기획자로 오래 일하다 보면, 유저의 과시욕을 자극하도록 설계된 장치들을 수도 없이 만지게 됩니다.
높은 등급의 아이템을 착용하거나 특정 형태로 변신하면, 캐릭터 주변에 반짝이는 오로라 효과가 뿜어져 나오도록 설계합니다.
그 화려한 빛만 봐도 주변 사람들은 "와, 저 사람 랭커인가 봐" 하고 알아차리죠.
특정 강화 단계를 달성하면 서버 전체에 확성기로 안내가 나가게 하거나, '명예의 전당' 같은 공간에 이름을 새겨주기도 합니다.
이유는 다 같습니다.
사람은 누구나 자기 잘남을 남에게 보여주고 싶어 하고, 그 과시욕을 정확히 겨냥한 아이템은 생각보다 훨씬 잘 팔립니다.
스펙도 물론 중요하지만, '보여지는 것' 역시 그만큼 중요한 게임 속 화폐인 셈입니다.
그런데 저는 예전에, 이 시스템을 정면으로 거스르는 행동을 한 적이 있습니다.
실력이 꽤 붙었을 때, 일부러 초보자용 옷을 챙겨 입고 초보인 척 서버를 돌아다닌 적이 있거든요.
이른바 '힘을 숨긴 자' 컨셉이었달까요.
캐릭터 정보를 아무나 들여다볼 수 없던 시절이라 가능했던 낭만이었습니다.
그렇게 초보인 척하고 다니니, 저를 초보로 알고 선뜻 도와주는 사람들이 생기더군요.
그렇게 시작된 인연들이, 신기하게도 화려하게 치장하고 다닐 때 얻었던 그 어떤 시선보다 훨씬 오래 남았습니다.
강제로 등 떠밀려 가입한 길드가 아니라, 정말 즐거워서 자발적으로 들어간 길드. 도움을 받고, 다시 도움을 주고, 레이드에서 팀을 짜며 서로 손발을 맞춰가던 그 시간들이 저에게는 게임에서 가장 재미있었던 기억으로 남아있습니다.
돌이켜보면 그 즐거움은 제가 강해서 얻은 게 아니었습니다.
함께했기 때문에 얻은 것이었죠.
이 기억을 떠올리면, 저는 늘 몇 년 전 부모님을 통해 전해 들은 어떤 여행 이야기가 함께 생각납니다.
부모님 지인 중에 정말 형편이 넉넉하신 분이 계십니다.
한 달에 한 번은 꼭 해외로 여행을 다녀오신다고 하더군요.
이번엔 그분이 모임의 주최자가 되어 대만 여행을 준비하셨는데, 개인 기사와 전용 버스까지 따로 마련해서 일행을 데리고 다니셨다고 합니다.
그런데 정작 그 모임에서, 형편이 넉넉하지 않은 분은 한껏 보석으로 치장하고 화장도 화려하게 하고 나오셨다고 합니다.
반면 그 여행을 주최한, 진짜 여유가 있으신 분은 화장도 아주 살짝, 보석 하나 걸치지 않고 나오셨다고 하더군요.
이 이야기를 전해 듣고 한동안 머릿속에서 떠나지 않았습니다.
왜 정작 가진 사람은 아무것도 걸치지 않았을까.
곰곰이 생각해보니 이런 답에 도달했습니다.
여유란 그냥 저절로 생기는 게 아니라는 것. 자유롭다는 건 결국 남의 시선을 신경 쓰지 않아도 되는 든든함이 뒷받침될 때에만 가능한 게 아닐까 하는 생각이었습니다.
가진 게 확실한 사람은 굳이 그걸 몸에 두르고 증명하지 않아도 됩니다.
반면 아직 확신이 부족한 사람일수록, 그 불안을 메우기 위해 겉으로 더 많이 걸치게 되는 건지도 모르겠습니다.
신기하게도, 게임 속 '힘을 숨긴 자'였던 저의 이야기와 이 대만 여행 이야기는 결국 같은 지점을 가리키고 있습니다.
둘 다 무언가를 벗어던졌을 때 오히려 더 진짜에 가까운 것을 얻었다는 이야기니까요.
저는 강함을 감추고 관계를 얻었고, 그분은 치장을 벗어던지고 여유를 얻었습니다.
그리고 돌아보면 2화에서 우리가 그토록 갈망했다고 말씀드렸던 그 '끈적한 연결'도, 사실은 화려한 스펙 자랑이 아니라 이렇게 무장을 내려놓았을 때 비로소 가능해지는 것이었는지도 모르겠습니다.
이건 사실 6화에서 함께 이야기했던 '전투력'의 함정과 정확히 같은 자리에 서 있는 이야기입니다.
우리는 남들이 정해놓은 가중치 공식에 스스로를 밀어 넣고, 그 숫자를 조금이라도 높이기 위해 화려한 겉치레를 걸칩니다. 비싼 차, 좋은 옷, 반짝이는 액세서리. 그런데 정작 진짜 자산을 가진 사람들은 그 경쟁 자체에서 걸어 나와 있는 경우가 많습니다. 증명할 필요가 없으니까요.
그리고 바로 이 지점에서, 이 바카라을 시작하며 제가 여러분께 슬쩍 던져두었던 문장 하나를 다시 꺼내보고 싶습니다.
프롤로그에서 저는 이렇게 말씀드렸습니다.
"최강의 캐릭터가 되지 않기로 결심했을 때 비로소 보이는 풍경들이 있습니다." 그때는 그저 하나의 마무리 문장이었지만, 지금 이렇게 시즌 3의 끝자락에 서서 돌아보니 이 바카라 전체가 결국 그 한 문장을 향해 걸어온 여정이었다는 생각이 듭니다.
도파민 루프에 낚여 있다는 걸 알아차리는 것도, 시작의 불평등을 깨닫는 것도, 판단하는 근육을 되찾는 것도, 전투력이라는 숫자 뒤에 숨은 나만의 가중치를 다시 정하는 것도, 왜냐고 묻는 훈련도, 구조를 보는 눈도, 주사위를 기꺼이 던지는 태도도... 결국 전부 이 하나로 수렴합니다. 남이 정해놓은 최강의 기준에서 내려와, 내가 정한 나만의 밸런스로 서는 것.
최강이 되겠다는 목표는 사실 끝이 없습니다.
언제나 나보다 전투력이 높은 누군가가, 나보다 화려한 치장을 두른 누군가가 존재하니까요.
그 게임에 계속 참여하는 한, 우리는 영원히 부족한 상태에서 벗어날 수 없습니다.
하지만 최강이 되지 않기로 결심하는 순간, 이상하게도 오히려 더 많은 것이 보이기 시작합니다.
남들과의 순위 경쟁에서 벗어난 시야로 내가 정말 좋아하는 콘텐츠를 골라 즐길 수 있게 되고, 화려한 스탯 대신 내 삶의 리듬과 속도를 스스로 정할 수 있게 됩니다.
대만 여행에서 아무것도 걸치지 않고도 가장 여유로워 보였다던 그분처럼, 우리도 어쩌면 무언가를 내려놓을 때 비로소 가장 단단해 보일 수 있는지도 모릅니다.
지금까지 [ AI 시대와 기획자의 사고]를 통해, 정답 대신 질문을 던지는 훈련부터 구조를 읽는 눈, 그리고 불확실성을 껴안는 태도까지 함께 걸어왔습니다.
이 모든 여정의 끝에서 만나게 되는 결론은 결국 하나였습니다.
남이 짜놓은 최강의 공식에서 내려올 용기가, 진짜 나의 삶을 기획할 첫걸음이라는 것.
다음 화부터 시작될 [시즌 4: 미래는 어떤 게임을 만들까]에서는, 지금까지 우리가 나눈 이 모든 통찰을 삶이라는 무대 위에 직접 적용해 보려 합니다.
현실을 게임처럼 다루고, 게임을 현실처럼 진지하게 대하는 법. 실패를 허용하는 시스템이 왜 위대한지, 그리고 우리가 시스템의 톱니바퀴가 아니라 삶의 밸런스 기획자로 서는 방법에 대해 16화에서 이어가 보겠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