TRPG처럼 불확실한 일상을 마주하는 법
작년 겨울, 가족들과 베트남 나트랑으로 훌쩍 여행을 떠났을 때의 일입니다.
출발하기 전 저는 직업병이자 기획자의 본능을 십분 발휘해, 시간 단위로 엑셀에 동선을 짜고 구글 맵의 리뷰를 교차 검증하며 이른바 '완벽하게 최적화된' 여행 스케줄을 완성했습니다.
그런데 현지에 도착해서 첫 끼를 먹으러 나선 순간부터 이 완벽한 계획이 삐걱대기 시작했습니다.
분명 경로까지 다 짜두었는데, 정작 구글 지도를 보는 법이 서툴렀는지 저희 가족은 같은 블록을 한 시간 넘게 뱅글뱅글 돌고 있었습니다.
결국 너무 배가 고픈 나머지, 원래 가려던 곳도 아닌, 어디선가 들어본 것 같은 이름의 식당으로 무작정 들어갔습니다.
'씀모이 가든'이라고, 알고 보니 꽤 유명한 곳이었습니다.
얼마나 배가 고팠던지 정말 흡입하듯 먹었던 기억이 납니다.
그날 이후로는 길에서 더 헤매지 말자고, 그냥 택시를 타기로 마음을 바꿨습니다.
그리고 여유가 생긴 김에 리뷰를 더 꼼꼼히 읽어보기 시작했는데, 그러다 보니 진짜 외지고 허름하지만 싸고 좋은 로컬 식당들을 하나둘 알게 됐습니다.
로컬 마사지 숍도 그렇게 찾았고요.
처음엔 아무것도 몰라서 근처의 유명하고 화려해 보이는 곳들을 찾아갔었습니다.
그런데 막상 가보면 생각보다 별로였던 적이 많았습니다.
가격에 비해 만족스럽지 않았죠.
그런데 유명하지 않은, 허름한 로컬 가게들을 찾아다니기 시작하니 오히려 훨씬 좋았습니다.
가격은 저렴한데, 훨씬 친절하고 진심으로 대접받는 기분이 들었거든요.
비싸고 화려한 곳에서 느꼈던 대접받는 느낌은 딱 그 순간뿐이었는데, 소박한 로컬 가게에서는 그 만족감이 훨씬 오래갔습니다.
그중 한 마사지 숍은 마음에 들어서 두 번이나 갔습니다.
첫 번째는 타이 마사지였는데 남편이 정말 좋아했습니다.
두 번째엔 아로마 마사지로 바꿔봤는데, 남편은 이번엔 첫 번째만큼 만족스럽지 않았나 봅니다.
저는 후기를 쓸 때 그 느낌을 그대로 솔직하게 적었습니다.
그랬더니 숍에서 미안하다며 가격을 깎아주더군요.
저는 사실 저 개인적으로는 충분히 만족했었기에, 오히려 그렇게까지 미안해하는 게 마음에 걸려서 팁을 더 챙겨드렸습니다.
계획대로 되지 않았던 첫날의 그 헤맴이 없었다면, 저는 아마 끝까지 화려하고 유명한 곳들만 돌아다니다 돌아왔을 겁니다.
예상 밖의 불편함이, 오히려 진짜 좋은 것을 알아보는 눈을 열어준 셈입니다.
예전에 개인적으로 온라인카지노에 'TRPG처럼 살기'라는 주제로 짧은 단상들을 연재한 적이 있습니다.
요즘도 가끔 일상이 꽉 막힌 듯 답답할 때면 저는 모니터 앞의 숫자들을 잠시 내려놓고, 먼지 쌓인 20면체 주사위(D20)를 만지작거리며 그 오래된 게임의 룰을 떠올리곤 합니다.
TRPG(Tabletop Role-Playing Game), 흔히 '던전 앤 드래곤(D&D)'으로 대표되는 이 아날로그 게임은 컴퓨터가 모든 것을 계산해 주는 요즘의 게임들과는 완전히 궤를 달리합니다.
테이블에 모여 앉은 플레이어들은 종이와 연필을 쥐고, 게임 마스터(GM)의 설명에 따라 오직 상상력만으로 모험을 떠납니다.
이 게임의 가장 아름답고도 서늘한 특징은 바로 '절대적인 불확실성'에 있습니다.
아무리 내 캐릭터가 레벨이 높고 지능 스탯이 만렙이라 해도, 위기의 순간 행동의 성공 여부는 오직 손에서 굴러가는 다면체 주사위의 숫자가 결정합니다.
만약 중요한 순간에 주사위를 굴려 최악의 숫자인 '1(대실패, Critical Miss)'이 나오면 어떻게 될까요?
왕을 설득하려다 엉뚱한 헛소리를 해서 감옥에 갇히거나, 칼을 휘두르다 자기 발등을 찍어버리는 어처구니없는 상황이 벌어집니다.
만약 완벽한 효율을 추구하는 최신 모바일 게임이나 방치형 게임이었다면, 유저들은 곧바로 "불합리하다"며 게임을 삭제하거나 저장 파일을 불러왔을 겁니다.
하지만 TRPG의 테이블 위에서는 완전히 다른 풍경이 펼쳐집니다.
주사위가 1을 가리키는 순간, 사람들은 짜증을 내는 대신 일제히 테이블을 치며 폭소를 터뜨립니다.
그리고 게임 마스터는 그 '어처구니없는 실패'를 기반으로 기가 막힌 위기 상황을 즉흥적으로 지어냅니다.
실패는 게임 오버가 아니라, 단 한 번도 예측하지 못했던 새롭고 흥미진진한 퀘스트의 출발점이 되는 것이죠.
완벽한 스펙과 공략집이 서사를 지배하는 것이 아니라, 통제할 수 없는 우연과 뼈아픈 실수가 얽히며 세상에 단 하나뿐인 '우리만의 이야기'가 만들어지는 공간.
그것이 TRPG가 가진 본질적인 마법입니다.
...자, 이제 우리의 일상으로 시선을 돌려보겠습니다.
우리는 지금 실패를 극도로 두려워하는 피로슬롯 속을 걷고 있습니다.
AI는 내비게이션처럼 우리에게 1분의 오차도 없는 최적의 진로와 재테크의 정답을 알려주고, 우리는 리스크를 0%로 만들기 위해 매일 밤 유튜브 요약본과 성공 방정식들을 탐독합니다.
조금이라도 엇나가거나 주사위가 잘못 굴러갈 틈을 완벽하게 차단하는 것이 현명한 어른의 삶이라고 믿으면서요.
하지만 기획자로서 수만 번의 밸런스 시뮬레이션을 돌려보며 뼈저리게 느낀 진리가 있습니다.
시스템 안에서 변수를 완벽하게 통제하려 들수록, 시스템은 그 자체로 거대한 시한폭탄이 되어버립니다.
아주 작은 외부의 충격이나 예상치 못한 오류 하나만 발생해도, 융통성을 잃어버린 그 완벽한 탑은 한순간에 와르르 무너져 내리니까요.
아무리 열심히 주식 차트를 분석하고 펀더멘털을 따져봐도 시장은 어느 날 갑자기 예기치 못한 이슈로 요동치고, 회사를 위해 엑셀과 기획서에 청춘을 바쳐도 하루아침에 프로젝트가 허무하게 엎어지는 것이 현실입니다. 어쩌면 우리는 내가 통제할 수 없는 거대한 주사위가 매일매일 굴려지는 불확실한 테이블 위에 위태롭게 앉아있는지도 모릅니다.
AI 시대, 모든 것이 예측 가능하고 최적화된 정답만을 강요하는 이 숨 막히는 세계에서... 우리에게 진짜 필요한 무기는 압도적인 연산 능력이 아닙니다. 그것은 기꺼이 내 손을 떠난 주사위의 결과를 유쾌하게 받아들이는 'TRPG 플레이어의 태도'일 것입니다.
어차피 우리네 인생이라는 게임은 세이브 포인트도 없고, 이전으로 돌아갈 수 있는 로드(Load) 버튼도 없습니다.
내 삶이 나에게 대실패(Critical Miss)를 던졌을 때, 남들과 스탯을 비교하며 좌절하거나 완벽한 공략집을 찾지 못해 불안해하는 대신...
"아, 이거 꼬였는데? 그런데 오히려 재밌어지겠는걸. 다음엔 어떻게 헤쳐나가지?"라며 씩 웃어볼 수 있는 여유.
길을 잃고 배고픔에 떠밀려 들어갔던 그 이름 모를 식당에서 시작된, 계획에는 전혀 없던 로컬의 발견들처럼. 내 계획대로 되지 않는 그 덜컹거리는 불확실성을 기꺼이 일상의 축제로 껴안아 보는 겁니다.
주사위는 이미 던져졌고, 우리를 기다리는 것은 실패가 아니라 아직 쓰이지 않은 새로운 서사일 뿐이니까요.
다음 15화에서는 이 치열한 시스템 속에서 모두가 '최강의 캐릭터'가 되려 발버둥 칠 때, 과감히 최강이 되지 않기로 결심했을 때 비로소 보이는 삶의 또 다른 밸런스에 대해 이야기해 보겠습니다. 화려하게 무장한 캐릭터와, 아무것도 걸치지 않았지만 이상하게 더 단단해 보이는 캐릭터. 그 둘 사이에서 우리가 놓치고 있던 것에 대해서도 함께 나눠보겠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