시스템의 톱니바퀴가 아닌, 삶의 밸런스 기획자로 서기

by루니

몇 달 전, 저는 다니던 회사를 나와 인디 팀을 꾸려 게임을 만들어보려 했습니다.

그런데 얼마 못 가 지금은 혼자서 작업하는 쪽으로 방향을 틀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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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실 게임을 만드는 것 자체도 즐겁습니다.

런데 요즘은 그보다 관련된 편의 앱이나 웹 서비스를 만드는 데 마음이 더 갑니다.

게임은 제가 유니티를 잘 다루지 못하고, 리소스를 구하는 것도 쉽지 않거든요.

반면 앱이나 웹은 제가 19년간 쌓아온 지식을 곧바로 서비스 형태로 옮길 수 있습니다. 물론 그렇게 만든다고 바로 제가 원하던 결과가 나오는 건 아니지만요.


그리고 무엇을 만들든, 그 안에는 제가 회사에 다니는 동안 가장 지쳐있던 어떤 것으로부터의 해방감이 있었습니다.

회사에서 저는 앞으로 생길 수 있는 문제를 미리 파악하고 대비해야 한다고 말할 때마다, "안 생길 수도 있잖아요"라며 안일하게 받아치는 사람들을 설득해야 했습니다.

심지어 그런 우려를 자꾸 꺼낸다는 이유로 트집쟁이 취급을 받기도 했고요.

13화에서 말씀드렸던 그 구조적 사고, 저에게는 그냥 몸에 밴 습관이었을 뿐인데, 그걸 매번 남에게 이해시키는 일이 생각보다 훨씬 사람을 지치게 하더군요.


사실 일 자체는 늘 즐거웠습니다.

저를 믿고 그냥 맡겨두면, 저는 알아서 무엇이 필요한지 찾아내고 스스로 해결바카라을 만들어냈으니까요.

저를 정말 힘들게 했던 건 일 자체가 아니라, 자꾸만 저를 통제 안에 붙잡아두려는 분위기와, 그걸 매번 설득해야 했던 피로였습니다.

혼자 만들기 시작하면서 저는 더 이상 그 누구도 설득할 필요가 없었습니다.

제가 옳다고 판단하면 그냥 그렇게 만들면 그만이었으니까요.


그런데 다시 회사에 들어갈 생각을 하다 보니, 사업자 등록을 내는 것조차 망설여지더군요.

주변에 아예 홀로 창업해서 자기 일을 꾸려가는 분들을 보면 부럽기도 합니다.

하지만 저는 아직 회사라는 울타리의 편안함을 완전히 놓을 용기는 없는, 어쩌면 겁쟁이인지도 모르겠습니다.


그러던 중 얼마 전, 작업하던 컴퓨터의 쿨러가 고장 나서 수리를 맡겼습니다.

수리비가 생각보다 꽤 나왔습니다.

그 비용을 결제하고 나서부터, 이상하게 마음이 초조해지기 시작했습니다.

'이렇게 계속 혼자 작업만 하고 있어도 되는 걸까.'

'다시 일을 해야 하지 않을까.'


작년까지만 해도 여기저기서 저를 찾는 연락이 왔었는데, 지금은 열람 한 번 없는 것 같다는 생각까지 들면서 점점 낙담하게 되더군요.


'너무 오래 쉬었나.'


한참을 그 초조함에 잠식되어 있다가, 문득 12화에서 제가 그렇게 강조했던 질문 하나가 떠올랐습니다.

'이 불안은 대체 어디서 오는 걸까.'


이력서를 다시 써볼까 마음먹은 그날 밤, 이상한 꿈을 꿨습니다.

꿈속에서 저는 또 누군가와 비교당하고 있었고, 혹시 내가 업무에서 배제되진 않았는지 자꾸 확인하며 눈치를 보고 있었습니다.


눈을 뜨고 나서도 한참 그 꿈이 머릿속에 남아있었습니다.

그리고 알아챘습니다.

제가 던진 질문에 대한 답이, 꿈이라는 형태로 먼저 와 있었다는 것을요.

저에게는 여전히 오래된 두려움 하나가 남아있었습니다.

누군가를 위해 열심히 일하다가, 결국 그 누군가에게 버림받는 것에 대한 두려움이었습니다.


돌이켜보면 저는 회사에 다니는 내내 문제가 생길까 봐 미리 검토하고, 동료들이 덜 힘들도록 툴을 만들고 작은 시스템들을 짜두곤 했습니다.

그런데 그 편리함을 굳이 티 내지 않았다는 이유만으로, 언젠가 제 필요성이 슬그머니 줄어드는 걸 느낀 적이 있었습니다.

저는 그 기분을 다시는 느끼고 싶지 않았던 겁니다.


곰곰이 따져보니, 이 불안은 단순히 수리비 몇 십만 원 문제가 아니었습니다.

그보다 더 깊은 곳에 있었습니다.

"시장이 더 이상 나를 원하지 않는다"는 공포. 6화에서 이야기했던 그 '슬롯적 전투력'이 조용히 0을 향해 수렴하고 있는 것 같은 감각이었습니다.

남들이 정해놓은 가중치 공식 안에서, 제가 순위 밖으로 밀려나고 있다는 두려움이었던 겁니다.


그 사실을 알아차리고 나니, 이 상황을 조금 다르게 볼 수 있었습니다.

13화에서 말씀드렸던 구조적 사고를 그대로 제 삶에 적용해 본 거죠.

지금 저에게 벌어진 일은 '실패'라는 하나의 고립된 점이 아니었습니다.

만들고 싶은 것을 만드는 즐거움과 설득의 피로에서 벗어난 자유, 그리고 생존의 안정. 이 여러 자원들이 원래도 아슬아슬하게 밸런스를 맞추고 있었는데, 쿨러 고장이라는 예상 못 한 변수 하나가 끼어들면서 그 균형이 순간적으로 흔들린 것뿐이었습니다.


시스템이 흔들렸다는 건 세상이 끝났다는 뜻이 아닙니다.

그저 다시 패치가 필요하다는 신호일 뿐입니다.


그래서 저는 이런 결론을 내려봅니다.

만약 제가 조만간 다시 어딘가에 소속되어 일하게 된다 해도, 그건 제가 졌다는 뜻이 아니라는 것을요.

15화에서 말씀드렸던 것처럼, 최강이 되지 않기로 결심하는 것과 비슷한 마음으로요.

저는 아직 완벽하게 자립하지 못했다는 걸 인정하는 것이지, 제가 만들고 싶은 것을 포기하는 게 아닙니다.

생존을 위한 일자리는 제 삶이라는 시스템에서 하나의 '자원 수급처(Faucet)'일 뿐이고, 제가 앱이든 웹이든 언젠가 게임이든 계속 만들어가는 것은 여전히 제가 쌓아 올리고 있는 메인 퀘스트니까요.


겁쟁이라서 다시 울타리 안으로 들어간다 해도, 그 울타리 안에서마저 제가 만들고 싶은 걸 조금씩 계속 만들어갈 수 있다면, 그건 항복이 아니라 그냥 밸런스를 다시 맞추는 일일 겁니다.


이게 바로 제가 이 바카라 전체를 통해 여러분과 나누고 싶었던 이야기의 핵심입니다.

톱니바퀴로 사는 것과 밸런스 기획자로 사는 것은, 겉으로 보이는 행동만 놓고 보면 완전히 똑같아 보일 때가 많습니다.

똑같이 이력서를 내고, 똑같이 면접을 보고, 똑같이 출근을 합니다.

하지만 그 안을 채우고 있는 마음은 전혀 다릅니다.

톱니바퀴는 시스템이 시키는 대로 그냥 돌아갑니다.

밸런스 기획자는 그 시스템 안에서도, 무엇을 자원으로 쓰고 무엇을 지켜낼지를 스스로 정합니다.


저는 아마 부품의 일부로 남는 것을 유독 견디기 힘들어하는 사람인 것 같습니다.

저는 스스로 완성된 사람이고 싶은 욕구가 강한 사람이거든요.

그 욕구를 인정하고 나니, 제가 왜 그토록 통제받는 것에 지쳐했는지, 왜 티 나지 않는 기여 끝에 버림받을까 봐 그렇게 두려워했는지 조금은 이해가 됐습니다.


완벽한 답을 미리 찾아놓고 시작하는 사람은 없습니다.

12화에서 배운 것처럼 정답을 선언하는 대신 계속 왜냐고 물으며, 17화에서 배운 것처럼 실패의 비용을 낮추면서, 14화에서 배운 것처럼 주사위가 어떻게 굴러가든 씩 웃어넘길 준비를 하면서. 그렇게 매일 조금씩 내 삶의 패치 노트를 새로 써 내려가는 것. 그것이 제가 지금 배우고 있는, 그리고 여전히 서툴게 연습하고 있는 밸런스 기획자의 태도입니다.


솔직히 말씀드리면, 지금 이 순간에도 저는 이 불안을 완전히 떨쳐내지는 못했습니다.

여전히 통장을 들여다보고, 여전히 채용 공고를 흘깃거리고, 사업자 등록 앞에서 여전히 망설입니다.

하지만 적어도 이제는 이 흔들림을 '내가 실패한 증거'로 받아들이지 않으려 합니다.

그저 지금 제 삶의 시스템에 새로운 변수가 들어왔을 뿐이고, 저는 그걸 계속 패치해나가고 있는 중이라고요.


이제 이 긴 여정도 얼마 남지 않았습니다.

다음 화, 마지막 에필로그에서는 지금까지 프롤로그부터 걸어온 이 모든 이야기를 하나로 갈무리하며, 우리가 결국 어떤 시스템을 지배하고 어떤 시스템에 지배당하며 살아가고 있는지, 그 마지막 질문을 함께 마주해 보려 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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