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부. 인간은 그림을 그리기 시작했다.

2장 움직이는 극장, 라스코 동굴

by김현준

왜 사람들은 굳이 어두운 동굴 깊숙한 곳에 그림을 그렸을까.

프랑스 남서부 도르도뉴의 라스코 동굴에는 말, 사슴, 들소, 오록스 같은 수많은 동물 그림이 남아 있다.
라스코의 정확한 연대는 오랫동안 논쟁되어 왔지만,
최근 연구에서는 동굴 이용 흔적을 약 2만 1천 년 전 무렵으로 보기도 한다. ¹


나는 그림보다 먼저 그 그림이 있는 장소에 눈이 간다.

왜 하필 동굴이었을까.

햇빛이 드는 바위에도 그릴 수 있었을 것이다.

사람들이 생활하는 곳 가까이에 그릴 수도 있었을 것이다.

그런데 사람들은 어둠 속으로 들어갔다.

빛이 거의 닿지 않는 곳까지.

그곳에 들어가기 위해서는 불이 필요했을 것이다.


나는 여기서 한 장면을 상상해 본다.

여기서부터는 역사적 사실이 아니라 나의 상상이다.

한 남자와 한 여인이 동굴 안으로 들어간다.

남자의 손에는 횃불이 들려 있다.

한 걸음, 또 한 걸음.

밖에서 들어오던 빛은 점점 작아지고, 공기는 서늘해진다.

불꽃이 흔들린다.

두 사람의 그림자가 벽 위에서 커졌다 작아진다.


남자가 횃불을 들어 올린다.

어둠 속에서 검은 말 한 마리가 나타난다.

조금 옆에는 사슴이 있다.

불빛이 흔들릴 때마다 말도 움직이는 것처럼 보인다.


남자가 조용히 말한다.

“우리 사람들은 오래전부터 저들을 따라다녔어.”

여인은 말없이 그림을 바라본다.

두 사람은 다시 안쪽으로 걸어간다.

불빛이 벽을 떠나는 순간 말과 사슴도 어둠 속으로 사라진다.


몇 걸음 뒤,

남자가 횃불을 높이 든다.

순간 거대한 형체 하나가 어둠 속에서 모습을 드러낸다.

오록스다.

커다란 뿔, 두꺼운 목, 거대한 어깨.

그런데 평평한 그림처럼 보이지 않는다.

라스코의 화가들은 동굴 벽의 형태와 성질을 고려해 그림과 새김의 방식을 달리했고,

동굴의 구조 자체가 벽화의 위치와 구성에 중요한 영향을 주었다. ²


나는 그 바위의 굴곡이 오록스의 어깨가 되고, 등이 되고, 근육이 되는 모습을 상상한다.

불꽃이 흔들린다.

빛이 움직이면 그림자도 따라 움직인다.

오록스의 몸이 조금씩 살아나는 것처럼 보인다.

정지된 그림이 움직이는 순간이다.


두 사람은 한동안 말이 없다.

남자가 여인의 손을 잡는다.

“저 힘을 기억해.”

여인이 오록스를 올려다본다.

불꽃이 흔들리자 두 사람의 그림자가 오록스 아래에서 하나로 겹쳐진다.

남자는 천천히 여인의 이마에 입을 맞춘다.

어쩌면 누군가는 이런 그림 앞에서 사랑을 약속했을지도 모른다.

함께 살아가겠다고, 서로를 지키겠다고, 자신들이 믿는 힘과 이야기를

다음 세대로 이어가겠다고.

물론 라스코에서 실제로 사랑의 맹세가 이루어졌다는 증거는 없다.

이 장면은 나의 상상이다.


하지만 나는 그림의 역사 속에 사냥과 죽음만 있었으리라고 생각하고 싶지 않다.

그곳에도 사람이 있었다.

두려워하는 사람.

기억하는 사람.

이야기하는 사람.

그리고 누군가를 사랑하는 사람.


다시 동굴을 바라본다.

라스코의 그림들은 무작위로 한꺼번에 그려진 것이 아니다.

연구자들은 여러 그림이 겹쳐진 순서를 분석해 말, 오록스, 사슴 등이 일정한 제작 순서를 보이는 사례를

확인했고, 동굴 전체의 이미지 구성에서도 상당한 일관성이 있었다고 본다. ³


그렇다면 그림을 보는 경험에도 어떤 순서가 있었던 것은 아닐까.

횃불이 한쪽 벽을 비춘다.

동물이 나타난다.

불빛을 다른 곳으로 옮긴다.

그 동물은 다시 어둠 속으로 사라진다.

몇 걸음 앞으로 간다.

다른 벽에 불을 비춘다.

새로운 그림이 나타난다.

장면이 바뀐다.


문득 오늘날의 영화가 떠오른다.

횃불은 영사기가 되고, 동굴 벽은 스크린이 된다.

여기에 소리가 더해진다.

발소리, 숨소리, 벽에 부딪혀 돌아오는 목소리.

누군가 그림 앞에서 이야기를 시작했다면
그 목소리는 어둠 속에서 더 크고 신비롭게 들렸을지도 모른다.

빛, 그림, 움직임, 소리, 그리고 이야기.


그렇다면 라스코에서
사람들은 무엇을 경험했을까.

거대한 오록스의 힘이었을까.

사냥의 두려움이었을까.

자연에 대한 경외였을까.

조상들의 이야기였을까.

사랑과 약속의 순간도 있었을까.

아니면 우리가 이제는 이해할 수 없는 어떤 믿음이었을까.


우리는 모른다.

2만 년 전의 목소리는 사라졌다.

그날의 불도 꺼졌다.

그들이 나누었던 이야기도 사라졌다.

하지만 그림은 남았다.

그래서 나는 라스코를 바라볼 때 벽화만 보지 않으려 한다.

그 그림 앞에 서 있었을 사람들.

그들이 들고 있던 불빛.

동굴 안을 채웠을 목소리.

그리고 서로에게 들려주었을 이야기까지 함께 떠올려본다.


라스코의 놀라움은 그림이 오래되었다는 데만 있지 않다.

그림을 경험하는 방식이 놀랍도록 현대적으로 느껴진다는 데 있다.

어쩌면 인간은 아주 오래전부터 그림을 단순히 보는 데서 멈추지 않고,

빛과 소리와 이야기 속에서 경험하고 있었는지도 모른다.

그렇다면 라스코 동굴은 단순한 그림 보관소가 아니었다.

어쩌면 아주 오래전 인간이 만든 움직이는 극장이었는지도 모른다.



1. Aujoulat, Norbert. Lascaux, le geste, l’espace et le temps. Paris: Seuil, 2004.
라스코의 벽면 굴곡과 동굴 구조, 그림의 위치와 제작 행위를 분석한 핵심 연구서다. 이 글에서 바위 자체가 동물의 몸을 만드는 데 활용되고, 동굴 공간 전체가 그림의 경험에 영향을 주었을 가능성을 생각하는 데 중요한 근거가 된다.

2. Leroi-Gourhan, André. Préhistoire de l’art occidental. Paris: Mazenod, 1965.
선사시대 동굴미술의 동물 배치와 상징 구조를 체계적으로 해석한 고전이다. 동굴 속 동물들이 단순히 무작위로 배치된 것이 아니라 일정한 구조와 의미 관계를 가졌을 가능성을 생각하게 한다. 다만 그의 구조주의적 해석은 이후 수정과 비판을 받아왔다는 점을 전제로 참고했다.

3. France. Ministère de la Culture. La grotte de Lascaux.

라스코의 연대, 동굴 구조, 벽화의 위치, 제작 순서와 재료 등을 확인할 수 있는 공식 연구 자료다. 이 글의 약 2만 년 전이라는 시대적 배경, 동굴 공간의 활용, 말·오록스·사슴 등의 제작 순서와 관련된 사실적 배경을 확인하는 데 활용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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