시스템을 지배할 것인가, 지배당할 것인가

by루니

얼마 전, 집 인테리어 공사 때문에 카페에서 일을 해야 했던 적이 있습니다.

커피를 시켜놓고 노트북을 폈는데, 도무지 집중이 안 됐습니다.

주변 사람들의 대화 소리가 자꾸 귀에 들어왔거든요.

결국 노트북을 덮고, 그냥 가만히 창밖을 보며 그 소리들에 귀를 기울였습니다.


아이 이야기, 선생님 이야기, 남편 이야기.

그 시간 카페에 모인 사람들의 대화는 대부분 가정사였습니다.

이렇게까지 할 말이 많은 주제인가 싶어 가만히 듣고 있다 보니,

문득 이 여유로움이 참 좋다는 생각이 들었습니다.


아침에 헬스장에서 운동하고 요가를 하고, 잠시 카페에 앉아 이렇게 시간을 흘려보내는 삶.

예전에 회사를 다녔다면 왕복 네 시간 거리를 버스와 전철에 시달리며 오갔을 시간입니다.

아침마다 아이 밥을 대충 챙기고 준비물을 챙기다, 아이가 아프기라도 하면 원망부터 앞섰던 그 삶에서, 저는 벗어나 있었습니다.

그게 좋았습니다.


그런데 좋다가도, 이상하게 마음 한구석이 불편했습니다.

이렇게 할 일 없이 앉아있는 게 마치 어떤 시스템의 규칙을 어기고 있는 기분이 들어서였습니다.

다들 이 나이, 이 경력이면 한창 벌고 있어야 하는데, 저는 퇴사를 결심하고 아이를 위해 가정에 더 시간을 쓰기로 했으니까요.

그 사실이 문득 저를 우울하게 만들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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물론 개발을 완전히 손 놓은 건 아니었습니다.

다만 회사에 다닐 때만큼 벌지 못할 뿐이었죠.


돌이켜보면 좋은 점도 많았습니다.

누군가와 억지로 관계를 맺지 않아도 됐습니다.

카페의 저 사람들처럼 살갑게 수다를 떨 줄도 모르고, 제 일 말고는 딱히 관심사도 없는 저 같은 사람이, 억지로 그 대화에 끼지 않아도 되는 삶.

제가 좋아하는 일을 고르고, 예전부터 해보고 싶었던 걸 시도해볼 수 있는 삶이었습니다.


그런데 주변에서는 그런 저를 한심하게 봤습니다.

그 시선을 느낄 때마다 저는 오히려 더 돈을 벌고 싶어졌습니다.

그래서 요즘은 AI를 공부하고 개발 툴을 익히고 있습니다.

방치형 게임처럼, 제가 잠들어 있는 동안에도 알아서 잘 굴러가고 알아서 잘 성장하는 무언가를 만들어보고 싶어서요.

그런데 신기하게도, 그 공부와 개발 과정 자체가 너무 즐거운 겁니다.


지금의 저는 최강의 캐릭터가 아닙니다.

그래서 가끔은 주변의 시선에 휩쓸려, 다시 저 시스템 안으로 들어가 남들이 정해놓은 퀘스트를 수행해야 할 것 같은 기분에 사로잡히곤 합니다.

아마 그건, 제가 아직 저만의 길을 온전히 만들지 못했기 때문일 겁니다.


이 글을 20화 동안 쓰면서 제가 계속 마주한 것도 결국 이 흔들림이었습니다.

MMORPG와 방치형과 로그라이크라는 세 개의 거울을 통해, 시대마다 사람들이 무엇에 목말라했는지를 들여다봤습니다.

전투력과 UX와 보상 설계와 확률이라는 이름으로, 우리가 얼마나 정교하게 조종당하고 있었는지를 해체해 봤습니다.

정답 대신 질문을 던지는 법, 구조를 읽는 법, 불확실성을 웃으며 껴안는 법을 함께 연습했습니다.

그리고 이 모든 걸 제 삶 위에 그대로 얹어봤습니다.

오르페우스에서의 탈락, 컴퓨터가 고장 나던 밤, 그리고 지금 이 카페에서의 흔들림까지.

그래서 이 마지막 화의 제목이기도 한 질문, "시스템을 지배할 것인가, 지배당할 것인가"에 이제 답을 드려야 할 차례인 것 같습니다.


솔직히 말씀드리면, 저는 이 질문 자체가 조금은 함정이라고 생각합니다.


시스템을 완전히 지배하겠다는 마음은, 사실 시즌 3에서 그렇게 경계했던 '최강의 캐릭터'가 되겠다는 마음과 다르지 않습니다.

하지만 15화에서 말씀드렸듯, 그런 완벽함을 좇는 순간 오히려 더 쉽게 부러지는 게 시스템의 본질입니다.

그렇다고 완전히 지배당한 채로 살아가는 것 역시, 우리가 프롤로그부터 그렇게 벗어나고 싶어 했던 그 수동적인 NPC의 삶일 뿐입니다.


그러니 진짜 답은 이 둘 중 하나를 고르는 게 아닐 겁니다.

지배하거나 지배당하거나가 아니라, 그저 계속 '참여'하는 것. 카페에서 느꼈던 그 죄바카라감도, 주변의 한심하다는 시선도, 그것 때문에 다시 AI를 공부하게 된 오기도, 전부 제가 여전히 이 판에 참여하고 있다는 증거였습니다. 참여를 멈추는 순간에야말로, 우리는 비로소 완전히 지배당하는 것일 테니까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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프롤로그의 마지막 문장을 다시 꺼내 보겠습니다.

"당신이 지금 플레이하고 있는 삶이라는 게임,
그 이면의 코드를 함께 열어볼 시간입니다."


이제 그 코드는 열렸습니다.

하지만 코드를 열어봤다고 해서 삶이 갑자기 완벽하게 밸런스 잡힌 세계가 되는 건 아닙니다.

저부터가 여전히 카페에 앉아 죄바카라감과 자유로움 사이를 오가고, 여전히 저만의 길을 다 만들지 못한 채 흔들리고 있으니까요.


하지만 그 불편함이야말로, 우리가 그저 굴러가는 톱니바퀴가 아니라 이 판을 함께 짜는 플레이어라는 증거입니다.

이 바카라 내내 여러분께 드리고 싶었던 말은 결국 하나였습니다. 당신의 밸런스 시트는 당신이 채워야 합니다. 남이 정해둔 가중치, 남이 깔아둔 정답의 경로, 남이 설계한 도파민의 손잡이 말고, 지금 이 순간 당신에게 정말 필요한 변수가 무엇인지 스스로 물어봐 주시길 바랍니다.


19년간 게임의 규칙을 짜온 기획자로서, 그리고 여전히 저만의 길 위에서 흔들리며 매일 삶의 규칙을 다시 짜고 있는 한 사람의 플레이어로서, 이만 저의 첫 번째 패치 노트를 마칩니다.


주사위는 이미 당신 손에 있습니다. 다음 턴은, 당신 차례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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