초롱초롱 박철홍의 조선사도 흐른다! 32

ㅡ 세조와 사육신 1 ㅡ

초롱초롱 박철홍의 조선사도 흐른다! 32


ㅡ 세조와 사육신 1 ㅡ


계유정난 성공 바로 다음 날 수양대군은 '영의정부사 영경연 서운관사 겸 판이 병조사'라는 이름도 꽤나 긴 조선역사상 전무후무하다시피 한 막강한 관직에 제수되어 사실상 왕을 대신해 정국을 장악하기 시작한다. 정인지가 좌의정에 오르고 며칠 뒤 한확도 우의정에 올랐으며 군권을 비롯한 국가의 중요한 권한은 빠르게 수양에게 집중되었다.


수양대군은 계유정난에서 자신이 세운 공을 중국 주나라의 주공(周公)에 비유하며 정난의 정당성을 강조했다. 후대 기록에 따르면 이를 위한 교서를 집현전 학사들에게 작성하게 했으나 학사들이 자리를 피했고 유성원만 남았다가 압박 속에서 초안을 작성했다고 전해진다.


그러나 아무리 명분을 세우고 교서를 만들어도 계유정난의 정당성 문제까지 완전히 사라지는 것은 아니었다. 김종서와 황보인을 비롯한 대신들이 왕명을 받아 정식 재판을 거쳐 처벌된 것이 아니라 수양과 그 측근들에 의해 제거되었고 그 결과 조정의 실권이 한순간에 수양에게 넘어갔기 때문이다.


군권까지 장악한 수양 무리 앞에서 어린 단종의 운명은 그야말로 바람 앞 등불과 같았다. 그동안 숙부인 수양을 믿고 의지했던 단종으로서는 두려움을 떨쳐내기 힘들었을 것이다. 모든 실권을 수양에게 내주더라도 자신이 성년이 될 때까지 왕의 자리만 지켜낸다면 언젠가는 왕권을 되찾을 수 있다는 것이 어린 왕에게 남은 마지막 희망이었을지도 모른다.


계유정난이 일어난 지 불과 몇 달 뒤부터 단종의 혼인이 서둘러 추진된다. 당시 단종은 아직 문종의 상을 치르던 중이었지만 1454년 1월 수양대군과 대신들은 창덕궁에서 왕비 후보들을 직접 간택했고 결국 송현수의 딸이 왕비가 된다. 계유정난 직후 어린 왕의 혼인을 서두른 정치적 의도에 대해서는 여러 해석이 가능하지만, 결과적으로 단종의 혼인은 수양이 당장 왕위를 넘보지 않고 어린 왕을 보필한다는 모습을 보여주는 효과도 있었다.


그러나 당시 세간에는 이미 수양이 결국 왕이 될 것이라는 소문이 광범위하게 퍼지고 있었다.


급기야 1455년 1월 단종은 직접 하교를 내린다. 당시 민간에는 “수양대군이 장차 과인에게 이롭지 못할 것이다”라는 소문까지 퍼져 있었다. 단종은 이를 간교한 무리들이 군신 사이를 이간하기 위해 퍼뜨린 유언비어라고 선언했고 며칠 뒤 수양에게 내린 교서에서는 수양을 주나라의 '주공'에 직접 비유하기까지 했다.


주공은 주나라 무왕의 동생이다. 무왕이 일찍 죽고 어린 성왕이 즉위하자 숙부로서 국정을 장악해 강력한 섭정을 했지만 성왕이 성장하자 권력을 돌려주고 신하의 자리로 돌아간 인물이다.


단종이 굳이 수양을 주공에 비유한 것은 여러 의미로 읽을 수 있다. 수양의 공을 높여주면서 동시에 '숙부께서는 주공과 같은 분이니 어린 조카의 왕위를 지켜주실 것'이라는 명분으로 수양을 묶어두려는 뜻도 있었을 것이다.


어린 단종의 마지막 애달픈 희망이었는지도 모른다.

그러나 결과적으로 그 희망은 이루어지지 않았다. 수양에게도 이제 뒤로 물러서기가 쉽지 않았다. 계유정난 과정에서 김종서와 황보인 등 수많은 사람을 제거하고 권력을 장악한 이상, 만약 자신이 모든 권력을 내려놓는다면 그 자신과 측근들의 안전까지 장담하기 어려웠을 것이다. 수양과 그를 따르던 사람들은 어느새 돌아오기 힘든 강을 건너고 있었다.


그 무렵부터 단종 주변 사람들을 향한 역모 혐의와 탄핵도 계속 이어졌다. 금성대군과 혜빈 양 씨를 비롯해 단종과 가까웠던 사람들이 하나둘 정치적 위험에 놓였고 수양 측 신하들은 이들을 처벌해야 한다고 끊임없이 압박했다.


어린 단종에게는 선택의 폭이 갈수록 줄어들었다. 자신이 계속 왕위를 지키려 할수록 자신을 따르는 사람들이 더 큰 화를 입을 수 있다는 두려움 또한 커져갔을 것이다.


태어나자마자 어머니를 잃고 어린 나이에 아버지 문종마저 잃었던 단종은 결국 왕위에 오른 지 3년여 만인 1455년 윤 6월 11일 숙부 수양대군에게 왕위를 넘겨주었다. 형식은 '선위', 즉 스스로 왕위를 물려준 것이었지만 당시 권력관계를 생각하면 수양의 강력한 압박 아래 이루어진 왕위교체였다고 보는 것이 자연스럽다.


후대 기록에는 이때 왕의 옥새를 전달하는 일을 맡았던 '성삼문'이 옥새를 받들고 목이 메도록 통곡했다는 이야기가 전해진다. 수양 역시 엎드려 사양하는 의식을 치르는 사이 몇 차례 머리를 들어 성삼문을 바라보았다고 한다.


그때 두 사람은 무슨 생각을 했을까?


이 장면은 훗날 벌어질 사육신 비극의 시작점처럼 보인다.


단종은 상왕이 되었고 수양은 근정전에서 왕위에 올랐다.

세조가 왕위에 오른 뒤 단종은 상왕이 되어 창덕궁으로 옮겼다. 이후에는 궁궐 밖 금성대군의 옛집에 머물렀고 그의 거처에는 삼군진무와 군사까지 두어 경계와 감시를 하도록 했다. 말이 좋아 상왕이지 이전처럼 자유로운 왕실 어른으로 살아갈 수 있는 처지는 아니었다.


오매불망 기다렸던 왕위가 마침내 수양에게 왔다. 그가 바로 우리가 흔히 '수양대군'으로 더 많이 기억하는 조선왕조 제7대 왕 '세조'(世祖, 1417~1468, 재위 1455~1468)이다.


그런데 세조는 과연 어떤 왕이었을까?


그에 대한 역사적 평가는 지금까지도 한 방향으로만 정리하기 어렵다.


수양은 어린 조카 단종에게서 왕위를 빼앗고 그 과정에서 수많은 사람의 피를 흘리게 한 군주로 기억된다. 반면 왕위에 오른 뒤에는 왕권을 강화하고 국가제도를 정비했으며 국방을 강화하는 등 적지 않은 치적도 남겼다.


수양이 죽은 뒤 조정은 그의 묘호를 '세조'라고 정했다. 흔히 왕조를 세우거나 크게 중흥한 군주에게 '조(祖)'가 붙는 경우가 많았다는 점을 생각하면 당시 조정이 그의 통치와 업적을 상당히 높게 평가했음을 보여주는 하나의 사례라고 할 수 있다. 다만 '세조'라는 묘호 자체가 아버지 '세종'의 위업을 계승했다는 뜻은 아니다.


내가 초중고 시절 배웠던 역사 교과서에서는 계유정난으로 권력을 장악하고 단종이 왕위를 넘겨주는 과정의 폭력성보다 세조가 남긴 치적을 훨씬 중요하게 배웠던 기억이 강하다. 시험에도 세조의 업적은 자주 출제되는 중요한 내용이었다.


요즈음 학교에서는 어떻게 가르치는지 모르겠다.


내가 초중고 학교를 다니던 시절은 5·16 군사정변 이후 권위주의 정권이 이어지던 때였다. 당시 역사교육의 이런 강조점이 그 시대 군사독재 권력 성격과 직접적으로 어떤 관계가 있었을 것이라 본다. 다만 나는 훗날 역사를 다시 공부하면서 한 가지 의문을 갖게 되었다.


'왜 우리는 세조가 무엇을 잘했는지는 그렇게 많이 배웠는데, 그가 어떻게 권력을 잡고 어린 단종이 어떻게 왕위를 잃었는지는 그만큼 자세히 배우지 않았을까?'


요즘 <왕과 사는 남자>라는 영화가 공전의 히트를 치고 나서 단종에 대한 관심이 높아졌다.


어쨌든 세조가 재위기간 동안 상당한 치적을 남겼다는 것 또한 부정하기 어려운 역사적 사실이다.


그 치적에 대해서는 다음 편에서 좀 더 자세히 살펴보겠다.


하지만 왕위에 오른 세조 앞에는 또 다른 문제가 기다리고 있었다. 세조 재위 초기는 이른바 '사육신 사건'과 금성대군을 중심으로 한 단종복위 움직임 등 왕 정통성과 직접 연결된 위기가 이어졌다.


이후 세조가 정국을 확실하게 장악한 뒤에도 불안은 끝나지 않았으며 재위 후반인 1467년에는 중앙집권정바카라에 반발한 함길도 토호세력을 중심으로 '이시애의 난'까지 일어났다. 다만 이시애의 난은 단종복위운동과 달리 세조의 왕위 정통성을 직접 문제 삼았다기보다 중앙집권정바카라에 대한 함길도 지역세력의 반발이라는 성격이 강했다.


특히 집현전 출신의 젊은 학자들 가운데 일부는 세조 왕위 장악을 비판적인 시선으로 바라보기 시작했다. 이들은 혈기왕성한 유학자답게 무엇보다 '명분'을 중요하게 생각했다.


그렇다고 이들이 계유정난 때부터 모두 수양을 반대했던 것은 아니다. 성삼문, 박팽년 등 일부는 계유정난 이후에도 수양이 장악한 조정에서 계속 벼슬했고 수양이 왕위에 오른 뒤에도 관직에 남아 있었다. 그러나 수양이 끝내 단종에게서 왕위까지 넘겨받자 그들의 생각도 달라지기 시작했다.


이제 문제는 단순히 누가 정국을 주도하느냐가 아니었다.


'임금은 누구인가?'


'신하는 누구에게 충성을 해야 하는가?'


라는 유학자들에게는 목숨보다 중요할 수도 있는 명분의 문제가 되어버렸다. 이런 상황에서 집현전 출신 젊은 관료들과 단종 및 문종 처가 사람들을 중심으로 단종복위를 위한 움직임이 조심스럽게 시작된다.


그 중심에 '성삼문'과 '박팽년'이 있었다.


승정원에 근무하던 성삼문은 궁중 사정을 비교적 자세히 알 수 있는 위치에 있었고 마침 명나라 사신이 한양에 도착한다는 사실을 알게 되면서 1456년 6월 1일 거사를 결행하기로 했다.


'연려실기술'에는 이들 계획이 다음과 같이 전한다.


“성삼문과 박팽년이 말하기를 6월 1일 연회장 운검(雲劒)으로 '성승'과 '유응부'가 임명되었다. 이날 연회가 시작되면 바로 거사하자. 우선 성문을 닫고 세조와 그 측근들을 죽이면 상왕을 복위하기는 손바닥 뒤집는 것과 같을 것이다.”


ㅡ 연려실기술 단종조 고사본말ㅡ


거사는 명나라 사신을 위한 연회가 열리는 날 세조와 주요 측근들을 제거하고 단종을 다시 왕위에 올린다는 대담한 계획이었다.


그러나 첫 계획부터 어긋났다.


'세조실록'에는 연회장이 좁다는 이유로 별운검을 들이지 않게 되면서 거사를 실행하지 못했다고 기록되어 있다. 성삼문은 운검을 없애서는 안 된다고 주장했지만 결국 뜻을 이루지 못했다. 후대 기록에서는 이것을 한명회가 낌새를 알아차리고 운검을 물리게 했다는 이야기도 전한다. 어느 쪽이든 사육신에게는 결정적인 첫 번째 기회가 사라진 것이다.


이들은 다시 거사를 계획했지만 그전에 모든 것이 발각되고 말았다.


함께 단종복위를 모의했던 '김질'이 자신 장인인 '정창손'과 함께 세조에게 찾아가 성삼문 등의 계획을 고변해 버린 것이다. 1456년 6월 2일이었다.


야사에는 김질이 이미 거사를 함께 모의하고 있었지만, 성삼문이 지나치게 자신만만한 태도로 경솔한 말과 행동을 거듭하는 모습을 보며 이 거사가 결국 실패할지도 모른다는 불길한 예감을 품었다고 전한다. 그런 김질이 첫 번째 거사가 갑자기 연기되자 실패를 직감해 고변했다는 이야기도 전한다. 어디까지나 후대에 전해진 이야기이지만 적어도 이들의 거사가 철저한 비밀유지와 치밀한 군사계획 아래 진행된 것만은 아니었음을 짐작하게 한다.


후대 남효온의 '육신전'에는 거사가 발각된 뒤 유응부가 성삼문 등을 매섭게 꾸짖는 장면이 나온다. 명나라 사신을 위한 연회에서 자신은 그대로 칼을 쓰자고 했지만 성삼문과 박팽년 등이 만전의 계바카라이 아니라며 만류했고, 결국 거사가 미뤄졌다가 김질의 고변으로 모든 것이 무너졌다는 것이다. 유응부는 국문장에서 “서생과는 큰일을 함께 꾀할 수 없다더니 과연 그렇구나”라며 그날 결행했더라면 오늘 같은 화를 당하지 않았을 것이라고 탄식했다고 전한다.


명분은 강했다.

그러나 거사는 치밀하지 못했다.

그것이 사육신의 가장 큰 약점이었는지도 모른다.


결국 단종복위 거사는 실패했고 세조는 직접 성삼문 등을 국문하기 시작했다. 성삼문과 박팽년, 이개와 하위지 등이 차례로 끌려왔고 혹독한 국문이 이어졌다. 박팽년과 성삼문 등의 진술을 통해 함께했던 사람들이 드러나면서 사건은 걷잡을 수 없이 커졌다.


그런데 그 국문의 한쪽에는 이 처참한 광경을 지켜봐야 했던 또 한 사람이 있었다.


'신숙주'였다.


실제로 신숙주는 성삼문 등을 국문하는 신하들 가운데 한 사람이었다.


'성삼문'과 '신숙주'.


한때 두 사람은 절친한 벗이었고 학문의 동지였으며 세종의 총애를 함께 받던 집현전 학자들이었다. 훈민정음 창제와 관련한 학문적 사업에도 함께 참여했고 젊은 시절 같은 꿈을 꾸며 조선의 미래를 논했던 사람들이었다.


그런데 이제 한 사람은 세조를 왕으로 인정하지 않고 단종을 복위시키려다 죄인의 몸으로 끌려와 있었고, 또 한 사람은 세조의 핵심 신하가 되어 그 친구의 국문을 지켜보고 있었다.


이보다 기막힌 역사의 장면이 또 있을까?


우리는 흔히 '성삼문은 충신', '신숙주는 변절자'라고 단순하게 이야기한다.


그러나 이 두 사람의 삶을 조금 더 깊이 들여다보면 그렇게 간단하게만 나누기도 어렵다.


어떤 역사학자들은 신숙주 같은 뛰어난 행정가와 지식인들이 세조 정권에 참여하지 않았다면 계유정난 이후 혼란스러웠던 조선의 국가운영이 훨씬 어려웠을 것이라는 점을 지적하기도 한다.


새겨볼 만한 이야기다.


그러나 이 말 또한 잘못 사용하면 권력을 좇아 자신 신념을 버리는 모든 기회주의와 출세주의를 합리화하는 명분이 될 수도 있다.


그래서 '성삼문'과 '신숙주'의 이야기는 쉽게 결론 내리기가 어렵다.


아마 우리도 살아가면서 크든 작든 성삼문과 신숙주가 섰던 갈림길과 비슷한 순간을 만나게 될 것이다.


자신이 옳다고 믿었던 명분을 위해 모든 것을 버릴 것인가.


현실을 인정하고 그 안으로 들어가 자신이 할 수 있는 일을 할 것인가.


실제로 그런 순간이 온다면 과연 우리는 어느 길을 선택할 수 있을까?


나는 자신 있게 말하기 어렵다.


명분과 실리!

충신과 변절!

신념과 현실!


어쩌면 우리 대부분은 성삼문과 사육신, 그리고 그 가족들까지 맞아야 했던 처참한 결말을 알고 있기에 정작 그 시대에 놓였다면 성삼문 길보다 신숙주 길을 선택했을지도 모른다. 그러나 결과를 전혀 알 수 없는 그 순간에도 우리는 같은 선택을 할 수 있었을까?”


그리고 우리는 어떤 기준으로 그 사람들을 평가해야 하는 것일까?


자세한 이야기는 다음 편

<세조와 사육신 2>에서 이어집니다.


세조 치적과 그에 대한 평가는 사육신 이야기를 마친 뒤 별도로 살펴보겠다.


ㅡ 초롱박철홍 ㅡ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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