초롱초롱 박철홍의 조선사도 흐른다! 49

연산군과 갑자사화 ㅡ폐비 윤씨 죽음, 연산군의 복수가 시작되다.

초롱초롱 박철홍의 조선사도 흐른다! 49

ㅡ 연산군과 갑자사화 ㅡ

(폐비 윤씨 죽음, 연산군의 복수가 시작되다.)


'금삼의 피!'


'박종화'가 지은 장편 역사소설이다. 1936년부터 신문에 연재된 이 소설은 '연산군'을 소재로 그의 생모 '폐비 윤씨'의 죽음과 '갑자사화'를 극적으로 그려냈다.


박종화는 이 작품에서 연산군의 상식을 초월한 횡포와 광기가 비명에 죽은 어머니의 비참한 최후를 알게 된 데서 비롯된 것으로 묘사했다.


정사에서 연산군은 조선 최악의 폭군 가운데 한 사람으로 기록되어 있지만 이 작품에서는 어머니의 사랑을 모르고 자란 한 인간의 고독과 원한에 주목했다.

그리고 이러한 연산군 이미지는 이후 수많은 영화와 드라마에도 적지 않은 영향을 끼쳤다.


그렇다면 제목에 나오는 '금삼'은 무엇일까?


금삼(錦衫)은 말 그대로 비단옷이다. 소설에서는 폐비 윤씨가 사약을 받고 죽으면서 피를 토하고 그 피가 묻은 옷이 훗날 연산군에게 전해진다고 썼다.


어머니의 피 묻은 옷을 본 연산군은 엄청난 충격에 빠진다.

그리고 마침내 어머니를 죽음으로 몰아넣었던 사람들에게 피의 복수를 시작한다.


바로 갑자사화다.


참으로 소설내용은 극적이다.

그래서 오랫동안 많은 사람이

이 이야기를 실제 역사처럼 받아들였다.


그런데 정말 그랬을까?


결론부터 말하면 그렇지 않다.


<연산군일기>를 보면 연산군은 왕위에 오른 지 불과 몇 달밖에 지나지 않은 1495년 3월 16일 아버지 '성종' 묘지문을 읽다가 자신의 생모 윤씨가 왕비 자리에서 폐위된 뒤 죽었다는 사실을 알게 된다.


신하들에게 윤씨와 아버지에 대해 물었고 그 과정에서 비로소 자신 생모가 폐위되어 죽었다는 사실을 알았다.


실록에는 연산군이 이 사실을 알고 수라를 들지 않았다고까지 기록되어 있다.


갑자사화가 일어난 것은 그로부터 무려 9년 뒤인 1504년이다.

그러니 갑자사화 직전 피 묻은 옷을 보고 그때 처음 어머니 죽음을 알았다는 이야기는 역사적 사실이라기보다 소설적 상상력에 가깝다.


성종이 죽기 전에 폐비 윤씨 이야기를 절대로 하지 못하게 했다는 이야기도 조금 다르게 볼 필요가 있다.


성종은 폐비 윤씨 묘와 제사에 관한 처우를 정하면서 자신이 죽은 뒤에도 함부로 바꾸지 말라는 뜻을 남겼다.


기록에는 '백 년 지후'(百年之後)라는 표현이 나오는데 이를 문자 그대로 '100년 뒤'라고 해석해서는 안 된다. 당시 한문에서 백 년 지후는 흔히 '내가 죽은 뒤'라는 뜻으로 사용되었다.


따라서 성종이 "폐비 윤씨 사건을 100년 동안 발설하지 말라"라고 명령했다기보다는 자신이 정해놓은 윤씨 묘와 제사방식을 자신이 죽은 뒤에도 함부로 바꾸지 말라는 뜻에 가까웠다.


그렇다고 연산군이 즉위하자마자 곧바로 어머니를 왕비로 복위시킬 수 있었던 것도 아니었다.


연산군은 생모를 추숭 하고 싶어 했다. 하지만 성종이 직접 폐비시키고 사사한 여인을 다시 왕비로 올린다는 것은 곧 아버지 성종의 결정을 뒤집는 일이었다.


유교국가 조선에서 아들이 아버지의 결정을 뒤집는 것은 간단한 일이 아니었다.


신하들도 쉽게 받아들일 수 없었다.


즉 연산군에게 폐비 윤씨 문제는 단순히 어머니에 대한 그리움만의 문제가 아니었다. 아버지와 어머니, 왕실 명분과 아들 감정, 왕권과 신권이 복잡하게 얽혀 있었다.


1498년 연산군 4년에는 '무오사화'가 일어났다. 김일손이 사초에 김종직 '조의제문'을 실은 것이 발단이었다. 훈구세력은 이를 이용해 김종직 계열 사림을 공격했고 연산군 역시 이를 적극적으로 이용했다. 무오사화로 사림과 삼사의 언론 기능은 크게 위축되었다. 그러나 훈구대신과 공신세력까지 제거된 것은 아니었다.


오히려 상당수 훈구세력은 여전히 조정의 핵심을 차지하고 있었다.


여기서 연산군을 처음부터 아무것도 하지 않고 향락에만 빠져 있던 왕으로 생각해서도 곤란하다. 연산군에게 치적이라고 부를 만한 것이 전혀 없었던 것은 아니다.


특히 즉위 초기에는 아버지 성종이 남겨놓은 안정된 통치체제를 이어받아 비교적 정상적으로 국정을 운영했다.

경연에도 참석했고 대신들 의견과 간언도 들었다.


즉위 첫해 영의정 '이극배'가 왕에게 수신·납 간·구현·절용·애민, 즉 몸을 닦고 간언을 받아들이며 인재를 구하고 비용을 아끼며 백성을 사랑해야 한다는 다섯 가지 원칙을 올리자 연산군은 이를 베껴 들이도록 했다.


국방과 외교, 지방행정도 기존 국가체제 안에서 이어졌다.

처음부터 나라를 다스릴 능력이 전혀 없는 왕은 아니었던 것이다.


어쩌면 그래서 연산군 몰락은 더욱 안타깝다.


좋은 정치를 할 수 있는 국가체제도 있었고 강한 왕권도 있었다.


'문제는 그 힘을 어디에 사용했느냐였다.'


시간이 갈수록 연산군은 자신에게 간섭하는 대신과 언관들을 더욱 싫어하기 시작했다.


무오사화 이후 왕권은 강해졌고 왕의 향락과 사치도 점점 심해졌다.


왕을 견제하려는 조정 대신, 삼사 관원들과 그리고 연산군을 중심으로 권력을 키우려는 임사홍·신수근 등 측근세력이 충돌했다.


그리고 마침내 1504년 사건이 폭발한다.


갑자사화다.


연산군은 이미 9년 전 자신의 생모가 폐위되어 죽었다는 사실을 알고 있었다. 그러나 시간이 지나면서 당시 폐비 윤씨의 폐출과 사사 과정에 누가 관여했고 어떤 일이 있었는지를 더욱 구체적으로 알게 되었다.


그 과정에서 생모에 대한 오래된 원한이 폭발했다.


그러므로 갑자사화를 단순히

'어머니의 죽음을 처음 알고 미쳐버린 아들의 복수극'

이라고만 설명해서는 안 된다.


생모에 대한 원한과 추숭 문제, 강해진 왕권, 대신과 삼사에 대한 적개심, 공신세력에 대한 견제, 측근세력의 정치적 계산, 그리고 향락과 사치로 커져가던 궁중 재정문제까지 복잡하게 뒤엉킨 대규모 정치숙청이었다.


사화라고 하면 흔히 사림들이 화를 입은 사건이라고 생각하기 쉽다. 무오사화가 사림을 공격한 사건이었다면 갑자사화는 달랐다

이제 연산군은 자신에게 걸림돌이 되는 세력이라면 훈구와 사림을 가리지 않았다.


그 과정은 처참했다.


연산군은 생모 윤씨의 폐위와 죽음에 관련되었다고 여긴 성종의 후궁 엄씨와 정씨를 궁중에서 잔혹하게 죽였다. 심지어 정씨의 아들 안양군과 봉안군을 불러 자신의 어머니를 치도록 시켰다는 기록까지 실록에 나온다. 이후 두 왕자 역시 귀양을 갔다가 죽음을 피하지 못했다.


여기까지는 단순히 영화나 드라마에서 만들어낸 이야기가 아니다. 큰 줄기는 실제 기록에 남아 있다.


다만 연산군이 친할머니인 '소혜왕후', 즉 인수대비에게 달려들어 가슴을 머리로 들이받았다는 식의 구체적인 장면은 조심해서 볼 필요가 있다.

소혜왕후와 연산군의 관계가 좋지 않았던 것은 사실이고 소혜왕후가 갑자사화가 일어난 1504년에 세상을 떠난 것도 사실이다.

하지만 궁중 안에서 정확히 어떤 일이 벌어졌는지 후대에 전해지는 이야기 하나하나를 모두 사실로 단정하기는 어렵다.


500년도 더 지난 궁궐 안의 일이다. 기록과 소문을 구별해서 볼 필요가 있다.


연산군은 이어 생모 윤씨를 왕비로 추숭 하려 했다.


이에 반대한 사람들도 화를 피하지 못했다. 윤씨의 폐위와 사사에 찬성했거나 관련이 있다고 지목된 윤필상·이극균·성준· 이세좌·권주·김굉필·이주 등이 죽임을 당했다.


이미 세상을 떠난 사람도 피할 수 없었다.


한치형·한명회·정창손·어세겸·심회·이파·정여창·남효온 등은 무덤을 파헤쳐 시신을 베는 부관참시를 당했다.


죽은 사람까지 다시 죽인 셈이다.


연구에 따르면 갑자사화로 화를 입은 사람은 모두 239명에 이르며 그 가운데 122명이 사형당했다.


절반이 넘는다.


당시 조정의 규모를 생각하면 엄청난 숫자다. 영의정과 좌의정을 지낸 사람, 당대 최고의 학자와 언관들이 줄줄이 죽었다.


생각해 보면 참 무서운 일이다.

조선시대 고위관료로 산다는 것도 결코 쉬운 일은 아니었다.


갑자사화 이후 연산군을 견제할 세력은 거의 무너졌다. 이때부터 연산군의 폭정은 더욱 노골적으로 변한다.


경연을 멀리하고 사간원을 비롯한 언론 기능을 축소하거나 없애버렸다.


성균관마저 정상적인 교육공간으로 기능하기 어렵게 만들었고 궁중에서는 연회와 유흥이 더욱 늘어났다.


전국에는 '채홍사'와 '채청사'를 보내 미녀와 기녀를 뽑아 올리게 했다. 여러 고을에서 뽑아 올린 기녀를 '운평'이라 하고 그 가운데 뛰어난 사람을 다시 '흥청'으로 선발했다.


오늘날 우리가 돈을 마구 쓰며 즐기는 것을 두고 사용하는 '흥청망청'이라는 말도 흔히 이 시대의 흥청에서 비롯된 것으로 설명된다.


연산군이 흥청들과 어울려 흥청거리다 나라를 망쳤다는 의미가 훗날 덧붙었다는 것이다.


'망청' 자체에 특별한 한자 뜻이 있었던 것은 아니며 흥청과 운율을 맞추어 만들어진 표현으로 보는 설명도 있다.


어찌 됐든 흥청망청이라는 말에서 연산군의 시대를 떠올리는 사람이 많은 것은 사실이다.


영화 '간신' 역시 이러한 연산군 시대의 채홍과 궁중 향락을 주요 소재로 삼았다.


영화 '왕의 남자'에서도 연산군의 폭력성과 불안한 내면이 극적으로 표현된다.


그러나 영화는 영화다.


특히 영화에서 표현되는 연산군의 동성애 같은 부분을 확실하게 뒷받침하는 역사기록은 찾기 어렵다.


역사와 영화는 구분해서 볼 필요가 있다.


연산군은 사냥에도 집착했다.


도성 주변의 민가를 철거하고 백성들의 출입을 제한하는 금표 지역을 계속 넓혀갔다. 실제로 1504년에는 녹양역에서 광릉산· 광진·한강·왕십리 일대까지 넓은 지역을 금표 안에 포함시키고 이태원 쪽 길만 통하게 하라는 명령까지 내렸다.


왕 한 사람의 사냥과 유흥을 위해 백성들의 삶의 터전과 통행까지 제한한 것이다.


백성들 불만이 커질 수밖에 없었다.


결국 연산군을 비난하는 한글 익명서까지 나타났다.


연산군은 크게 분노했다.


한글을 가르치거나 배우는 것을 금지하고 한글 사용을 억압하는 조치까지 내렸다. 그러나 이를 연산군 재위기간 내내 계속된 완전한 한글 말살정바카라이라고 단정하는 것도 지나치다.

중요한 것은 백성이 글로 자신을 비판하자 그 글의 사용 자체까지 막으려 했다는 점이다.


한글을 만든 세종의 증손자가 백성들이 한글로 자신을 비판한다는 이유로 한글 사용까지 억압하려 했다는 사실은 참으로 역설적이다.


연산군의 정치가 얼마나 폐쇄적으로 변해갔는지를 상징적으로 보여준다.


연산군의 여성편력과 관련해서도 수많은 이야기가 전한다.


그 가운데 가장 충격적인 것이 '월산대군 부인 박씨' 이야기다.


월산대군은 성종 친형이었으므로 박씨는 연산군에게 큰어머니가 된다.


<중종실록>에 실린 '박원종' 졸기에는 폐주, 즉 연산군이 박원종의 맏누이인 월산대군 부인과 관계를 맺어 궁중에 머물게 했다는 취지의 기록이 나온다.


<연산군일기>에도 박씨가 왕의 총애를 받아 임신했고 약을 먹고 죽었다는 소문이 있었다는 기록이 남아 있다.


하지만 여기서 중요한 것은 기록 자체에도 '사람들이 그렇게 말했다'는 형식으로 전해진다는 점이다. 그것이 사실로 완전히 확인되었다는 뜻은 아니다.


더구나 박씨는 당시 쉰을 넘긴 나이였다. 임신 가능성이 전혀 없다고 할 수는 없겠지만 매우 낮았을 것이다. 따라서 이 이야기를 확정된 사실처럼 단정해서는 안 된다.


중종반정 이후 연산군의 패악을 강조하는 과정에서 이야기가 확대되었을 가능성도 함께 생각해 볼 필요가 있다.


그렇다고 반정 이후 연산군에 관한 기록을 모두 거짓이라고 해버리는 것도 곤란하다.


흔히 '역사는 승자의 기록'이라고 말하지만 실록 전체를 단순히 승자의 선전물로만 볼 수도 없다.


결국 기록 하나하나를 살펴보고 사실과 소문, 후대의 해석을 구별하는 것이 역사 읽기의 재미일 것이다.


연산군 시대를 이야기할 때 빼놓을 수 없는 여인이 또 있다.


'장녹수'다.


장녹수는 본래 제안대군 집의 가비였다. 대군 집 남자종과 살면서 아들까지 낳았고 노래와 춤을 익혀 이름을 알렸다.

연산군 눈에 들어 궁에 들어간 뒤 엄청난 총애를 받았으며 숙원에서 숙용까지 올라갔다.


실록에는 연산군이 장녹수 말을 거의 모두 따랐고 상과 벌에도 영향을 끼쳤다고 기록되어 있을 정도다.


그러나 권력은 오래가지 않았다.

1506년 '중종반정'이 일어나 연산군이 폐위되자 장녹수 역시 공식적으로 참형을 당했다.


흔히 백성들이 돌과 기왓장을 던져 장녹수를 죽였다고 전해지기도 하지만 장녹수는 반정 이후 국가에 의해 처형되었다.


다만 장녹수와 연산군에 대한 백성들의 원한이 컸다는 이야기들이 이후 덧붙여져 전해진 것으로 보는 것이 타당하다.


갑자사화 이후 연산군의 왕권은 거의 절대권력에 가까워졌다.

자신을 견제할 훈구대신도 약해졌고 삼사의 언관들도 제 역할을 하기 어려워졌다.


만약 연산군이 그 강력한 왕권을 이용해 병든 조선슬롯를 개혁하고 백성들 삶을 나아지게 했다면 역사 평가는 크게 달라졌을지도 모른다.


연산군에게 그런 기회가 전혀 없었던 것도 아니었다.


즉위 초기만 해도 정상적으로 국정을 운영했고 성종이 남겨준 안정된 국가체제도 있었다.

그러나 연산군은 정반대의 길을 갔다.


자신에게 직언하는 신하들을 죽이고 언론을 막았다.


향락과 사치에 빠졌으며 백성들의 삶의 터전을 자신의 사냥터와 유흥공간으로 만들었다.


두 차례의 사화로 수많은 신하와 선비들이 목숨을 잃었다.


특히 갑자사화는 단순히 어머니의 원수를 갚기 위한 복수극을 넘어 조선의 정치질서를 뒤흔든 대규모 정치숙청이었다.


연산군의 비극을 모두 어린 시절 어머니를 잃은 상처 때문이라고 설명하는 것은 어쩌면 너무 낭만적인 해석인지도 모른다.


분명 어린 시절의 상처와 생모에 대한 원한은 있었을 것이다.

그 상처가 연산군의 성격과 정치에 어느 정도 영향을 미쳤을 수도 있다. 그러나 상처를 가지고 산 사람이 모두 폭군이 되는 것은 아니다.


연산군에게도 선택할 기회는 있었다.


강해진 왕권을 어디에 사용할 것인가는 결국 연산군 자신의 선택이었다.


그는 그 힘을 나라와 백성을 위한 개혁보다는 자신의 욕망과 복수에 사용했다. 그래서 연산군의 실패는 단순히 '무능한 왕의 실패'라고만 볼 수 없다.


오히려 '강력한 권력을 잘못 사용한 왕의 실패'에 가까웠다.


결국 그 대가는 돌아왔다.


1506년 9월, 박원종·성희안·유순정 등을 중심으로 한 훈구세력이 군사를 일으켰다.


'중종반정'이다.


반정은 허망할 정도로 쉽게 성공했다. 그토록 강력한 권력을 휘두르던 연산군을 목숨 걸고 지켜주겠다는 사람이 거의 없었다.


연산군은 왕위에서 쫓겨나 강화도 교동으로 보내졌다. 조선에서 반정으로 폐위된 최초 왕이었다.


훗날 광해군은 1623년 인조반정으로 쫓겨난 뒤 1641년까지 무려 18년을 더 살았다. 하지만 연산군은 달랐다.

폐위된 지 불과 두 달여 만에 병으로 죽었다.


서른한 살이었다.


그러나 더 비극적인 일이 남아 있었다. 연산군에게는 어린 아들들이 있었다. 반정세력에게 연산군 아들들은 언제든 왕위를 되찾으려는 세력 구심점이 될 수 있는 위험한 존재였다.


폐세자 이황과 창녕대군 이성, 양평군 이인, 이돈수 등 네 아이는 각각 다른 곳으로 유배되었다.


당시 실록에도 이들이 모두 너무 어려 말을 타고 먼 길을 가기 힘들 정도였다는 기록이 남아 있다.


중종은 처음에는 이들이 너무 어리고 연약하다며 죽이는 것을 차마 허락하지 못했다. 그러나 반정공신과 대신들은 계속해서 이들을 살려두어서는 안 된다고 주장했다. 결국 반정이 일어난 지 불과 한 달도 지나지 않아 네 사람 모두 사사되었다.


연산이야 자신이 저지른 일이 있었다 치자.


그 아들들은 무슨 죄인가?


아버지가 연산군이었다는 것.

권력싸움에서 패한 왕의 자식으로 태어났다는 것. 그것이 그 아이들 죄라면 죄였다.


한 시대를 피로 물들인 연산군 정치는 결국 자기 자신뿐 아니라 아무 죄 없는 자식들의 목숨까지 삼켜버렸다.


권력은 그렇게 무섭다.


권력을 잡은 사람에게도 무섭지만 그 권력이 무너질 때 그 사람 주변에 있던 아무 죄 없는 사람에게까지 칼날이 돌아간다.


그리고 조선은 또다시 새로운 왕을 맞는다.


성종의 둘째 아들이자 연산군의 이복동생 '진성대군 이역'.


조선 제11대 왕 '중종'이다.


그러나 왕 한 사람을 바꾼다고 세상이 곧바로 바뀌는 것은 아니었다.


연산군을 몰아낸 공신들은 이제 자신들이 새로운 권력이 되었다.

연산군의 절대권력을 무너뜨린 사람들이 또다시 막강한 특권세력이 되어 조정을 장악하기 시작한 것이다.


그리고 얼마 지나지 않아 그 새로운 권력에 도전하는 젊은 선비들도 등장한다.


그 대표적인 인물이 '조광조'다.


하지만 조광조가 꿈꾸었던 세상 역시 과연 백성들을 위한 세상이었는지는 따로 살펴볼 필요가 있다.


이어지는 이야기는 '중종반정'과 '기묘사화'입니다.


ㅡ 초롱박철홍 ㅡ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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