아들과 통화를 하던 중...
아니...
아들이라 주장하는 인물과 통화하면서 내가 한 말이다.
대학에 입학하면서부터 기숙사 생활을 시작한 아들이 어느 날 갑자기 전화를 걸어왔다. 성인이 되어 집을 떠난 자식이 부모에게 전화 거는 행위가 특별할 건 없지만, 이미 이전부터 이메일이나 문자로 소통해 왔기에 전화는 뜬금없다 싶었다.
무엇보다, 그 상황이 낯설게 여겨진 건 목소리 때문이었다.
한 번도 들어본 적 없는, 쇳소리를 연상케 하는 굵은 목소리의 남자가 말을 걸어왔다. 초딩 시절부터 청소년기까지 아들의 목소리에는, 변성기가 있었나 싶을 정도로, 큰 변화가 없었고 그러면서도 서서히 성인의 목소리로 진화해 갔다. 그다지 굵지도 가늘지도 않은 평범한 남성의 목소리로 말이다. 그런데, 이날 수화기 너머 들리는 걸걸한 목소리는 중년 남성을 연상시켰다.
아들의 전화번호로 걸려온 낯선 목소리에 당황하지 않을 수 없었다. 갑작스러운 아들의 전화와 목소리 변화까지 모든 것이 엇박자로 다가왔다.
이쯤 되면 보이스 피싱 사기에 걸린 건가 의심할 만한데, 당시 상황만 놓고 따지면 그렇다 할 수 있다.
하지만, 상황이 그렇다는 소리지, 우리 중 누군가에게 가족인 척하며 사기를 치려면 고도의 기술이 필요하다. 토종 한국 출신으로 사투리를 고수하면서도 해외 거주자답게 외국어를 섞어 쓰는 아빠... 나름 표준어 구사한다고 애쓰는 엄마... 영국에서 나고 자라면서 한국어가 어눌한 아들까지... 이 셋 중 누군가의 어투를 흉내 내면서 집안 사정도 파악하려면 쉽지 않을 테니까.
특유의 어눌하고 느린 한국어 말투를 들어 보니 아들이다 싶었다. 휴대폰에 찍힌 번호도 아들 것이 맞았다.
그렇다고, 이 정도 선에서 100% 안심할 수는 없지. 날로 진화하는 보이스 피싱 기술이 있지 않은가. 1차 테스트는 통과했다만, 이왕 피싱에 속아주는 척하려면 2차 테스트도 진행해야지. 그래서, 앞서 나온 것처럼 질문을 던져보았다.
아들이 대학 입학을 앞두고 고등학생으로서 마지막 여름 방학을 보내고 있을 무렵, 우리 가족은 주말마다 드라마와 영화를 함께 시청했는데 이때 기억을 보이스 피싱 범죄 확인에 활용한 셈이다.
그래서...
상대가 2차 테스트에 통과했냐고?
안타깝게도...
아니다.
정답은 <태양의 후예>인데, 이 녀석은 엉뚱하게 이 보다 앞서 본 드라마인 <사랑의 불시착>을 갖다 대는 것이 아닌가. 나의 갑작스러운 질문에 크게 당황하며 버벅거리다 겨우 생각해 낸 답으로 말이다.
일단 불합격 판정을 내리긴 했다만, 우리가 <사랑의 불시착>을 시청한 건 맞기에 상대에게 보이스 피싱범이라는 죄명은 벗겨주기로 했다. 무엇보다, 연이어 본 드라마 두 편이 하필 모두 군인이 나오고 청춘남녀 주인공이 펼쳐가는 로콤이라는 점에서 둘의 제목을 헷갈렸을 가능성은 있다. 아들의 한국어 수준에서는 '후예'니 '불시착'이니 하는 단어는 상당히 고난도다. 드라마 내용과 연결 지어 기억할 만한 어휘가 아니다.
심사 기준을 억지로 낮춘 덕택에 2차 테스트를 통과했으니 이제 아들이라 불러도 되는 사람에게, '목소리가 왜 그렇냐' 질문했더니 이런 답변이 돌아왔다.
Fresher
* 대학 신입생 (영국 영어)
Fresher's flu
* 대학 신입생이 학기 초에 걸리는 감기
영국 출신은 말할 것도 없고 전 세계에서 몰려드는 유학생까지 수천 명이 한꺼번에 모이는 시기에, 입학식과 각종 환영 행사가 열리고 낯선 환경이 펼쳐지는 과정에서 학생들이 흔하게 걸리는 감기다. 일교차가 심한 계절에 입학식이 열린다는 점도 감기 발병에 한몫한다. 참고로, 영국의 대학 입학 시기는 대체로 9월인데 아들의 학교는 10월 초에 해당한다.
사전적 의미로 대학 신입생 감기지만, Flu라고 했으니 독감에 더 가깝다. 아들의 경우, 일주일간 수업에도 못 들어가고 그토록 좋아하는 운동을 하기는커녕 밥도 먹기 힘들 정도로 심하게 앓고 호되게 병치레를 했다고 한다. 평범한 감기는 아닌 셈이다.
내게 전화한 때는 이미 수업에도 들어가고 스스로 식사를 챙길 만큼 아들이 건강을 회복한 단계지만, 그럼에도 엄마가 정체를 의심할 정도로 목소리가 변해 있지 않았던가.
2년 전 이맘때 일이다.
이제 더 이상, 아들이 집을 떠나 혼자 살면서 외로워하지 않을까... 병에 걸려 고생하지 않을까... 낯선 환경에 적응하느라 힘들어하는 건 아닐까... 걱정할 일은 없다.
차라리...
가족이나 지인을 사칭하는 전화로 보이스 피싱에 노출되지 않을까 걱정하는 편이 나을지도 모른다.
어쩌면, 같이 봤던 영화나 드라마 제목을 맞추라는 건 보이스 피싱 조직에겐 쉬운 테스트일지도 모르겠다. 내 온라인 계정을 해킹해서 그동안 시청한 내역을 조사할 수도 있지 않은가. 범죄 소설을 즐겨 읽다 보니 엉뚱한 상상을 하곤 한다.
다음번에는, 우리 집 강아지 이름을 대라고 할까? (강아지는 없다만)
아니면, 가족과 함께 마지막으로 먹은 집밥 메뉴가 뭐였나 물어볼까?
이도저도 아니면, 아빠 몸무게를 맞추라고 할까?
끝