3부. 인간을 발견하다.

11장. 황소를 뛰어넘은 인간 —미노스문명

by김현준

그림은 AI로 해상도 보정하여 사용함.


그리스 미술을 만나기 전에 먼저 한 섬으로 가보고 싶다.


크레타.


오늘날 그리스에서 가장 큰 섬인 크레타에는 그리스 본토에서 고전문명이 꽃피기 훨씬 전부터 거대한 문명이 존재했다.


우리는 그 문명을 미노스 문명이라고 부른다.


크레타는 지중해의 바닷길 한가운데 놓여 있었다. 북쪽으로는 그리스 본토, 남쪽으로는 이집트, 동쪽으로는 키프로스와 서아시아가 이어졌다. 크레타 사람들은 일찍부터 바다를 통해 이집트와 동지중해 여러 지역과 교류했다. ¹²

물건만 바다를 건넌 것은 아니었을 것이다. 기술과 신앙, 그림과 이야기도 함께 오갔을 것이다.

기원전 1900년경부터 크노소스를 비롯한 여러 지역에 거대한 궁전 중심지가 발달했다. 크노소스 궁전은 중앙 뜰을 중심으로 수많은 방과 창고, 복도와 계단이 복잡하게 이어진 구조였다. ²³

크노소스 사람들에게는 익숙한 궁전이었겠지만, 외부에서 처음 들어온 사람에게는 미궁처럼 느껴졌을 것이다. 훗날 그리스 신화의 라비린토스가 이러한 궁전의 기억과 연결된 것은 아닐까. ²

그리고 이 궁전의 벽에 아주 독특한 그림 하나가 남아 있다.


〈황소의 도약〉


헤라클리온 고고학박물관은 이 작품을 기원전 1450~1400년경으로 보고 있다. ¹ 현재 우리가 보는 모습은 발견된 벽화 파편을 바탕으로 복원된 형태라는 점도 염두에 둘 필요가 있다.


황소가 달린다.

그림을 보는 순간 가장 먼저 눈에 들어오는 것은 황소다.

거대한 황소 한 마리가 화면 대부분을 차지한다.

머리는 앞으로 숙여져 있고, 앞다리는 앞으로, 뒷다리는 뒤로 길게 뻗어 있다.

네 다리가 모두 땅에서 떨어진 것처럼 보인다.

처음에는 달리는 순간을 사진으로 찍어놓은 것 같은 느낌이 든다.

그러나 자세히 보면 실제 황소보다 몸이 길고 다리도 과장되어 있다.

화가는 정확한 모습을 그리려 했다기보다


‘이 황소는 엄청난 속도로 달리고 있다.’


그 느낌을 보여주려 한 것 같다. 나는 순간 라스코 동굴벽화를 떠올렸다.

라스코에서도 거대한 동물이 화면을 압도한다. 하지만 크노소스에서는 다르다.

황소 주위에 세 사람이 있다.

한 사람은 뿔 가까이에 있고, 가운데 사람은 황소 등 위에서 몸을 뒤집고 있다. 또 다른 사람은 뒤쪽에서 두 팔을 내밀고 있다. 박물관은 유사한 황소도약 장면이 다른 벽화와 소형 유물에서도 반복된다는 점을 들어 실제 곡예나 의식과 연결되었을 가능성을 설명한다. ¹

축제였을까. 종교의식이었을까.

아니면 젊은 사람들의 용기와 신체 능력을 보여주는 공연이었을까.

정확히 알기는 어렵다.


그러나 사람들의 몸은 분명하게 보인다.

짧은 허리천, 잘록한 허리, 단단한 허벅지, 길게 뻗은 팔과 다리.

특히 황소 위에서 몸을 뒤집는 사람의 몸은 거의 활처럼 휘어 있다.

옷보다 몸이 보인다. 신분보다 동작이 보인다. 인간의 몸이 무엇을 할 수 있는가가 먼저 눈에 들어온다.

라스코에서 인간은 거대한 자연을 바라본다.
크노소스에서 인간은 그 힘 속으로 뛰어든다.


이집트와 닮았지만 다르다.

이 작품이 만들어진 무렵 이집트에서는 신왕국이 번성하고 있었다.

크레타와 이집트는 바다를 통해 지속적으로 교류했다. ²³

그래서인지 〈황소의 도약〉에는 이집트 미술을 떠올리게 하는 표현도 보인다.

대표적인 것이 피부색이다.

전통적으로 적갈색으로 표현된 인물은 남성, 밝은 피부의 인물은 여성으로 해석되어 왔다. ¹ 이와 비슷한 색채 관습은 고대 이집트 미술에서도 확인된다.


하지만 그림 전체의 느낌은 전혀 다르다.

이집트 미술에서 인간은 일정한 규칙 안에 있었다.

얼굴은 옆으로, 눈과 어깨는 가장 잘 보이는 방향으로 표현했다.

한순간의 실제 모습보다 그 사람이 어떤 모습인지 최대한 분명하게 보여주는 것이 중요했다.

그래서 이집트 미술에서는 모든 것이 정리되어 있는 듯하다.


그러나 크노소스에서는 사람이 움직인다.

달리고, 몸을 굽히고, 허리를 꺾고, 공중으로 뛰어오른다.

이집트의 복합시각이 인간의 형태를 정리했다면, 크레타는 그 형태에 움직임을 넣었다.


왜 황소를 뛰어넘었을까.

황소는 미노스 세계에서 반복적으로 등장하는 중요한 이미지였다. 황소는 힘과 풍요를 상징했고, 크노소스의 권위와 종교적 이념, 제의적 세계와도 연결되어 있었다. ¹⁴


그런데 그림 속 사람들은 황소 앞에 엎드리지 않는다.

도망가지도 않는다. 그렇다고 황소를 죽이려 하지도 않는다.

사람은 오히려 황소에게 달려든다. 몸을 날리고, 거대한 등을 뛰어넘는다.

황소의 힘을 없애려는 것이 아니다.

그 힘을 이용한다.

마치 이렇게 말하는 것 같다. 우리는 저 힘을 두려워하지 않는다.

우리는 저 힘과 함께 움직일 수 있다. 처음에는 황소가 보였는데 오래 바라보면 점점 인간이 보인다.

황소의 힘보다 인간의 용기가 보인다.


그런데 작품의 제작연도를 다시 보면 또 다른 의문이 생긴다.

기원전 1450년 무렵 크레타의 여러 궁전 중심지가 파괴되었고, 이후 크레타에서 미케네계 그리스인의 영향력이 크게 확대되었다. ²³


〈황소의 도약〉은 바로 그 변화가 일어나던 시기의 작품이다. ¹

그리고 훗날 그리스인들은 크레타에 대한 아주 이상한 이야기를 남긴다.


미노타우로스.


황소 머리를 한 괴물, 미궁, 테세우스, 아리아드네의 실.


아폴로도로스의 전승에서 테세우스는 미궁으로 들어가 미노타우로스를 죽이고, 아리아드네가 건넨 실의 도움을 받아 밖으로 빠져나온다.⁵ 플루타르코스 역시 테세우스와 아리아드네에 관한 여러 서로 다른 전승을 기록한다.⁶


그렇다면 한 가지 질문을 던져볼 수 있지 않을까.

우리가 알고 있는 미노타우로스 이야기는 처음부터 지금과 같은 모습이었을까.


여기서부터는 나의 상상이다.

지금부터의 이야기는 역사적 사실이 아니다.

신화에서 황소의 머리를 벗겨내고 그 자리에 인간의 얼굴을 놓아보려 한다.

플루타르코스의 전승 가운데에는 미노스의 장군 ‘타우로스’라는 인간이 등장하는 이야기도 전해진다.⁶ 물론 이것이 곧 미노타우로스의 역사적 실체였다는 뜻은 아니다.

다만 이러한 다양한 전승을 바라보며 상상해 본다. 만약 미노타우로스가 괴물이 아니었다면 어떨까.

미노스 왕의 아들이었다면.

전쟁에 능했고, 황소처럼 강했으며, 사람들이 두려워했던 왕자.

그래서 사람들이 그를 ‘황소의 왕자’라고 불렀다면.


오랜 시간이 지나면서 황소의 왕자가

황소 머리를 가진 괴물이 되어버린 것은 아닐까.

미노스 왕에게는 딸도 있었다.


아리아드네.


어린 시절 남매는 크노소스의 복도를 함께 뛰어다녔다.

미노타우로스는 높은 담 위에서 누이에게 손을 내밀었고, 아리아드네는 항구로 먼저 뛰어가 들어오는 배를 알려주었다.


둘은 같은 바다를 보며 자랐다. 그러나 자라면서 서로 다른 미래를 보기 시작했다.

미노타우로스는 힘을 원했다.

더 많은 병사, 더 큰 군함, 더 많은 조공.


아리아드네는 바다를 보았다.

배와 무역, 항구와 교역.

크레타의 힘은 군대보다 바다에서 나온다고 믿었다.

남매는 같은 나라를 사랑했다. 다만 사랑하는 방법이 달랐다.


미노스 왕은 아들에게 왕위를 물려주려 했다.

아리아드네가 물었다.


“왜 저는 안 됩니까?”


왕은 짧게 말했다.


“너는 여자다.”


그것으로 끝이었다. 아리아드네는 궁전의 길을 누구보다 잘 알고 있었다.

어느 문이 왕의 방으로 이어지는지, 어느 계단이 창고로 내려가는지,

어느 시간에 경비가 바뀌는지 알고 있었다.


그러나 그녀가 가장 잘 아는 것은 바다였다.

별을 보고 방향을 잡는 법을 배웠고, 바람과 파도의 변화를 읽었다.

암초가 숨은 곳도 알아봤다.


미노스 왕은 딸에게 왕위를 주지 않았다. 하지만 바다는 그녀가 여자라고 해서 길을 막지 않았다.

그 무렵 아테네의 왕자 테세우스가 크레타로 들어왔다.

크노소스 사람들에게 궁전은 익숙한 공간이었지만, 테세우스에게는 미궁이었다.

그날 그는 알았다.

크노소스의 가장 높은 성벽은 돌이 아니라 길이라는 것을.


그리고 그곳에서 아리아드네를 만난다.

처음에는 서로를 경계했다.

적국의 왕자, 적국 왕의 딸.


하지만 두 사람은 조금씩 말을 나누기 시작했다.

어느 날 아리아드네가 물었다.


“왜 아테네 사람들은 크레타를 그렇게 미워하나요?”


테세우스가 말했다.


“당신들에게 조공은 세금일 겁니다.”


그가 그녀를 바라봤다.


“우리에게는 굴욕입니다.”


그날 밤 아리아드네는 잠들지 못했다.

자신이 자랑스럽게 생각했던 크레타의 힘이 누군가에게는 공포였다는 것을 처음 생각했다.


그러나 동생을 배신할 수는 없었다.

미노타우로스는 여전히 어린 시절 자신의 손을 잡아주던 동생이었다.

하지만 왕위가 가까워지자 그는 달라졌다.

자신에게 반대하는 사람들을 잡아들이기 시작했다.


아리아드네가 말했다.


“그들을 풀어줘.”


미노타우로스는 고개를 저었다.


“누이는 아직도 세상이 말로 움직인다고 생각하나?”


“사람을 두려움으로 다스릴 수는 없어.”


“미움받는 것보다 두려움 받는 편이 낫다.”


그날 남매 사이의 마지막 길이 끊어졌다.

며칠 뒤 테세우스가 말했다.


“당신이 왕이 되십시오.”


“당신은 이 나라의 볼모예요.”


“지금은 그렇습니다.”


그는 아테네로 돌아가면 조공 대신 정당한 교역의 대가를 지불하겠다고 약속한다.

전쟁 대신 바다, 볼모 대신 계약, 아리아드네가 꿈꾸던 나라였다.


“하지만 내가 어떻게 왕이 되죠?”


테세우스가 말했다.


“미노타우로스가 없어져야 합니다.”


아리아드네의 얼굴이 굳었다.


“내 동생을 죽이라는 말이에요?”


“내가 하겠습니다.”


“그게 무슨 차이죠?”


테세우스는 잠시 말이 없었다.


“그에게 갈 수만 있다면 끝낼 수 있습니다.”


아리아드네가 그를 바라봤다.


“당신은 그가 어디에 있는지도 모르잖아요.”


테세우스가 말했다.


“당신은 알고 있잖습니까.”


며칠 뒤 아리아드네가 테세우스를 찾아왔다.

손에는 실이 없었다. 작은 점토판 하나가 있었다.


“첫 번째 문에는 경비가 두 명이예요.”


“자정이 지나면 한 명이 사라져요.”


“여기서는 왼쪽으로 가지 마세요.”


“열다섯 번째 문.”


테세우스가 물었다.


“그곳입니까?”


아리아드네가 고개를 끄덕였다. 이것이 그녀가 건넨 실이었다.

실 한 타래가 아니었다.

길, 시간, 문, 경비병, 왕실의 비밀.

그리고 자신이 선택한 미래.


그날 밤 테세우스는 궁전 안으로 들어갔다.

열다섯 번째 문이 열렸다.

그곳에는 황소 머리 괴물이 없었다. 한 남자가 있었다.


미노타우로스.


“누가 길을 알려주었지?”


테세우스는 대답하지 않았다. 왕자의 눈빛이 달라졌다.


“아리아드네인가.”


침묵.


“내 누이가.”


싸움이 시작됐다. 그리고 미노타우로스가 쓰러졌다.


“누이에게…”


그는 끝내 말을 마치지 못했다. 괴물이 죽은 것이 아니었다.

어린 시절 누이에게 손을 내밀던 아이가 죽었다.

한 여자의 동생이 죽었다. 한 왕국의 후계자가 죽었다.


아리아드네는 테세우스의 얼굴을 보는 순간 모든 것을 알았다.

그래도 울 시간은 없었다. 병사들의 발소리가 가까워졌다.

테세우스가 손을 내밀었다.


“가야 합니다.”


아리아드네는 그 손을 바라봤다. 잡는 순간 예전으로 돌아갈 수 없다.

그래도 잡았다. 둘은 달렸다.

그날 처음으로 아리아드네에게도 크노소스가 미궁이 되었다.


바다의 미궁

항구 끝에 작은 범선 한 척이 묶여 있었다.

선원은 없었다. 둘 뿐이었다.

아리아드네가 돛을 펼쳤다.


“키를 잡아요.”


테세우스가 물었다.


“왕녀가 배도 몹니까?”


아리아드네가 말했다.


“크레타의 왕녀예요.”


잠시 뒤 뒤쪽 바다에서 미노스의 군함들이 나타났다.

아리아드네는 하늘을 보고, 바다를 보고, 파도를 읽었다.


“왼쪽!”


앞쪽 바다에서 흰 포말이 둥글게 돌고 있었다.


“회오리잖아요.”


“알아요.”


“저기로 들어가겠다고요?”


“큰 군함은 못 들어와요.”


“우리도 죽을 수 있습니다.”


아리아드네가 그를 바라봤다.


“나를 믿어요?”


“믿겠습니다.”


“그럼 내가 말하는 대로만 해요.”


배가 회오리 속으로 들어갔다. 아리아드네는 두려워하는 것이 아니었다.

읽고 있었다.

바람, 파도, 소용돌이, 그 사이에 잠깐 열리는 길.

작은 배는 가까스로 회오리를 빠져나갔다. 그러나 암초에 부딪혀 선체가 갈라졌다.

아리아드네는 끊어진 돛줄을 다시 묶었다.

그리고 계속 바다를 읽었다. 마침내 멀리 섬이 보였다.


“낙소스!”


배가 해변에 닿는 순간 뒤쪽 선체가 무너졌다. 둘은 모래 위에 쓰러졌다.

테세우스가 물었다.


“당신은 대체 못하는 게 뭡니까?”


아리아드네가 웃었다.


“사랑.”


그때까지만 해도 둘은 그 말의 의미를 몰랐다. 크노소스의 미궁에서 길을 찾은 것도 아리아드네였다.

바다의 미궁에서 길을 찾은 것도 아리아드네였다. 아리아드네 자신이 길이었다.


돌아오겠다는 약속.

배는 반파되어 있었다. 둘은 작은 뗏목 하나를 만들었다.

아리아드네가 말했다.


“같이 가요.”


테세우스가 고개를 저었다.


“안 됩니다.”


“나는 당신보다 바다를 더 잘 알아요.”


“그래서 더 안 됩니다.”


“왜요?”


“여기까지 당신이 나를 살렸습니다.”


테세우스가 말했다.


“이번에는 내가 당신을 지키게 해 줘요.”


그는 혼자 아테네로 가 함대를 이끌고 돌아오겠다고 약속했다.

그리고 말했다.


“당신과 결혼하겠습니다.”


“두 왕국을 전쟁이 아니라 바다로 잇는 겁니다.”


그날 밤 둘은 마지막 남은 포도주를 나누어 마셨다.

밤이 깊어지고, 어느새 동쪽 하늘이 붉어지기 시작했다.

아리아드네가 물었다.


“다음 해돋이는 어디에서 볼까요?”


“아테네.”


“둘이서?”


테세우스가 그녀를 바라보았다.


“부부로.”


두 사람의 입술이 맞닿았다.

그리고 아침이 밝았다. 테세우스가 뗏목을 바다로 밀었다.


“잠시만요.”


아리아드네가 그를 불러 세웠다.

그녀는 잠시 망설이더니 입고 있던 검은 드레스를 벗었다. 그리고 천을 길게 펼쳐 돛대에 묶기 시작했다.

바람이 불었다.

검은 천이 크게 부풀어 올랐다.


“이 돛이 당신을 아테네로 데려다줄 거예요.”


테세우스가 검은 돛을 올려다보았다.

아리아드네는 한동안 그를 바라보다 물었다.


“아테네에 도착하면…… 저를 기억할 건가요?”


테세우스가 웃었다.


“기억만 하겠소?”


그가 아리아드네의 손을 잡았다.


“배들을 이끌고 돌아오겠소.”


“정말인가요?”


“아테네의 왕자 이름을 걸고.”


아리아드네가 웃었다.


“얼마나 기다리면 돼요?”


“빠르면 일주일.”


“늦으면?”


테세우스가 잠시 생각했다.


“한 달.”


“약속?”


“약속.”


아리아드네가 손을 놓았다.

뗏목이 천천히 바다로 나아갔다. 검은 돛이 바람을 가득 머금었다.

테세우스는 몇 번이나 뒤를 돌아보았다.

아리아드네도 손을 흔들었다.

검은 돛은 점점 작아졌다. 마침내 수평선 너머로 사라졌다.

그때 테세우스는 몰랐다.

아리아드네가 만들어준 그 검은 돛이 훗날 또 하나의 비극을 부르게 되리라는 것을.

아리아드네는 기다렸다.

사흘.

닷새.

일주일.

아침마다 언덕에 올라 바다를 바라보았다.

보름.

스무날.

한 달.

배는 오지 않았다.


어느 순간부터 날짜를 세지 않았다.

그러나 바다를 바라보는 일만은 그만두지 못했다.

바람이 나빴을 것이다.

뗏목이 부서졌을지도 모른다.

아테네까지 가는 데 생각보다 오래 걸렸을 것이다.

왕을 설득해야 했을지도 모른다.

함대를 준비하는 데 시간이 필요한 것일 수도 있었다.

아리아드네는 가능한 이유를 하나씩 만들어냈다.

그러나 단 하나의 가능성만은 생각하지 않았다.


아니,

생각할 수 없었다.


그가 무사히 아테네에 도착했고, 그럼에도 돌아오지 않는다는 것.

테세우스가 자신을 버렸다는 것.


어느 날 아리아드네는 둘이 마지막으로 키스했던 자리에 앉았다.

바다 위로 태양이 떠오르고 있었다.

그녀가 아주 작은 목소리로 말했다.


“안 오는구나.”


정말 자신을 버린 것인지 알 수 없었다. 그래서 더 아팠다.

바람은 읽을 수 있었다. 파도도 읽을 수 있었다. 궁전의 길도 읽을 수 있었다.

그러나 한 사람의 마음만은 끝내 읽지 못했다.


크노소스의 미궁에서는 나가는 길을 알고 있었다. 바다의 회오리에서도 길을 찾아냈다.

그러나 기다림이라는 미궁에서는 어느 길로 나가야 하는지 알 수 없었다.


누가 괴물을 만들었을까.

세월이 흐른다.

왕자는 황소 머리를 가진 괴물이 된다. 복잡한 크노소스 궁전은 미궁이 된다.

아리아드네가 알려준 길은 한 타래의 실이 된다.

왕자를 죽인 테세우스는 괴물을 물리친 영웅이 된다.

왕자는 괴물이 되었다. 테세우스는 영웅이 되었다.


누가 그 이야기를 남겼는지는 알 수 없다. 물론 이것은 역사적 사실이 아니다.

오래된 신화와 크노소스의 그림 사이에 놓아본 하나의 상상일 뿐이다.


다시 〈황소의 도약〉을 바라본다.

거대한 황소가 달리고 있다. 인간은 그 앞에서 도망치지 않는다.

오히려 몸을 날려 황소를 뛰어넘는다.

이 작품을 미케네인의 승전 그림으로 볼 직접적인 증거는 없다. ¹²³

그러나 훗날 새로운 지배자들이 이 그림을 바라봤다면 어떻게 읽었을까.


황소가 크레타의 힘이었다면, 황소를 뛰어넘는 인간은 새로운 시대의 사람들에게 이렇게 보이지 않았을까.


우리가 황소를 넘어섰다.


그러나 나는 이 그림에서 그보다 더 큰 변화를 본다.

처음에는 황소가 보였다. 오래 바라보니 인간이 보였다.

몸을 낮추고, 달리고, 팔을 뻗고, 공중으로 몸을 날리는 인간.

아직 신은 사라지지 않았다.

황소 역시 종교적이고 상징적인 의미를 지닌 존재였다. ¹⁴


그러나 이 작품에서 인간의 몸은 놀라울 만큼 적극적으로 움직인다.

그리고 이후 에게해와 그리스 미술에서는 인간의 신체와 움직임에 대한 관심이 더욱 중요한 주제로 발전한다. ³


황소는 여전히 힘차게 달리고 있다.

그리고 인간은 그 거대한 힘 앞에서 물러서지 않는다.


이집트에서 인간은 질서 속에 있었다.
크레타에서 인간은 그 자리에서 뛰어올랐다.


처음에는 황소가 보였다.
오래 바라보니 인간이 보였다.
신과 자연의 뒤에 있던 인간이
조금씩 그림의 앞으로 걸어 나오고 있었다.
이제 인간은 인간으로 주인공이 되기 시작했다.
다음은 테세우스의 고향, 아테네로 가보자.


1. Heraklion Archaeological Museum. “The Bull-Leaping Fresco.”
〈황소의 도약〉의 제작연대와 인물 구성, 황소도약의 성격, 황소의 상징적 의미를 참고하였다.

2. UNESCO World Heritage Centre. “Minoan Palatial Centres.” World Heritage List.
미노스 궁전 중심지의 구조와 기능, 해상교류, 크노소스의 복잡한 공간구성과 미궁 전승의 배경을 참고하였다.

3. Hood, Sinclair. The Arts in Prehistoric Greece. Pelican History of Art. Harmondsworth: Penguin Books, 1978. Reprint, New Haven: Yale University Press, 1992.
미노스와 미케네 미술 및 에게해 청동기 미술의 전체 흐름을 참고하였다.

4. Marinatos, Nanno. Minoan Religion: Ritual, Image, and Symbol. Columbia: University of South Carolina Press, 1993.
미노스 문명의 황소와 관련된 제의, 왕권과 종교적 상징에 관한 연구를 참고하였다.

5. Apollodorus. The Library. Translated by James George Frazer. Loeb Classical Library. Cambridge, MA: Harvard University Press, 1921. Epitome 1.7–9.
테세우스, 미노타우로스, 아리아드네의 실과 미궁 탈출에 관한 기본 신화 전승을 참고하였다.

6. Plutarch. Lives, vol. 1. Translated by Bernadotte Perrin. Loeb Classical Library. Cambridge, MA: Harvard University Press, 1914. “Theseus,” 19–20.
테세우스와 아리아드네에 관한 여러 전승 및 인간 ‘타우로스’가 등장하는 변형 전승을 참고하였다.

월요일 연재
이전 10화2부. 보이지 않는 세계를 그리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