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7장. 빛을 인간에게 부여하다. 비잔틴 이콘, 1,400년 전의 얼굴
나는 1,400년 전의 얼굴을 찾으러 인터넷으로 여행을 떠난다.
오늘의 목적지는 이집트 시나이반도다. 화면에는 붉은 바위산과 메마른 사막이 펼쳐진다.
푸른 하늘에서는 햇빛이 쏟아진다.
이곳에는 성경에서 모세가 십계명을 받았다고 전해지는 시나이산이 있다.
성경에 따르면 모세가 산에 올랐을 때 천둥과 번개가 치고, 짙은 구름과 불길이 산을 뒤덮었다.
모세는 그곳에서 십계명을 받았다.
그 계명에는 우상을 만들어 숭배하지 말라는 가르침이 있었다.
그런데 모세가 산에서 내려오기도 전에 이스라엘 백성들은 금송아지를 만들어 숭배했다.
분노한 모세는 자신이 받아 온 돌판을 깨뜨렸다. ¹
보이지 않는 신을 믿어야 했던 사람들이 눈에 보이는 형상을 만들어 섬긴 것이다.
오랜 세월이 흘렀다.
6세기 동로마 제국의 유스티니아누스 황제는 이 산기슭에 수도원을 건설하도록 했다.
앞 장에서 살펴본 하기아 소피아를 세운 바로 그 황제다.
붉은 바위산 사이에 성벽으로 둘러싸인 건물이 보인다.
성 카타리나 수도원이다. 그곳에는 특별한 그림 한 점이 남아 있다.
〈그리스도 판토크라토르〉.
약 1,400년 전에 그려진 예수의 얼굴이다. ²
나무판 위에 밀랍과 안료를 사용한 엔코스틱(Encaustic) 기법으로 제작되었다.
크기는 세로 약 84cm, 가로 45.5cm다.
판토크라토르는 그리스어로 '만물의 지배자'라는 뜻이다. ³
나는 화면 속 예수의 얼굴을 자세히 바라본다.
예수는 긴 머리카락과 수염을 기르고 정면을 바라보고 있다.
그런데 얼굴을 자세히 보면 좌우가 완전히 같지 않다.
화면에서 한쪽 얼굴을 가리고 바라보자. 그리고 반대편을 가려 보자.
인상이 달라지지 않는가?
출처: https://commons.wikimedia.org/wiki/File:Spas_vsederzhitel_sinay.jpg
우리가 보는 왼쪽에서는 비교적 부드러운 표정이 느껴진다.
반대편은 눈과 눈썹의 형태, 뺨의 그림자 때문에 상대적으로 엄숙해 보인다.
일부에서는 예수의 인간성과 신성을 나타낸다고 해석한다.
다른 사람들은 자비와 심판이라는 의미를 읽어 낸다.
그러나 화가가 실제로 이러한 뜻을 담았다는 기록은 없다.
분명한 것은 얼굴에 남아 있는 고대 회화의 사실적인 표현이다.
이마와 코, 뺨에는 빛과 그림자가 나타난다. 수염과 머리카락도 섬세하게 그려져 있다.
고대 그리스와 로마의 초상화가 떠오른다.
우리는 흔히 중세 그림이 평면적이고 부자연스럽다고 생각한다.
그러나 초기 비잔틴 미술에는 고대의 사실적인 회화 전통이 살아 있었다.
그런데 예수의 머리 뒤에는 또 다른 것이 있다.
둥근 후광이다.
우리는 하기아 소피아의 거대한 돔을 바라보았다.
비잔틴인은 햇빛과 황금빛 모자이크를 통해 신성한 공간을 표현했다.
그런데 빛은 성당의 높은 곳에만 머물지 않았다.
이번에는 인간의 형상을 한 예수의 머리 뒤에 빛을 그렸다.
얼굴에 드리운 명암은 코와 뺨을 입체적으로 만든다.
반면 후광은 예수가 신성한 존재임을 알려 주는 상징이다. 후광 안에는 십자가도 그려져 있다.
물론 후광은 비잔틴인이 처음 만든 표현은 아니다. 고대 그리스와 로마에서도 신이나 신격화된 인물의 머리 주변에 빛을 표현했다.
기독교 미술은 이러한 전통에 새로운 종교적 의미를 부여했다.
이번에는 손을 보자.
오른손은 축복하는 자세를 취하고 있다. 왼손에는 화려하게 장식된 바카라이 들려 있다.
복음서로 해석되는 바카라이다.
후광과 손짓, 복음서는 예수의 신성함과 권위를 드러낸다.
이처럼 예수와 성모 마리아, 성인 등을 표현한 종교적 이미지를 이콘(Icon)이라고 한다.
그리스어로 '형상'을 뜻하는 에이콘(Eikōn)에서 유래한 말이다.
신자들에게 이콘은 단순한 초상화가 아니었다. 그들은 그림에 표현된 존재를 기억하고 공경하며 기도했다.
나는 다시 예수의 눈을 바라본다.
그는 여전히 정면을 응시하고 있다.
내가 그림을 보는 동안 그도 나를 바라보는 것처럼 느껴진다.
하기아 소피아에서 인간은 빛을 올려다보았다. 시나이의 이콘에서는 그 빛을 두른 얼굴과 마주했다.
그런데 바로 이러한 그림을 없애야 한다고 주장한 사람들이 있었다.
시간을 8세기로 움직여 보자.
동로마 제국에서는 예수와 성인들의 이콘을 둘러싼 갈등이 깊어지고 있었다.
시나이의 그림이 제작된 지 약 200년이 흐른 뒤였다.
모세의 십계명이 다시 떠오른다.
우상을 만들어 숭배하지 말라는 계명.
성상을 반대하는 사람들은 인간이 만든 형상을 공경하는 행위가 우상숭배로 이어질 수 있다고 우려했다.
반면 성상을 옹호하는 사람들은 다른 논리를 제시했다.
기독교에서는 신이 예수 그리스도를 통해 인간의 모습으로 나타났다고 믿는다. 이를 성육신이라고 한다.
보이지 않는 신이 인간의 모습을 취했다면 그 모습을 그림으로 표현할 수도 있다는 주장이었다.
그들은 그림 자체를 신으로 숭배하는 것과 그림에 표현된 존재를 공경하는 것은 다르다고 설명했다.
누군가 평생 기도하던 그림을 없애야 한다고 명령한다면 어떤 마음이었을까?
어떤 사람에게는 신앙을 바로잡는 일이었을 것이다.
다른 사람에게는 믿음을 표현하는 소중한 통로를 잃는 일이었을지도 모른다.
그림을 둘러싼 논쟁에 황제와 교회가 개입했다.
754년 히에리아 공의회에서는 성상파괴를 지지했다.
그러나 787년 제2차 니케아 공의회에서는 성상 공경을 인정했다.
815년 성상파괴 정바카라이 재개되었고, 843년에 이르러 성상 공경이 최종적으로 복원되었다.⁴
성상을 없애려는 사람들도 기독교인이었다.
성상을 지키려는 사람들도 기독교인이었다.
그들은 같은 신을 믿었지만 신성한 존재를 어떻게 표현하고 공경해야 하는지에는 동의하지 못했다.
한 장의 그림에 신앙과 권위가 걸려 있었던 것이다.
843년 성상 공경이 복원되었다.
그리고 867년. 나는 화면을 콘스탄티노폴리스로 옮긴다.
하기아 소피아의 동쪽 후진, 제단 위 반원형 천장에 성모 마리아와 어린 예수의 모자이크가 자리한다.
성모는 화려한 옥좌에 앉아 있고, 어린 예수는 어머니의 무릎 위에 앉아 있다.
두 인물 뒤로 황금빛이 펼쳐진다.
성당에 들어온 신자들은 높은 곳에 자리한 성모와 어린 예수를 올려다보았을 것이다.
당시 콘스탄티노폴리스의 총 대주교 포티오스는 이 모자이크의 봉헌과 관련된 설교를 남겼다.⁵
성상파괴운동 이후 신성한 인물의 이미지가 제국의 대표적인 성당에 다시 자리 잡은 것이다.
다만 이전에도 같은 위치에 동일한 그림이 있었는지는 확인되지 않았다.
돌아온 것은 반드시 옛 그림 한 점은 아니었다.
신성한 존재를 인간의 형상으로 표현하고 공경하는 전통이었다.
이제 신성한 존재의 형상이 다시 성당의 중심에 놓인 것이다.
그런데 몇 세기가 흐른 뒤, 또 다른 후광을 발견한다.
이번에는 황제의 머리 뒤에도 빛이 그려져 있다.
시간은 10세기 무렵으로 이동한다.
하기아 소피아 남서쪽 현관에 남아 있는
〈황제 봉헌 모자이크〉
중앙에는 성모 마리아가 앉아 있고, 무릎 위에는 어린 예수가 있다. 양옆에는 두 황제가 서 있다.
콘스탄티누스와 유스티니아누스다.
콘스탄티누스는 콘스탄티노폴리스를 제국의 새로운 중심지로 만든 황제다.
유스티니아누스는 하기아 소피아를 세운 황제다.
출처: https://commons.wikimedia.org/wiki/File%3AHagia_Sophia_Southwestern_entrance_mosaics.jpg
두 황제의 머리 뒤에도 후광이 있다. 예수의 머리에서 보았던 후광이 황제에게도 있는 것이다.
그러나 후광이 있다고 모두 신이라는 뜻은 아니다.
예수의 십자형 후광은 그리스도의 정체성과 신성함을 나타낸다.
성모의 후광은 거룩함을 나타내며, 황제의 후광은 특별한 통치 권위와 종교적 위상을 드러내는 상징으로 볼 수 있다.
같은 둥근 빛이지만 누구에게 그려졌는가에 따라 의미가 달랐다.
황제들의 손을 보자.
우리가 보는 왼쪽의 유스티니아누스는 돔이 있는 성당의 모형을 들고 있다.
오른쪽의 콘스탄티누스는 성벽으로 둘러싸인 도시의 모형을 들고 있다.
각각 자신이 세운 하기아 소피아와 콘스탄티노폴리스를 성모와 어린 예수에게 바치는 모습이다.⁶
두 황제는 화려한 옷을 입고 후광까지 두르고 있다. 그러나 중앙에 앉아 있는 인물은 황제가 아니다.
성모와 어린 예수다.
황제들은 그들을 향해 몸을 돌리고 자신의 업적을 바친다.
여기서 비잔틴 미술의 위계적 표현을 이해할 수 있다.
위계적 표현은 인물의 실제 크기보다 지위와 중요성을 강조하는 방식이다.
중요한 인물을 크게 그리거나 화면 중앙에 배치하고,
다른 인물의 자세와 행동으로 그 관계를 드러낼 수도 있다.
고대 이집트에서도 파라오를 신하보다 크게 그렸다.
하지만 이 모자이크에서는 크기보다 인물의 위치와 봉헌하는 행동이 중요하다.
후광을 두른 황제조차 신성한 존재에게 자신의 업적을 바친다.
현실의 권력은 황제에게 있었지만, 그림 속 질서의 중심은 신성한 존재였다.
나는 황제들의 후광을 다시 바라본다.
앞서 예수의 얼굴에서 발견한 빛이 이번에는 황제의 권위까지 나타내고 있다.
비잔틴인은 후광과 인물의 배치를 통해 보이지 않는 신성함과 권력의 질서를 눈에 보이게 표현했다.
나는 다시 시나이반도로 돌아간다.
아직 풀리지 않은 질문이 있다.
동로마 제국에서 성상파괴운동이 벌어지는 동안 시나이의 〈그리스도 판토크라토르〉는 어떻게 살아남았을까?
그 무렵 시나이반도는 이미 이슬람 세력의 통치 아래 있었다.
7세기 아랍 세력의 정복 이후 수도원은 동로마 황제의 직접적인 통치에서 벗어났다.
따라서 제국의 성상파괴 정바카라이 이곳에 그대로 적용되지 않았다.
수도원의 외딴 위치와 수도사 공동체의 지속적인 관리도 오래된 이콘의 보존에 도움이 되었을 것으로 여겨진다.⁷
역사는 묘하다.
기독교 제국의 황제들은 한때 예수의 그림을 금지하고 제거하려 했다.
반면 이슬람 통치 아래 있던 시나이의 기독교 수도원에서는 오래된 예수의 얼굴이 살아남았다.
물론 이슬람 통치자들이 이 이콘을 특별히 보호했다는 뜻은 아니다.
이슬람 통치 아래 기독교 공동체가 처한 상황도 시대와 지역에 따라 달랐다.
나는 다시 〈그리스도 판토크라토르〉를 바라본다.
길게 내려온 머리카락과 수염, 서로 다른 인상을 주는 얼굴의 양쪽, 이마와 뺨에 드리운 명암.
그리고 머리 뒤의 후광.
모세가 우상숭배를 금지하는 계명을 받았다고 전해지는 산기슭에, 인간이 그린 예수의 얼굴이 남아 있다.
누군가는 이와 같은 그림을 신성한 존재를 만나는 통로로 여겼다. 다른 누군가는 우상숭배의 위험을 보았다.
그 논쟁 속에서 이콘은 단순한 그림 이상의 의미를 갖게 되었다.
그림이 커진 것이 아니라, 그림에 담긴 의미가 커졌다.
나는 다시 화면 속 예수와 눈을 마주한다.
약 1,400년의 세월이 흘렀지만 그 얼굴은 여전히 정면을 바라보고 있다.
인간은 빛을 두른 신의 얼굴을 그렸다.
그러나 중세인은 신성한 존재의 머리 뒤에 후광을 그리는 데서 멈추지 않았다.
이제 신의 몸 전체를 빛으로 감싸기 시작했다.
다음 여행지는 프랑스 오툉이다.
그곳의 성당 문 위에서 우리는 온몸을 신성한 빛에 둘러싸인 예수와 마주하게 된다.
그리고 그 아래에는 천국과 지옥으로 갈라지는 인간의 운명이 새겨져 있다.
돌에 새겨진 천국과 지옥, 로마네스크 미술과 최후의 심판
1. 모세의 십계명과 금송아지 사건 《성경》, 《출애굽기》 19~20장, 32장.
모세가 시나이산에서 십계명을 받고 이스라엘 백성이 금송아지를 만들어 숭배하자 돌판을 깨뜨리는 사건에 관한 기록이다. 오늘날 성 카타리나 수도원 인근의 산은 전통적으로 성경 속 시나이산과 연결되지만, 역사적 위치가 확정된 것은 아니다.
2. UNESCO World Heritage Centre. “Saint Catherine Area.” World Heritage List, No. 954. Inscribed 2002. https://whc.unesco.org/en/list/954
성 카타리나 수도원은 6세기에 건립되었으며, 초기 기독교 필사본과 비잔틴 이콘을 보존하고 있다. 유네스코는 수도원의 건축과 소장 유산, 지속된 종교적 기능을 세계유산의 주요 가치로 설명한다.
3. McClanan, Anne. “Art and Architecture of Saint Catherine’s Monastery at Mount Sinai.” Smarthistory. https://smarthistory.org/saint-catherines-monastery-sinai/
〈그리스도 판토크라토르〉는 6세기에 제작된 나무판 밀랍화로, 크기는 약 84 × 45.5cm다. 고대 회화의 사실적인 명암 표현이 남아 있으며 축복하는 오른손, 복음서로 해석되는 바카라을 든 왼손, 십자가가 표현된 후광이 특징이다. 얼굴의 좌우 차이를 특정한 신학적 상징으로 해석하는 견해는 있지만 화가의 의도로 확정할 수는 없다.
4. Brooks, Sarah T. “Icons and Iconoclasm in Byzantium.” Heilbrunn Timeline of Art History. New York: The Metropolitan Museum of Art, 2001. Revised August 2009.
https://www.metmuseum.org/essays/icons-and-iconoclasm-in-byzantium
8~9세기 비잔틴의 성상파괴운동은 신성한 이미지의 제작과 공경을 둘러싼 신학적·정치적 갈등이었다. 754년 히에리아 공의회, 787년 제2차 니케아 공의회, 815년 성상파괴 정바카라의 재개, 843년 성상 공경의 복원이 주요 전환점이다.
5. Freeman, Evan. “A Work in Progress: Middle Byzantine Mosaics in Hagia Sophia.” Smarthistory. https://smarthistory.org/middle-byzantine-mosaics-hagia-sophia/
하기아 소피아 동쪽 후진의 성모자 모자이크는 867년 무렵의 작품으로, 총 대주교 포티오스의 봉헌 설교와 연결된다. 성상파괴운동 이후 신성한 인물의 형상이 주요 예배 공간에 다시 등장한 사례다. 과거 동일한 이미지가 같은 자리에 있었는지는 확정되지 않았다.
6. Freeman, Evan. “A Work in Progress: Middle Byzantine Mosaics in Hagia Sophia.” Smarthistory. https://smarthistory.org/middle-byzantine-mosaics-hagia-sophia/
남서쪽 현관의 모자이크에는 성모와 어린 예수를 중심으로 유스티니아누스와 콘스탄티누스가 각각 성당과 도시의 모형을 바치는 모습이 표현되어 있다. 황제의 후광과 봉헌 행위는 비잔틴 미술에서 신성함과 통치 권위의 관계를 보여준다. 작품 연대에는 학술적 견해 차이가 있어 본문은 '10세기 무렵'으로 표기했다.
7. Brooks, Sarah T. “Icons and Iconoclasm in Byzantium.” Heilbrunn Timeline of Art History. New York: The Metropolitan Museum of Art, 2001. Revised August 2009.
https://www.metmuseum.org/essays/icons-and-iconoclasm-in-byzantium
메트로폴리탄 미술관은 성상파괴운동에서 살아남은 드문 초기 비잔틴 이콘의 사례로 시나이 수도원의 회화를 언급한다. 시나이가 동로마 황제의 직접 통치 밖에 있었다는 점은 보존을 설명하는 중요한 역사적 배경이다. 지리적 고립과 수도원의 관리가 어느 정도 영향을 주었는지는 단정하기 어렵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