초롱초롱 박철홍의 조선사도 흐른다! 51

ㅡ 희대의 간신(?) 유자광 1 ㅡ

초롱초롱 박철홍의 조선사도 흐른다! 51

ㅡ 희대의 간신(?) 유자광 1 ㅡ


조선 3대 간신을 뽑아 보라고 하면 역사학자들에 따라 견해가 조금씩 달라진다. 보통 '임사홍'과 그의 아들 '임숭재', '유자광', '김자점' 등을 꼽지만 사람에 따라 김자점 대신 '한명회'나 다른 인물을 넣기도 하고, 시대를 조선말까지 넓히면 '이완용'을 거론하기도 한다.


그 가운데 유자광은 조선의 대표적인 간신을 이야기할 때 좀처럼 빠지지 않는 인물이다.

그러나 역사 속 인물을 하나의 잣대로만 충신과 간신으로 나누어 설명하기는 쉽지 않다.


구한말 나라를 일본에 넘기는 데 앞장선 이완용 같은 민족반역· 매국 행위야 우리가 분명하게 비판할 수 있다. 그러나 한명회나 유자광처럼 평화시 권력투쟁 속에서 권모술수에 능해 권력 정점에 올랐던 사람들을 단순히 ‘간신’이라는 한마디로만 설명하기에는 그들의 삶이 너무 복잡하다.


나는 역사 속에서 권력을 획득하고 사용하는 사람들을 크게 두 유형으로 나누어 생각해 볼 때가 있다.


첫 번째는 권력을 획득하기 위해 권모술수는 물론이고 때로는 음모와 협박, 무력까지 서슴지 않는 사람들이다.


몇 년 전 크게 흥행했던 영화 ‘서울의 봄’에 나오는 '전두광'과 그 일당들이 이런 유형이다.


이들은 권력을 획득한 뒤에도 정적을 제거하고 자기 권력을 지키기 위해 수단과 방법을 가리지 않는다. 권력이 어떻게 움직이고 사람들이 힘 앞에서 어떻게 줄을 서는지 본능적으로 알고 있다.


역사적으로 보자면 태종 '이방원'이나 '수양대군', '한명회' 같은 인물들에게서 이런 모습을 쉽게 찾아볼 수 있다. '정도전' 역시 왕조를 세우는 격변기에서 권력을 어떻게 장악하고 사용해야 하는지 잘 알고 있었던 현실 정치가였다.


두 번째 부류는 이미 주어진 권력이나 정당한 절차로 획득한 권력을 가지고 나라와 백성을 위해 일하는 데 더 많은 힘을 쏟는 사람들이다. 권모술수를 싫어하고 원칙을 중시하는 사람들이 여기에 가깝다. '세종' 같은 왕이 대표적일 것이다. '영조'와 '정조'도 치열한 정치투쟁을 벌였지만 적어도 왕권을 이용해 국가제도를 정비하고 백성들 삶을 개선하려는 많은 정바카라을 펼쳤다는 점에서는 이쪽 모습도 함께 가지고 있었다.


그러나 이 두 부류가 목숨을 건 권력투쟁을 벌이게 되면 현실에서는 첫 번째 유형이 승리하는 경우가 많다.


권력이라는 것이 충신과 간신을 알아보는 눈을 가진 것도 아니고, 현실 권력은 대개 힘을 가진 쪽으로 움직이기 때문이다.


첫 번째 부류에는 머리가 좋고 재능도 뛰어나며 좋은 학벌과 가문까지 갖춘 사람들이 의외로 많다. 가까운 주변사람들에게는 인간적인 매력을 가지고 사람을 끌어모으는 능력도 뛰어나다. 권모술수에 능하고 한 번 찾아온 기회를 좀처럼 놓치지 않는다.

문제는 그런 뛰어난 능력을 나라와 백성보다는 자기 권력과 안위, 가문 번영을 위해 사용하는 경우가 많다는 것이다.


요즈음 현실을 보아도 욕을 많이 먹는 정치인이나 슬롯 지도층 가운데 서울법대나 이른바 SKY라고 불리는 명문대 출신들이 적지 않다. 물론 명문대 출신이라고 모두 그렇다는 이야기는 아니다. 오히려 우리 슬롯를 위해 훌륭한 일을 하는 사람들이 훨씬 많다. 내가 말하고 싶은 것은 결국 머리가 좋고 많이 배웠다는 것과 그 능력을 어디에 사용하느냐는 전혀 다른 문제라는 것이다.


반대로 너무 맑고 원칙적인 사람들은 권모술수를 비열한 행위라고 생각해 아예 가까이하려 하지 않는다. 평화로운 시대에는 훌륭한 관리가 될 수 있지만 목숨을 건 권력투쟁이 벌어지는 격변기에는 오히려 먼저 희생되기도 한다.


우리 역사를 보면 그런 경우가 적지 않다.


물론 권모술수에 능한 사람이 모두 간신인 것도 아니고 원칙만 내세우는 사람이 모두 충신인 것도 아니다. 권력을 치열하게 획득한 뒤 훌륭한 정치를 펼친 사람도 있었고, 깨끗하고 원칙적이지만 독선과 아집에 빠져 나라를 어렵게 만든 사람도 있었다. 예를 들자면 전자는 태조 '이방원'을, 후자는 '송시열'을 들 수 있다.


그래서 간신과 충신이라는 말은 생각보다 간단하지 않다. 더구나 간신이라고 불리는 인물 전 생애를 살펴보면 태어날 때부터 죽을 때까지 한결같은 간신 모습으로 살아간 사람은 거의 없다.


'유자광'이 그 대표적인 인물이다.

유자광은 조선 3대 간신에서 빠지지 않는 ‘희대의 간신’으로 불리지만 일부 야사와 남원지역 전승에서는 전혀 다른 모습으로 나타난다. 심지어 ‘민중의 영웅’에 가깝게 그려지는 경우도 있다.


내가 얼마 전 <조선의 아이돌>이라는 역사소설을 끝내고 나서 온라인카지노에 공개했고, 온라인카지노 소설 올해 공모전에도 출품해놓고 있다. 그 소설의 주인공이 '남이', '유자광', '귀성군 이준' 등이다.


내가 소설 주인공 가운데 한 사람으로 선택했을 만큼 유자광 생애는 대단히 드라마틱하다.

다만 <조선의 아이돌>에서 주로 그린 유자광은 아직 스무 살을 갓 넘긴 젊은 시절 유자광이고, 남이 고변 사건으로 소설은 마무리된다.


이제 소설이 아닌 실제 역사 기록 속 유자광의 행적을 따라가 보자.


유자광은 1439년 전라도 남원에서 태어났다. 그는 '서얼', 그중에서도 당시 슬롯에서 더욱 낮게 취급받았던 '얼자' 출신이었다.


조선은 태종 때부터 서얼이 관직에 진출하는 것을 제한하는 제도를 만들기 시작했고 이후 그 차별은 점점 제도화되었다. 흔히 ‘서얼금고법’이라고 부르는 제도다.


조선슬롯에서는 아버지가 아무리 높은 벼슬을 한 양반이라도 정실부인 자식이 아니면 '적자'가 될 수 없었다. 양인 출신 첩에게서 태어난 자식을 보통 '서자'라 하고, 천민 신분의 첩에게서 태어난 자식을 '얼자'라고 구분했으며 이를 합쳐 '서얼'이라고 했다.


서얼은 아버지가 정승이라 해도 관직 진출에 엄청난 제약을 받았다. 특히 문과와 생원·진사시 같은 과거에 응시하는 길이 원칙적으로 막혀 있었고, 높은 관직에 올라가는 것도 어려웠다. 특별히 왕에게 허통을 받는 등의 예외가 아니면 이 벽을 뛰어넘기 힘들었다.


나는 이 '서얼차별제도'를 조선 사대부들이 만든 가장 쩨쩨하고 이기적인 제도 가운데 하나라고 생각한다. 여자는 첩으로 많이 취하면서 그 여자에게서 태어난 자기 자식에게는 제대로 된 기회를 주지 않았다. 결국 한정된 관직과 권력을 정실부인 자식들 에게만 물려주고 싶었던 욕망이 이 제도 속에 숨어 있었다.


이런 시대에 얼자로 태어난 유자광은 자신 신분이 가진 한계를 누구보다 잘 알고 있었다.


조선시대 서얼이 살아갈 수 있는 길은 많지 않았다. 허균 소설 <홍길동전>처럼 제도 밖으로 튀어나가 세상에 반항하거나, 현실에 순응하며 아버지 집안 도움을 받아 그럭저럭 살아가는 길이 대부분이었다.


물론 이것은 조금 과장해서 하는 이야기다. 실제 서얼들도 여러 직업과 삶을 살아갔다. 그러나 자기 능력으로 중앙정계 최고위층까지 올라가겠다는 야심을 품었다면 이야기는 전혀 달랐다.


유자광은 현실을 받아들이면서도 자신 신분적 한계를 뛰어넘겠다는 생각을 버리지 않았다.


그에게 필요한 것은 보통 사람에게는 없는 특별한 공이었다. 전쟁에서 큰 공을 세우거나 역모를 고변해 왕을 구하거나, 아예 왕조나 정권이 뒤집어지는 순간에 새로운 권력의 편에 서는 길이었다.


그런 유자광에게 절호의 기회가 찾아왔다. 1467년 '이시애의 난'이 일어난 것이다.


당시 유자광은 아직 이름 없는 하급관리였다. 그런데 그는 세조에게 직접 글을 올려 이시애의 난을 진압하는 전쟁에 나가겠다고 자원했다.


대단한 배짱이었다. 세조는 이 이름 없는 젊은 얼자를 직접 불러보았다. 기록을 보면 유자광은 무예에도 상당한 재능이 있었고 몸놀림도 매우 날쌨다. 세조는 그런 유자광 모습에 반했고, 갑옷까지 내려 전장에 나가게 했다.


유자광은 이시애의 난에 종군하여 공을 세웠다. 다만 여기서 한 가지 정확히 할 필요가 있다.


남이는 이시애의 난을 평정한 공으로 적개공신 1등에 바카라록 되었지만 유자광은 적개공신 명단에 들지는 못했다. 그렇다고 유자광이 얻은 것이 작았던 것은 아니다.


세조는 유자광의 공을 인정해 그의 서얼신분에 따른 관직 제한을 특별히 풀어주는 ‘허통’을 허락했고 '병조정랑'에까지 파격적으로 올려주었다.


이것만으로도 유자광 인생은 완전히 바뀌었다.


더 놀라운 일은 그다음이다.

유자광은 무예만 뛰어난 사람이 아니었다. 1468년 세조가 온양에 행차했을 때 열린 온양별시 문과에서 유자광은 장원을 차지했다. 원래 문과에 응시하기조차 어려웠던 서얼 출신이 왕의 특별한 허통을 받고 과거에 나가 장원까지 한 것이다.


여기에도 '조선왕조실록'에 전하는 흥미로운 일화가 있다. 처음 시험 합격자가 발표됐을 때 유자광 이름은 명단에 없었다. 그러자 세조는 당시 시험관이었던 신숙주에게 답안지를 가져오게 했다. 유자광 답안지를 직접 살펴본 세조는 “이 답안이 어찌 떨어질 수 있느냐”며 신숙주를 질바카라했고, 결국 유자광을 직접 장원으로 뽑았다. 세조가 유자광 능력을 얼마나 높이 평가하고 총애했는지를 보여주는 일화다


또한 유자광이 단순히 몸 빠르고 싸움 잘하는 무사가 아니라 학문과 글에도 상당한 능력을 가진 인물이었다는 사실은 이것 하나만으로도 충분히 알 수 있다.


그리고 유자광보다 두 살 어린 또 한 명의 젊은이가 있었다.


남이었다.


남이는 태종 외손계통으로 왕실과 혼맥이 연결된 명문가 출신이었다. 신분만 놓고 본다면 유자광과는 하늘과 땅 차이였다.


남이는 이시애의 난에서 큰 공을 세워 적개공신 1등이 되었고 스물일곱, 여덟의 젊은 나이에 병조판서까지 올라갔다.


같은 전쟁터에서 싸웠지만 두 사람에게 주어진 출발점은 너무 달랐다. 유자광이 그런 남이를 보면서 어떤 생각을 했는지는 기록으로 알 수 없다.


질투했을 수도 있고 부러워했을 수도 있다. 자신도 저 자리에 오르고 싶다고 생각했을 수도 있다.


나는 이 틈을 비집고 들어가 <조선의 아이돌>이라는 소설을 썼다. 실제 사건과 소설적 상상력이 버무려져 있다.


실제 역사를 놓고 보면 두 사람의 운명은 너무도 잔인하게 엇갈린다.


남이는 젊고 혈기왕성했다. 뛰어난 무장이었지만 정치적으로 노련한 사람은 아니었다. 너무 빨리 높은 자리에 올랐고 말과 행동도 거침이 없었다. 그리고 1468년 세조가 죽고 예종이 즉위하면서 상황이 급변했다.


예종은 남이를 경계하고 있었다. 한명회와 신숙주 등 기존의 구공신 세력에게도 젊은 신공신 남이와 귀성군 이준 부상은 달갑지만은 않았을 것이다.


유자광은 바로 그 틈을 파고들었다. 유자광의 타고난 정치적 감각이 처음으로 무섭게 발휘되는 순간이었다.


유자광은 남이가 역모를 꾀하고 있다고 고변했다.


이른바 ‘남이의 옥’이다.


남이를 역모 혐의로 몰아가는 과정에서는 남이가 북방에서 지었다고 전해지는 시도 문제가 되었다. 후대 유명한 설화에는 남이가 쓴 ‘男兒二十未平國 後世誰稱大丈夫’, 즉 ‘사나이 스무 살에 나라를 평정하지 못하면 후세에 누가 대장부라 하겠는가’라는 시에서 ‘未平國’을 유자광이 ‘未得國’, 즉 ‘나라를 얻지 못하면’이라는 뜻으로 바꾸어 역모 증거로 삼았다는 이야기가 전한다. 그러나 이것은 정사로 확정된 사실이라기보다 후대에 만들어진 남이장군 설화에 가깝다. 남이가 처음부터 그렇게 적었다는 이야기도 전하고 여러 설이 있다.


분명한 사실은 유자광 고변이 남이의 죽음에 결정적인 역할을 했다는 것이다.


남이와 강순 등은 처형되었다.


그리고 유자광은 그 공으로 익대공신 1등에 바카라록 되고 무령군에 봉해졌다.


그토록 바라던 공신이 된 것이다.

얼자로 태어난 유자광이 스스로 넘기 힘들었던 신분의 벽을 마침내 뛰어넘었다.


그러나 그 벽을 뛰어넘기 위해 밟고 올라간 사람이 남이었다.

이때부터 유자광의 이름에는 ‘능력’이라는 말과 함께 ‘고변’과 ‘모함’이라는 어두운 그림자가 따라다니기 시작한다.


유자광은 이후에도 승승장구했다.

1477년 '성종' 때 도총관에 임명되었다. 그러나 이듬해 '임사홍'·'박효원' 등과 파당을 만들고 횡포를 부렸다는 대간의 탄핵을 받아 공신적을 삭탈당하고 동래로 유배되는 큰 위기를 겪는다.


보통 사람이라면 여기서 정치생명이 끝났을 것이다.

하지만 유자광은 다시 살아났다.


그것이 유자광이었다.


성종 후반에 접어들면서 '김종직'을 중심으로 한 신진사림 세력이 중앙정계에 진출하기 시작했다. 이들은 기존 훈구대신들 권력과 비리를 비판했다.


성종이 죽고 연산군이 즉위하면서 갈등은 더욱 심해졌다. 그리고 유자광은 또 하나의 글을 발견한다.


김종직의 ‘조의제문’이었다.

김종직은 중국 초나라 의제의 죽음을 애도하는 형식을 빌려 글을 썼는데 유자광은 그 글 속에 세조가 단종을 몰아내고 왕위를 차지한 일을 비판하는 뜻이 숨어 있다고 해석했다.


유자광은 연산군에게 그것을 설명했다. 그 결과 1498년 '무오사화'가 일어났다.


죽은 김종직 무덤까지 파헤쳐 시신 목을 베는 '부관참시'가 행해졌고 '김일손'을 비롯한 많은 사림이 죽거나 유배되었다.

유자광은 무오사화를 계기로 다시 권력 중심으로 돌아왔다. 종1품 숭록대부에까지 올랐다.


무오사화는 연산군 편에서 자세하게 다루었다.


그 뒤 1504년 '갑자사화'가 일어났을 때는 유자광 자신도 정치적 부침을 겪는다. 연산군 초기에는 총애를 받았지만 연산군 폭정이 심해지면서 유자광 역시 계속 안정된 권력 속에 있었던 것은 아니다.


그러던 1506년 연산군을 몰아내는 '중종반정'이 일어났다.


'성희안'·'박원종' '유순정' 등이 반정을 일으켰고 유자광은 성희안 등과 인연을 통해 또다시 그 흐름에 합류했다.


반정은 성공했다.

이번에도 유자광은 살아남았다.

그것도 살아남은 정도가 아니었다. 정국공신 1등이 되고 무령부원군에 봉해졌다.


유자광 정치적 생존능력은 정말 놀라울 정도다.


전쟁에 직접 자원하여 공을 세웠고, 남이의 역모를 고변해 공신이 되었으며, 사화의 중심에 섰다가 이번에는 왕을 끌어내리는 반정에 참여해 다시 1등 공신이 되었다.


조선사를 통틀어 이렇게 서로 다른 정치적 격변을 여러 차례 통과하며 반복해서 권력 중심으로 돌아온 인물도 흔하지 않다.


유자광 고변과 정치적 행동으로 죽거나 화를 입은 사대부들도 적지 않았다. 그러니 당시 사대부들이 유자광을 얼마나 싫어했겠는가?


유자광은 그들에게 눈엣가시를 넘어 '공공의 적'과도 같은 존재였다.


그런데 흥미로운 것은 유자광이 세조·예종·성종·연산군·중종이라는 다섯 임금의 시대를 모두 살아남았다는 사실이다.


물론 다섯 왕 모두가 한결같이 유자광을 끔찍하게 아꼈다는 뜻은 아니다. 유배도 당했고 관직과 공신 지위를 빼앗긴 적도 있으며 연산군 때에도 정치적 부침을 겪었다. 그럼에도 유자광은 몰락할 때마다 다시 돌아왔다.


세조에게 발탁되고 예종 때 공신이 되었으며 성종 때 다시 등용되었고 연산군 때 무오사화를 통해 권력 중심으로 돌아왔으며 중종반정 뒤에는 또다시 1등 공신이 되었다.


행위의 옳고 그름을 떠나 이런 정치적 생존 감각만큼은 대단하다고 하지 않을 수 없다.


유자광은 서얼이라는 조선시대 엄청난 신분적 한계를 자기 능력과 정치적 감각으로 뛰어넘었다.


그러나 그 과정에서 권력에 붙어 피비린내 나는 옥사와 사화의 중심에 섰고 결국 오늘날까지 조선의 대표적인 간신으로 기억되고 있다.


그렇다고 유자광을 단순히 ‘태어날 때부터 간신이었던 사람’으로만 바라보는 것도 무리가 있다.


그는 분명 조선 사대부들이 만든 신분제도의 피해자이기도 했다.


유자광에 관한 실록 기록을 보면 대부분 그를 좋지 않게 평가한다.

그런데 그 비난의 문장들을 자세히 들여다보면 뜻밖의 유자광 모습도 보인다.


1503년 연산군 때 일이다.


유자광은 당시 궁중 음식을 맡은 '사옹원의 제조'였다.


당시 궁궐에서는 관리들에게 식사를 제공했는데 당상관과 당하관들이 밥을 높이 담지 않는다며 밥을 만드는 반공들을 심하게 닦달했다. 밥이 먹는 것에 거의 전부였던 시절에 중요한 문제였다.


결국 밥 짓는 사람들이 이를 견디지 못하고 도망가는 일까지 생겼다.


유자광은 밥그릇 두 개를 직접 준비해 하나에는 밥을 높이 담고 다른 하나에는 평평하게 담아 왕에게 보여주면서 문제를 제기했다. 주어진 쌀이 부족한데 자기들 밥그릇만 챙기려는 관료들에게 경고였다.


‘밥을 만드는 사람들이 감당하지 못해 거의 도망해 흩어지고 있습니다. 궁궐 안에 이런 원통한 일이 있으니 말씀드립니다.’


연산군은 기존의 식사 규정 자체를 바꾸지는 않았지만 밥을 만드는 사람들을 함부로 괴롭히지 못하도록 규정을 만들라고 명했다.


그러자 유자광은 기뻐하며 말했다.


‘이제부터는 정승이라도 전교대로 해야 한다.’


그런데 이 일을 기록한 사관의 평가는 기막힐 정도로 유자광에게 적대적이다.


유자광이 밥 만드는 사람들 억울함을 빙자해 평소 사대부에 대한 자기 분을 풀려고 했다는 식으로 기록했다.


같은 사건을 전혀 다르게 볼 수 있는 장면이다.


유자광이 정말 천한 신분의 사람들을 불쌍히 여겨 그런 건의를 했는지 아니면 사관의 말처럼 자기를 무시해 온 사대부들에게 앙갚음하려고 그랬는지는 알 수 없다. 상식적으로 생각해 볼 때 이런 짓으로 사대부들에게 앙갚음하려 하지 않았을 것이다. 그러나 공정하게 적어야 할 사관은 유자광을 비난한 것이다.


하지만 한 가지 사실만큼은 분명하다. 궁궐에서 밥을 만드는 낮은 신분 사람들이 높은 관리들에게 시달리다 도망가는 것을 보고 그 문제를 직접 왕에게 제기한 사람이 유자광이었다.


나는 이 대목이 상당히 흥미롭다.


더 재미있는 것은 사관이 이 행동을 칭찬하지 않고 오히려 유자광의 간악함을 보여주는 사례처럼 기록했다는 사실이다.

역사는 기록하는 사람 시각에서 완전히 자유로울 수 없다는 증명이기도 하다.


유자광은 언문, 즉 한글 사용에 대해서도 비교적 적극적인 태도를 보였다는 이야기들이 전한다. 일부 기록과 야사에서는 그가 당시 사대부들이 천하게 여기던 언문을 실용적으로 사용하려 했고 그 때문에 비난을 받았다는 이야기도 나온다.


이 부분은 유자광 2편에서 조금 더 자세히 다루겠다.


남원지역에서 전해오는 유자광 이야기는 더욱 흥미롭다. 이 또한 2편에서 자세히 다루겠다.


유몽인이 쓴 <어우야담>에서도 유자광은 실록 속 모습과 조금 다르다.


<신분적 한계를 가지고 태어났지만 타고난 능력을 갈고닦아 결국 자기 꿈을 펼친 비범한 인간의 모습이 함께 그려진다.>


또한 유자광이 단순히 고변과 정치공작만 잘했던 사람도 아니다.


그는 성종 때 장악원 제조를 지냈고 성현 등과 함께 '악학궤범' 편찬에도 참여했다. 당시 유자광을 싫어하던 사대부들조차 그의 재주와 지식 자체를 완전히 부정하지는 못했다.


이처럼 유자광은 무예도 뛰어나고 글도 잘하고 과거에서는 장원까지 했으며 음악과 제도에도 상당한 식견이 있었던 사람이다.


한마디로 머리도 비상하고, 몸도 잘 쓰는 타고난 천재형 인간임이 분명하다.


야사에서는 유자광과 홍길동을 연결하는 이야기도 전한다.


실존 홍길동은 유자광이 조정에서 활약하던 연산군 시대에 실제로 존재했던 큰 도적이다. '조선왕조실록'에도 홍길동과 그 무리에 관한 기록이 나온다.


훗날 '허균'은 '홍길동전'을 썼고 소설 속 홍길동은 서얼로 태어나 ‘아버지를 아버지라 부르지 못하고 형을 형이라 부르지 못하는’ 신분차별 상징적인 인물이 되었다.


다만 실존 홍길동이 실제로 서얼이었다고 단정할 역사적 근거는 없다. 실존 홍길동과 허균 소설 속 홍길동도 그대로 같은 인물이라고 할 수 없다.


그래도 두 사람을 비교해 보면 재미있는 생각이 든다.


유자광은 신분질서 안으로 들어가 그 벽을 뛰어넘으려 했다.


홍길동은 적어도 후대 소설과 전설 속에서는 그 질서 밖으로 뛰쳐나가 세상에 맞섰다.


한 사람은 제도 안으로 들어가 권력자가 되었고, 다른 한 사람은 제도 밖에서 도적이 되었다.


또 다른 내 소설 <홍길동을 찾아서> 주인공 '전우치'가 소설 속 유자광과 홍길동 사이에서 고민하기도 한다.


그런데 후세 평가는 완전히 뒤집혔다.


도적이었던 홍길동은 허균의 소설을 통해 백성을 돕는 의적이 되어 오늘날까지 사랑받는 인물이 되었고, 공신에 오르고 부원군까지 되었던 유자광은 조선 역사상 둘도 없는 간신 가운데 하나로 남았다.


참으로 역사의 아이러니다.


그렇다고 나는 유자광을 억울하게 누명을 쓴 착한 사람이라고 말하려는 것은 아니다.


유자광은 남이의 죽음에 결정적인 역할을 했다. 무오사화에서도 김종직 조의제문을 문제 삼아 사림을 제거하는 데 적극적으로 나섰다. 자기 권력을 지키기 위해 다른 사람을 공격하고 고변한 일도 여러 차례였다.


신분차별의 피해자였다는 사실이 그런 행동까지 정당화해 주는 것은 아니다.


그러나 반대도 마찬가지다.


유자광이 비열한 정치행위를 했다고 해서 조선 서얼차별이 정당해지는 것도 아니다.

피해자였던 사람이 반드시 선한 사람이 되는 것도 아니고, 피해자가 훗날 권력을 잡아 다른 사람을 해치는 가해자가 되는 일도 역사에는 얼마든지 있다.


나는 바로 이 점 때문에 유자광이라는 인물이 재미있다.


유자광은 피해자이면서 가해자였다.


조선 신분제도 희생자이면서

그 제도 안에서 살아남기 위해 누구보다 권력을 탐했던 사람이었다.


뛰어난 재능을 가진 사람이었지만 그 뛰어난 재능을 때로는 사람을 살리는 데 사용했고, 때로는 다른 사람을 제거하는 데 사용했다.


그리고 결국 살아남았다.


여러 번 죽을 위기에 처하고 정치적으로 몰락했지만 다시 살아났다.


그러나 유자광 마지막은 비참했다. 중종 때 쫓겨나가 귀양지에서 눈이 먼 채 초라하게 죽었다.


하지만 얼자로 태어난 한 사람이 세조·예종·성종·연산군·중종이라는 다섯 임금의 시대를 거치며 부원군까지 올라갔다.


이 하나만 놓고 보아도 보통 인물은 아니다.


조선의 역사 기록은 대부분 사대부들이 남긴 기록이다.


물론 그렇다고 '조선왕조실록'이 거짓 기록이라는 뜻은 아니다. 실록만큼 치밀하게 당시 정치와 슬롯를 기록해 놓은 역사자료도 세계적으로 드물다. 그러나 기록을 남긴 사람들에게도 자신들이 살아온 시대의 가치관과 신분의식이 있었다. 그들 눈에 얼자출신으로 자신들과 같은 조정에 들어와 오히려 자기들을 공격하고 공신과 부원군 자리까지 올라간 유자광이 곱게 보였을 리 없다.


따라서 실록 속 유자광의 행적은 받아들이되 사관들이 붙여놓은 인물평까지 모두 절대적인 진실이라고 생각할 필요는 없다고 나는 본다.


반대로 남원지역에 전해오는 유자광 영웅설이나 야사도 그대로 역사적 사실이라고 믿어서는 안 된다.


정사와 야사 사이에 서서 한 인간 삶을 다시 바라볼 필요가 있다.


유자광은 뛰어난 머리와 재능을 가진 사람임에는 틀림없다.


'그러나 문제는 그 뛰어난 머리와 재능을 어디에 사용했느냐는 것이다.'


요즘도 마찬가지다.


우리나라에는 뛰어난 머리와 능력을 가진 사람이 정말 많다.

그러나 뛰어난 머리를 가졌다고 반드시 좋은 사람이 되는 것도 아니고 높은 학력을 가졌다고 나라를 위해 좋은 일을 하는 것도 아니다.


그 능력을 자기 욕심과 권력을 위해 사용하면 오히려 평범한 사람보다 훨씬 더 큰 해악을 끼칠 수도 있다.


유자광 역시 그랬다.


그러나 유자광 개인의 성격과 욕망만 가지고 그의 모든 행동을 설명할 수도 없다.


그가 태어났던 조선이라는 슬롯가 그에게 처음부터 넘기 힘든 신분의 벽을 세워놓았기 때문이다.


만약 유자광이 정실부인 아들로 태어나 아무런 제약 없이 과거시험을 보고 자기 능력대로 관직에 진출할 수 있었다면 그의 인생은 달라졌을까?


남이를 고변하지 않아도 자기 능력만으로 높은 자리에 올라갈 수 있었다면 그래도 남이를 죽음으로 몰아넣었을까?


알 수 없다.


역사는 ‘만약’을 증명할 수 없기 때문이다.


그래서 나는 유자광을 ‘희대의 간신’이라는 말 하나로 끝내고 싶지 않다.


그렇다고 ‘민중의 영웅’이라고 미화하고 싶은 생각도 없다.


그는 조선이라는 신분슬롯가 만들어낸 가장 비범하면서도 문제적인 인간 가운데 한 사람이었다. 당시로서는 도저히 넘기 힘든 신분의 벽을 자기 능력과 정치적 감각으로 뛰어넘은 사나이 유자광!


그러나 그 벽을 뛰어넘는 과정에서 수많은 사람을 밟았고 결국 희대의 간신이라는 이름을 역사에 남긴 사나이 유자광!


만약 이 글을 읽는 여러분이 유자광처럼 뛰어난 능력을 가지고 태어났지만 태어나는 순간부터 신분 때문에 앞길이 막혀 있었다면 어떻게 살았을까?


현실에 순응했을까?


세상에 반항했을까?


아니면 유자광처럼 수단과 방법을 가리지 않고 그 벽을 뛰어넘으려 했을까?


내 소설 <홍길동을 찾아서>에서 전우치가 했던 고민이었다.


나는 유자광을 볼 때마다 그 질문을 던져보게 된다.


이어서 ‘민중의 영웅 유자광 2’가 이어집니다.


ㅡ 초롱박철홍 ㅡ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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