구조적으로 사고한다는 것의 진짜 의미

by루니

지난 12화에서 우리는 쏟아지는 정답들 속에서 잠시 멈춰 서서 '왜(Why)?'라고 질문을 던지는 훈련에 대해 이야기했습니다.

성급한 결론 대신 본질을 파고드는 그 덜컹거리는 사유의 시간이, AI 시대에 우리가 잃지 말아야 할 가장 중요한 무기라고 말씀드렸죠.


자, 그렇다면 질문을 통해 '진짜 원인'을 찾았다면 그다음은 무엇일까요?

여기서부터는 조금 더 크고 서늘한 기획자의 시선이 필요해집니다.

바로 파편화된 현상들 사이의 숨겨진 룰을 얽어매어 판 전체를 내려다보는 힘, '구조적으로 사고하는 능력'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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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년이나 시스템 밸런스를 만지작거리며 살아왔지만, 솔직히 고백하건대 저는 아직도 엑셀 시트 위에서 변수들이 톱니바퀴처럼 맞물려 돌아갈 때면 이따금씩 등골이 서늘해짐을 느낍니다.

최근에도 전투 시뮬레이터를 짜면서 TTK(Time To Kill, 적을 처치하는 데 걸리는 시간)와 EHP(Effective HP, 실질 체력)의 상관관계를 조율하느라 한참을 씨름했었죠.


보통 연차가 낮은 후배 기획자들은 밸런스에 문제가 생기면 아주 직관적이고 1차원적인 해결바카라을 가져옵니다.


"유저들이 몬스터를 너무 빨리 잡아서 콘텐츠 소모 속도가 비정상적으로 빠릅니다. 몬스터 체력을 30% 정도 올릴까요?"


현상(빠른 소모)을 해결하기 위해 가장 직접적인 변수(체력)를 건드리는, 아주 상식적인 접근입니다.

하지만 저는 대개 한숨을 푹 쉬며 고개를 젓습니다.

"그렇게 단편적으로 숫자 하나 툭 건드리면, 우리 게임 경제 시스템 전체가 다 터져버릴걸."


왜 그럴까요?

몬스터의 체력을 30% 올린다는 것은, 곧 유저가 몬스터 한 마리를 잡는 데 걸리는 시간(TTK)이 그만큼 늘어난다는 뜻입니다.

전투 시간이 길어지면 몬스터에게 얻어맞는 횟수가 늘어나고, 유저의 실질적인 체력(EHP)이 깎이면서 물약 소모량이 기하급수적으로 증가하게 됩니다.


물약값이 늘어나면 어떤 일이 벌어질까요?

유저들이 한 시간 동안 사냥해서 버는 골드보다, 상점에서 사 먹어야 하는 물약값이 더 비싸지는 이른바 '적자 사냥'이 시작됩니다.

그럼 무소과금 유저들은 버티지 못하고 게임을 대거 이탈하게 되고, 시장에 재료 아이템 공급이 끊기면서 거래소 물가가 폭등하는 초인플레이션 사태가 발생합니다.


결국 '몬스터 체력'이라는 아주 작고 단순한 숫자 하나를 건드렸을 뿐인데, 나비효과처럼 게임 내 거시 경제가 붕괴되는 끔찍한 결과로 이어지는 것이죠.


이것이 바로 시스템의 무서움입니다.

구조적으로 사고한다는 것은 내 눈앞에 놓인 문제(점)를 하나의 고립된 현상으로 보지 않고, 그것이 보이지 않는 밑단에서 어떤 변수들과 선으로 연결되어 있는지, 그리고 최종적으로 어떤 생태계(면)를 이루고 있는지를 입체적으로 조망하는 능력입니다.


그런데 재미있는 건, 정말 노련한 기획자일수록 이 연결망 안에서도 '감정'이라는 가장 다루기 까다로운 변수를 건드릴 때는 오히려 눈에 보이는 숫자에 손을 대지 않는다는 겁니다.


방금 그 후배 기획자의 사례로 돌아가 볼까요.

유저들이 이 구간을 유독 '어렵고 억울하다'고 느낀다면, 초보 기획자는 반사적으로 몬스터 체력이나 데미지 같은 겉으로 드러난 수치부터 깎으려 듭니다.

하지만 정말 그 어려움의 정체가 숫자 때문이었을까요?


카메라를 예로 들어보겠습니다.

사이드 스크롤러 게임에서 카메라가 캐릭터를 화면 정중앙에 두느냐, 진행 방향 쪽으로 살짝 밀어두느냐에 따라 유저가 미리 볼 수 있는 정보량이 달라집니다.

전방 시야가 짧으면 같은 적, 같은 패턴이라도 반응할 시간이 부족해서 훨씬 어렵게 느껴집니다.

몬스터의 공격력은 그대로인데, 카메라 하나로 체감 난이도가 요동치는 거죠.


히트 판정도 마찬가지입니다.

화면에 보이는 캐릭터의 크기와 실제 판정 영역은 대부분 다르게 설계됩니다.

내 공격의 판정 범위는 무기보다 살짝 크게, 내가 맞는 판정 범위는 캐릭터보다 살짝 작게 잡아둡니다.

회피 직후엔 짧은 무적 시간을 몰래 끼워 넣기도 하고요.

이건 유저를 봐주기 위한 편법이 아니라, 눈으로 본 것과 실제로 일어난 판정 사이의 오차를 메워주는 장치에 가깝습니다.

이 판정 범위를 얼마나 관대하게 잡느냐에 따라, 같은 공격력의 캐릭터라도 실질적인 DPS와 '쾌적하다'는 느낌이 완전히 달라집니다.


그리고 요즘 잘 만든 게임일수록, 실력에 따라 난이도를 조정할 때 몬스터의 체력을 직접 낮추는 대신 공격이 들어오기 전 예고 동작(전조)의 시간을 늘리거나, 회복 자원을 조금 더 쥐여주거나, 체크포인트 간격과 재도전 비용을 완화하는 방식을 씁니다.

원시 전투력 수치는 그대로 두고, 유저가 정보를 처리하고 실패를 복구하는 데 드는 부담만 살짝 덜어주는 거죠.

그래야 유저는 "내가 성장해서 이겼다"고 느끼지, "시스템이 봐줬다"고 느끼지 않으니까요.

점프해서 착지할 때의 미세한 속도감, 벽 뒤에 숨은 적을 계산하기 위해 게임이 쏘아 보내는 시야 판정용 레이(Ray) 하나까지. 이런 것들은 유저에게 절대 숫자로 보이지 않습니다.

그런데도 이 눈에 안 보이는 감각의 변수들을 미세하게 조정하는 것만으로, 게임의 난이도 숫자는 그대로 둔 채 유저가 느끼는 '억울함'이나 '쾌적함'이라는 감정을 완전히 뒤바꿀 수 있습니다.

그러니까 진짜 구조적 사고란, TTK와 EHP처럼 눈에 보이는 숫자들의 연결망만 읽어내는 게 아닙니다. 그 숫자들 밑에 깔려있는, 유저조차 인지하지 못하는 감각의 층위까지 함께 설계 대상으로 끌어안는 것. 그것이 제가 후배들에게 늘 강조하는, 진짜 고수와 초보를 가르는 지점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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지식 노동자로 살아가는 우리의 일상도 정확히 이 거대한 밸런스 시트 위에 놓여 있습니다.

가장 뼈아프고 흔한 예로 '온라인 게임인의 번아웃(Burnout)'을 떠올려 볼까요.


매일 과도한 업무에 시달리며 완전히 방전된 3050 온라인 게임인들은 자신의 피로(문제)를 해결하기 위해 어떤 선택을 할까요?

1차원적인 해결바카라을 찾습니다.

피곤하니까 비싼 영양제를 한 움큼 챙겨 먹고, 주말에는 억지로라도 스트레스를 풀겠다며 캠핑을 떠나고, 퇴근 후에는 아무 생각 없이 숏폼 영상을 보며 뇌를 마취시킵니다.


게임으로 치면 내 캐릭터의 체력이 깎이고 있으니, 억지로 '임시 버프 물약'을 쏟아붓는 셈입니다.

하지만 구조적으로 사고해 보면 내 번아웃의 진짜 원인은 내 체력(의지력) 부족이 아닙니다.

내가 전혀 통제할 수 없는 꽉 막힌 보고 체계,

언제 끝날지 모르는 불확실한 프로젝트의 기나긴 TTK,

그리고 내 노력 대비 턱없이 부족하고 불공평한 회사의 보상 시스템.

이 거대한 구조의 엇박자가 매일매일 내 실질 체력(EHP)을 갉아먹고 있는데, 우리는 자꾸만 "내가 멘탈 관리를 못해서", "내가 요새 운동을 안 해서"라며 스스로를 탓하며 엉뚱한 변수만 튜닝하고 있습니다.


밑 빠진 독(구조적 모순)에 아무리 값비싼 영양제와 휴식(물약)을 부어본들, 근본적인 사냥터의 밸런스가 망가져 있다면 내 삶의 흑자 전환은 영원히 불가능합니다.


우리가 구조를 볼 줄 알아야 하는 이유가 여기에 있습니다. 내 고통의 원인이 내 안의 스탯 부족 때문인지, 아니면 내가 속한 룰 자체의 모순 때문인지 객관적으로 분리해서 볼 수 있게 되니까요.

만약 룰 자체가 잘못되었다면, 억지로 그 썩어가는 시스템 안에서 1등이 되려 발버둥 치는 대신, 과감하게 판을 엎거나 다른 사냥터로 떠날 용기를 낼 수 있습니다.


AI 시대에 왜 이 능력이 우리의 유일한 생존 무기가 될까요?

AI는 주어진 '점'을 최적화하는 데는 신의 경지에 이른 도구입니다.

"특정 몬스터의 공격력 대비 유저의 최적 회피율을 계산해 줘"라고 하면 단 1초 만에 완벽한 숫자를 뱉어내죠.

하지만 AI는 인간이 묻지 않으면 그 밖의 변수를 스스로 연결하지 못합니다.

"물약 드롭률을 낮추면 유저들의 박탈감(감정)이 어떻게 변할까?"
"이 숫자의 변화가 우리가 추구하는 서비스 철학(비전)과 맞닿아 있을까?"


심지어 앞서 말씀드린 것처럼, 그 박탈감의 진짜 원인이 드롭률 숫자가 아니라 착지 모션 하나에 숨어있을 수도 있다는 것까지는, AI가 스스로 의심해보지 않습니다.


파편화된 데이터들을 엮어서 하나의 거대한 맥락을 만들고, 눈에 보이지 않는 사람의 '감정선'과 '욕망'이라는 가장 비합리적인 변수까지 시스템 안에 욱여넣어 판을 짜는 것. 그것은 AI의 차가운 연산 회로가 결코 흉내 낼 수 없는, 오직 인간 기획자만이 가진 고유하고도 뜨거운 통찰의 영역입니다.


우리는 흔히 "나무를 보지 말고 숲을 보라"는 말을 뻔한 격언쯤으로 치부하곤 합니다.

하지만 눈앞에 쏟아지는 업무와 숫자에 치여 매일매일 시야가 좁아지는 우리들에게, 이 말은 남이 짜놓은 게임판에서 벗어나 주체적인 삶을 기획하기 위한 가장 날카로운 생존 지침서입니다.


오늘 당신을 가장 힘들게 했던 그 문제는 과연 독립된 하나의 '점'일까요, 아니면 무언가 단단히 잘못 얽혀있는 거대한 '구조'의 끄트머리일까요? 모니터에서 잠시 눈을 떼고, 당신 삶의 밸런스 시트를 아주 멀리서 줌 아웃(Zoom-out) 해보는 시간을 가져보시길 바랍니다.


다음 화에서는 이렇게 거대하고 촘촘한 구조 속에서도, 완벽한 통제 대신 '불확실성'을 기꺼이 껴안는 태도에 대해 이야기해 보려 합니다. 제가 과거 온라인카지노에도 끄적였던 적 있는 비유이기도 한데요, 주사위를 굴려야만 다음 이야기를 알 수 있는 TRPG(테이블톡 롤플레잉 게임)처럼, 우리 일상의 막막함을 즐거운 축제로 바꾸는 마법에 대해 14화에서 나눠보겠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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