김정은 결국 신씨 복위를 청하는 상소를 올렸다.
겉으로는 폐비신씨 억울함을 풀어주고 왕비로 복위시키라는 상소였지만 그 내용은 단순히 왕비 한 사람 복위문제에 그치지 않았다. 이들은 신씨 폐위를 강요했던 박원종·성희안·유순정 등 반정공신들 잘못까지 함께 지적했다. 결국 중종반정 이후 막강한 권력을 휘두르던 공신세력 전횡에 정면으로 문제를 제기한 셈이었다.
당연히 반정공신과 기존대신들은 강하게 반발했다. 박상과 김정은 처벌을 받게 된다.
그런데 이때 조광조가 나섰다.
조광조는 박상과 김정 상소 내용이 옳고 그름을 떠나 신하가 왕에게 자신 생각을 말한 것 때문에 죄를 주면 언로가 막힌다며 이들을 처벌하려 했던 대간을 오히려 강하게 비판했다. 이 사건을 계기로 조광조는 기존 대신들과 맞서 바른말을 하는 젊은 사림 대표적인 인물로 더욱 부각되었다.
따라서 순창 삼인대 사건은 단순한 신씨 복위운동만은 아니었다. 중종반정 이후 권력을 독점하고 있던 반정공신 세력에 대한 사림의 본격적인 문제 제기였고, 이후 조광조를 비롯한 신진사류가 정치적으로 힘을 얻어가는 하나의 계기가 되었다.
이런 일들로 인해 이조판서 '안당' 등의 추천을 받아 중앙 조정에 들어온 조광조는 중종 눈에 들어왔다.
먼저 원칙주의자이면서 이상주의자였던 조광조에 대해 알아보자.
조광조는 훗날 조선 사림을 대표하는 인물이 되지만 그의 가계만 놓고 보면 재미있는 점이 있다.
조광조는 조선 개국공신 '조온' 5대손이다. 혈통으로만 보면 오히려 개국공신 집안 후손이었다.
하지만 조광조가 살아가던 시대에는 이미 그의 집안이 개국공신이라는 이유만으로 중앙정계 핵심권력을 누리는 상황은 아니었다.
조광조 인생을 결정적으로 바꾼 사건은 열일곱 살 때 일어났다.
아버지 '조원강'이 종 6품 관직인 어천찰방으로 부임하면서 조광조도 아버지를 따라 북쪽 지방으로 갔다.
그곳에서 운명적인 스승을 만난다. 무오사화로 평안도 희천에 유배돼 있던 사림의 대표적 학자 ‘김굉필’이었다.
조광조는 김굉필에게 학문을 배우면서 성리학 세계에 깊숙이 들어갔다.
김굉필은 김종직 제자였다.
김종직에서 김굉필로, 다시 조광조로 이어지는 사림 학맥이 만들어진 것이다.
조광조는 이후 학문에 몰두했다.
행실도 매우 엄격했다. 평소 의관을 단정히 하고 성현의 가르침대로 행동하려고 노력했다. 워낙 지나칠 정도로 자기 관리를 철저히 해 당시 사람들 가운데는 그를 ‘광인(狂人)’ 또는‘화태' (禍胎), 즉 훗날 큰 화를 불러올 씨앗 같은 인물이라는 말까지 들었다.
조광조는 용모도 상당히 뛰어났던 것으로 전해진다. '유몽인'의 ‘어우야담’에는 조광조가 자기 얼굴을 거울에 비춰보며 너무 아름다운 얼굴이 남자로서 좋은 상은 아닌 것 같다며 탄식했다는 이야기도 전한다.
학문도 뛰어나고 청렴하고 행실도 반듯하고 외모까지 출중했다.
중종 눈에는 이런 조광조가 얼마나 멋있어 보였겠는가?
1515년 본격적으로 관직에 진출한 조광조는 불과 몇 년 만에 초고속 승진한다. 1519년에는 사헌부 대사헌까지 오른다.
요즘으로 비유하면 대사헌은 검찰총장과 감사원장 일부 기능을 합쳐놓은 것 같은 막강한 자리다.
중종과 조광조는 처음에는 손발이 척척 맞았다.
중종은 조광조에게 깊이 빠져들었다. 두 사람은 마치 신혼부부 같았다.
중종에게는 자신을 왕으로 만들어놓고 권력을 휘두르던 반정공신들과 다른 새로운 사람이 필요했다. 조광조에게는 자신이 꿈꾸는 세상을 만들어줄 왕이 필요했다. 이때만 해도 둘이는 서로가 서로에게 필요한 존재였다.
조광조가 추구한 정치는 유교를 정치와 교화 근본으로 삼아 성리학적 이상슬롯를 만드는 ‘도학정치’였다.
그는 왕부터 백성까지 모두가 성리학적 도덕규범에 따라 살아야 좋은 나라를 만들 수 있다고 생각했다.
왕도 예외가 아니었다.
오히려 왕이 가장 먼저 모범을 보여야 했다. 주자의 ‘가례’를 중시하고 상례와 제례를 성리학적 질서에 맞게 바꾸려 했다. 향약을 통해 지방 백성들 생활까지 유교 윤리에 맞게 교화하려 했다.
후대 조선슬롯에서 여성 재가를 부정적으로 보고 상례와 제례를 지나치게 엄격하게 따지는 분위기가 강해진 것도 이런 사림의 성리학적 질서 확대와 무관하지 않다. 물론 조광조 혼자 만든 세상은 아니었다. 그러나 조광조는 그런 방향으로 조선을 강하게 밀고 나간 대표적인 인물이었다.
물론 내 개인적인 생각이지만 이런 조광조 개혁을 오늘날 우리가 말하는 진정한 의미 ‘개혁’이라고 보기는 어렵다. 부패한 권력을 바로잡고 특권을 줄이려 했다는 점에서는 분명 개혁적이었지만 다른 한편으로는 백성들 생활과 생각까지 성리학적 기준 안에 넣으려 했기 때문이다
어쨌든 중종 신뢰를 등에 업은 조광조는 현실정치 실세로 떠올랐다. 그리고 유교적 이상정치를 구현한다는 명분 아래 ‘소격서’를 폐지했다.
소격서는 도교적인 제사를 담당하던 국가기관이었다.
당시 조선 슬롯에는 유교만 존재했던 것이 아니다. 불교와 도교, 풍수지리 각종 민간신앙이 백성들 생활 속에 깊이 남아 있었다. 조선을 세운 태조 이성계를 둘러싼 수많은 설화에도 이런 전통적 신앙이 강하게 묻어난다.
조광조는 이런 요소들을 성리학적 질서에 맞지 않는다고 보았다.
소격서 폐지는 그래서 단순히 관청 하나를 없앤 것이 아니었다.
조선이라는 나라의 정신세계를 보다 철저하게 성리학 중심으로 바꾸려는 상징적인 사건이었다.
나는 이 부분에서도 조광조를 무조건 개혁가라고 부르는 데 동의하지 않는다.
물론 조광조 개혁에는 긍정적인 면이 많았다. 부정부패를 비판하고 공정한 인재등용을 주장했으며 권세가 특권을 없애려고 했다. 청렴한 정치인 표본 같은 사람이기도 했다.
하지만 다른 한편으로 보면 우리 슬롯에 남아 있던 다양한 전통문화와 사상을 밀어내고 백성들 생활까지 하나의 성리학적 도덕규범 안으로 집어넣으려 한 인물이기도 했다.
훗날 조선슬롯가 지나치게 성리학적 명분과 예법에 얽매이게 되는 과정에서 조광조가 대표하는 도학정치가 어느 정도 영향을 주었다고 나는 생각한다.
지금도 우리가 초상을 치르고 제사를 지내는 생활문화 속에 그 흔적이 남아 있다.
이런 조광조 도학정치가 옳았는지 글렀는지는 읽는 분들의 판단에 맡긴다.
조광조는 이어 ‘현량과’를 시행해 학문과 덕행이 뛰어나다고 추천받은 젊은 사림들을 중앙정계에 대거 진출시켰다.
신진사류 세력이 빠르게 커졌다.
조광조에게는 드디어 자신이 꿈꾸던 세상을 만들 기회가 온 것처럼 보였다.
하지만 바로 여기서부터 중종과 조광조의 사랑에 금이 가기 시작한다.
조광조는 왕조차 도학정치를 함께 수행해야 할 사람이라고 생각했다. 그래서 경연을 강화하고 중종에게 끊임없이 성군이 되기를 요구했다.
후대에는 조광조가 중종의 경연 태도 하나하나까지 지적하고 왕에게 매우 엄격하게 공부를 요구했다는 여러 일화가 전해질 정도다. 그 일화 중에는 중종이 강연 중 하품하면 그것까지 공개적으로 왕 품위를 운운하며 지적했다고 한다.
처음에는 중종도 좋았다.
자신에게 거침없이 직언하는 젊은 선비가 얼마나 신선 했겠는가?
반정공신들처럼 권력과 재산만 탐하는 것이 아니라 오로지 나라를 바로잡겠다고 달려드는 조광조가 믿음직스러웠을 것이다.
그러나 사랑도 너무 지나치면 부담이 된다. 한 번은 멋져 보이던 직언이 두 번, 세 번 반복되면 잔소리가 된다.
중종의 입장에서는 왕이 되었는데 하루 종일 옆에서
“전하, 그러시면 안 됩니다.”
“성군이 되시려면 더 공부하셔야 합니다.”
“그것은 성리학의 도리에 맞지 않습니다.”
하는 말을 듣는 셈이었다.
더구나 신하들 앞에서까지 왕의 잘못을 거침없이 지적했다.
처음에는 웃으며 받아들이던 중종도 점점 숨이 막혔을 것이다.
중종과 조광조의 관계가 바로 그랬다.
사랑은 움직이는 것이다.
결정적인 사건이 터진다.
‘위훈삭제(僞勳削除)’였다.
중종반정이 성공한 뒤 무려 100명이 넘는 사람이 정국공신에 바카라봉되었다. 실제로 반정에 큰 공을 세운 사람도 있었지만 이름만 올리거나 공이 과장된 사람도 적지 않았다. 공신이 되면 단순히 명예만 생기는 것이 아니었다. 관직과 토지, 노비 등 엄청난 경제적 특권이 따라왔다.
조광조와 신진사류는 이것을 그대로 둘 수 없다고 생각했다.
공도 없이 공신이 되어 국가재정 축내고 특권을 누리는 사람들 공신자격을 박탈해야 한다고 주장했다.
결국 1519년 정국공신 가운데 상당수 공훈이 삭제됐다.
훈구세력에게는 날벼락이었다.
이것은 단순히 명예 문제가 아니었다. 자신들과 자손들이 누릴 정치적·경제적 특권이 한꺼번에 사라질 수 있는 문제였다.
더구나 중종 입장에서 생각해 보면 더욱 미묘했다. 정국공신은 자신을 왕으로 만든 사람들이다.
그들의 공훈이 거짓이라면 그 사람들이 일으킨 중종반정 정당성까지 흔들릴 수 있었다.
조광조는 훈구세력 뿌리를 건드렸고 동시에 자기도 모르게 중종 정통성과 정치적 기반까지 건드리고 있었다.
중종은 불편했다. 하지만 조광조와 신진사류는 물러서지 않았다. 자신들이 옳다고 확신했기 때문이다.
바로 여기에 조광조 장점과 단점이 동시에 있었다.
원칙을 지키는 사람은 훌륭하다.
그러나 정치에서 원칙만 있고 현실이 없으면 위험할 수도 있다.
훗날 송시열은 조광조보다 한술 더 떠 이런 모습을 더욱 강하게 보여준다. 다만 조광조가 서른일곱에 생을 마친 데 비해 송시열은 여든을 넘겨 살았다. 그만큼 자신의 사상과 정치적 영향력을 훨씬 오랫동안 조선 슬롯에 남길 수 있었다.
중종은 처음에는 조광조를 이용해 반정공신들을 견제하려 했다. 그런데 이제는 조광조와 신진사류가 또 하나의 거대한 정치세력이 되어 왕에게 끊임없이 자신들 기준을 요구하고 있었다.
중종 눈에는 훈구를 견제하려고 불러들인 사림이 오히려 자기 머리 위로 올라가려는 것처럼 보이기 시작했을 것이다.
훈구세력은 이런 중종 변화를 놓치지 않았다.
홍경주·남곤·심정 등이 움직였다.
실록에는 중종이 홍경주에게 여러 차례 비밀리에 뜻을 전한 사실까지 기록돼 있다.
기묘사화는 단순히 훈구세력이 순진한 왕을 속여 조광조를 죽인 사건만은 아니었다. 이미 중종도 조광조를 제거하는 쪽으로 마음이 기울고 있었다.
이 무렵 유명한 ‘주초위왕'
(走肖爲王) 이야기가 등장한다.
실록에도 나오는 이야기다.
‘走’와 ‘肖’를 합치면 조광조 성인 ‘趙’가 된다. ‘주초위왕’은 결국 ‘조씨가 왕이 된다’는 뜻이었다.
남곤·심정 등이 나뭇잎에 꿀로 ‘走肖爲王’이라고 써 벌레가 그 부분을 갉아먹게 만든 뒤 마치 하늘이 조광조가 왕이 될 것이라는 징조를 보여준 것처럼 꾸몄다는 이야기다. 드라마에도 자주 나오는 장면이다. 하지만 이 이야기를 그대로 믿기는 어렵다. 상식적으로 생각해도 벌레가 사람이 꿀을 바른 글자 모양 그대로 얌전히 파먹는 것은 불가능하다. 예전 티브에서 직접 그런 실험을 한 장면이 기억난다.
물론 가능하지 않았다. 더구나
이 이야기는 기묘사화 당시의 ‘중종실록’에 직접 기록된 내용이 아니다. 약 50년 뒤 ‘선조실록’에 중종실록에서 빠진 내용이라며 보충되어 등장한다.
실록에 나온다고 해서 모두 100% 사실인 것은 아니다.
실록은 당시 떠돌던 소문이나 후대에 전해진 이야기도 ‘이런 말이 있었다’며 기록하기 때문이다.
따라서 주초위왕 이야기는 실제 벌어진 사실이라 단정하기보다 조광조 제거를 둘러싼 정치적 모략을 상징적으로 보여주는 이야기 정도로 보는 것이 좋겠다.
어쨌든 1519년 조광조와 신진사류에 대한 대대적인 숙청이 시작됐다.
바로 ‘기묘사화’다.
조광조·김정·김식·김구 등이 체포됐다. 중종은 이들이 붕당을 만들고 자기 사람만 등용하며 자신들과 의견이 다른 사람들을 배척해 조정을 어지럽혔다고 죄목을 밝혔다.
조광조가 처음부터 죽은 것은 아니다. 처음 조율된 형벌대로라면 사형에 해당했지만 대신들이 형벌이 너무 무겁다며 만류했다.
중종도 한 번은 받아들였다.
조광조 등 사형을 감해주고 먼 곳으로 유배하도록 했다. 조광조는 전라도 능주, 지금의 화순으로 유배됐다.
여기서 끝났다면 조광조는 살아남았을지도 모른다.
그러나 중종은 다시 마음을 바꿨다.
불과 한 달 남짓 뒤 조광조에게 사약을 내렸다.
1519년 음력 12월이었다.
조광조는 서른일곱의 나이로 죽었다.
이 대목이 중요하다.
기묘사화를 단순히 훈구세력 음모만으로 설명하기 어려운 이유다. 중종은 조광조에게 속아서 어쩔 수 없이 사약을 내린 왕이 아니었다. 한 번 사형을 감해주었다가 다시 직접 사사를 결정했다.
그만큼 중종의 마음속에서 조광조에 대한 신뢰가 철저하게 무너져 있었다.
훗날 중종은 조광조를 너무 빨리 높이 등용해 제어하지 못한 것이 자신 잘못이었다는 취지의 말까지 한다.
처음 조광조를 그렇게 믿고 사랑했던 왕이었다. 그러나 마지막에는 자신이 직접 그 조광조를 죽였다.
나는 기묘사화를 바라보면서 조광조가 참 안타깝다.
조광조는 부패한 정치인이 아니었다. 권력을 이용해 재산을 모은 사람도 아니었다. 청렴했고 공부했고 자신이 옳다고 믿는 세상을 만들려고 했다.
문제는 자신이 옳다고 너무 확신했다는 데 있었다.
옳은 일을 한다고 해서 언제나 옳은 결과가 나오는 것은 아니다.
특히 정치는 혼자 하는 일이 아니다.
왕도 있고 기득권 세력도 있고 다른 생각을 가진 사람도 있다.
때로는 기다려야 하고 때로는 한 걸음 물러서야 한다.
조광조에게는 그것이 부족했다.
후대 사림에서도 기묘사화의 실패를 돌아보며 신진사류가 정치적 경험이 부족한 상태에서 개혁을 너무 급하게 추진했다는 비판이 나왔다.
내가 보기에는 거기에 하나를 더 보태야 한다.
조광조는 중종 마음을 너무 믿었다. 처음 자신을 사랑하고 믿어준 중종이 끝까지 자신을 믿어줄 것이라고 생각했던 것 같다. 죽을 때도 사약을 내렸다는 것을 믿지 못했다고 전해진다.
그러나 중종 역시 왕이었다.
왕에게는 왕의 입장이 있었다.
자기를 왕으로 만들어준 반정공신을 한꺼번에 쳐내는 문제도 부담스러웠고 신하들이 왕보다 더 강한 도덕적 권위를 갖는 것도 불편했을 것이다.
조광조는 그것을 충분히 읽지 못했다.
중종에게 조광조는 처음에는 자신을 반정공신의 그늘에서 벗어나게 해 줄 너무나 멋진 사람이었다. 하지만 시간이 흐르자 하루 종일 자신을 가르치려 하는 부담스러운 스승이 되었다.
그리고 마침내 자신의 왕권까지 위협할지 모르는 정치세력의 우두머리처럼 보이기 시작했다.
신혼 때는 상대방이 하는 모든 행동이 예뻐 보인다. 세월이 지나면 젓가락 놓는 소리까지 미워진다는 말도 있지 않은가.^^
'중종과 조광조가 그랬던 것은 아닐까?'
너무나 사랑했던 만큼 미움도 컸던 것인지 모른다.
물론 기묘사화는 두 사람의 감정만으로 일어난 사건이 아니다.
왕권과 신권의 충돌, 반정공신과 신진사류의 권력투쟁, 공신 특권 문제, 급진적인 개혁에 대한 반발이 한꺼번에 폭발한 정치적 사건이었다.
그러나 그 복잡한 정치 한가운데 서로를 너무 믿었던 중종과 조광조가 있었다.
조광조가 정치에서도 사랑에서도 가끔은 밀고 당기는 기술이 필요하다는 것을 조금만 알았더라면 어땠을까?
'사랑은 고무줄놀이'라는 것을 조광조가 그때 조금만 알았더라면 기묘사화는 적어도 지금과 조금 다른 모습이 되지 않았을까?^^
다음은 유자광 1편이 계속됩니다.
ㅡ 초롱박철홍 ㅡ