Chapter 1. 소년에 관하여
“태윤이가 예전에 네 얘기 한 적은 있어.”
종규가 말했다.
숟가락이 국그릇 위에서 멈췄다.
“내 얘기?”
“어.”
“뭐라고?”
종규는 깍두기를 하나 집어 먹었다.
“중학교 때 생각했던 너랑 좀 달랐다고.”
“내가 무슨 애였는데?”
종규가 나를 한번 보더니 물컵을 들었다.
“글쎄.”
“네가 말을 꺼냈잖아.”
“밥이나 먹어.”
녀석은 정말 다시 밥을 먹었다.
나는 숟가락을 든 채 그대로 있었다.
중학교 때의 나.
그때 나는 이마를 면도칼로 밀고 다녔다.
《슬램덩크》의 강백호 때문이었다. 강백호의 반듯한 헤어라인이 멋있어 보였다. 거울 앞에서 한쪽을 밀면 반대쪽이 기울어 보였고, 거기에 맞춰 다시 밀면 처음 민 쪽이 올라가 보였다. 조금씩 고치다 보면 이마가 점점 넓어졌다.
그래도 일자면 됐다.
태윤이는 볼 때마다 그걸 놀렸다.
“너 아직도 일자 이마네.”
“강백호가 원래 일자잖아.”
“걔는 원래 그런 거고.”
태윤이가 손가락으로 내 이마를 가리켰다.
“너는 공사한 거잖아.”
“똑같잖아.”
“뭐가 똑같아.”
녀석이 웃기 시작했다. 태윤이는 한번 웃으면 쉽게 멈추지 못했다. 고개를 숙이고 웃다가 다시 내 얼굴을 보면 또 터졌다.
“아, 씨. 그만 웃어.”
“너무 반듯하잖아.”
“이게 멋있는 거야.”
방 한쪽에서 문제집을 풀던 종규가 말했다.
“그건 아닌 것 같은데.”
“너는 공부나 해.”
“하고 있는데.”
한우가 농구공을 들었다.
“나갈래?”
우리 넷은 거의 동시에 일어났다.
그 무렵에는 농구를 하지 않는 남자애를 찾기가 더 어려웠다. TV에서는 농구대잔치가 나왔고, 《슬램덩크》는 교실을 한 바퀴씩 돌았다. 쉬는 시간이면 휴지통도 골대가 됐고, 흰 실내화에는 볼펜으로 그린 나이키 마크가 여기저기 붙어 있었다.
내 실내화에는 마이클 조던도 있었다. 공을 한 손에 들고 날아오르는 모습을 그린 것이었는데, 지금 다시 보라고 하면 사람인지 새인지 구별하기 어려웠을 것이다.
그래도 내 눈에는 조던이었다.
옷에도 꽤 신경을 썼다. 학원에 가는 날에도 옷장을 몇 번씩 열었고, 머리가 마음에 들지 않으면 물을 묻혀 다시 만졌다.
그러면서 이마는 면도칼로 밀었다.
어느 날 학원을 마치고 태윤이와 계단을 내려가고 있었다.
“야.”
“왜.”
“윤정이가 너 물어보던데.”
한 계단을 내려가던 발이 멈췄다.
“채윤정?”
“어.”
채윤정은 학원에서 제일 예쁜 여자애를 꼽으라고 하면 남자애들 입에서 빠지지 않던 이름이었다. 태윤이는 아무렇지도 않게 계속 계단을 내려갔다.
“뭐를?”
“너 어떤 애냐고.”
“나를?”
태윤이가 두 계단 아래에서 돌아봤다.
“너 말고 준경이가 또 있냐?”
얼른 따라 내려갔다.
“왜 물어봤대?”
“내가 어떻게 알아.”
“그래서 뭐라고 했는데?”
“그냥 친구라고 했지.”
나는 그대로 태윤이를 봤다.
녀석이 다시 한 층쯤 내려가다가 말했다.
“아, 너 노이즈 멤버 누구 닮았다고 웃더라.”
“진짜?”
목소리가 생각보다 크게 나왔다. 아래층에 있던 여자애 하나가 뒤를 돌아봤다.
태윤이가 피식 웃었다.
“목소리 봐라.”
“뭐.”
“좋냐?”
“뭐가 좋아.”
“얼굴은 좋아 죽겠는데.”
“아니거든.”
1층 유리문을 밀고 나왔다. 문에 내 모습이 비쳤다. 나는 지나가다가 머리를 한번 쓸어 올렸다.
뒤에서 태윤이가 말했다.
“뭐 하냐?”
“아무것도.”
“노이즈 찾냐?”
“닥쳐.”
태윤이가 웃었다.
나도 웃었다.
태윤이 방바닥에는 《슬램덩크》가 여기저기 펼쳐져 있었다. 종규는 구석에서 문제집을 풀고 있었고, 한우는 농구공을 손가락 위에 올려놓았다가 세 번째 떨어뜨렸다.
카세트에서는 처음 듣는 노래가 나오고 있었다. 태윤이가 테이프 케이스를 내 쪽으로 던졌다.
받아서 뒤를 훑었다.
N.EX.T.
곡 제목 하나가 눈에 들어왔다.
“호프?”
종규가 말했다.
“희망.”
“알아.”
종규가 고개를 들었다.
“방금 몰랐잖아.”
“됐어. 나가자.”
한우가 기다렸다는 듯 농구공을 집었다.
나는 먼저 현관으로 걸어갔다.
태윤이가 뒤에서 말했다.
“야, 공은 누가 들고가냐.”
“한우.”
“왜 나냐, 가져와.”
우리는 우르르 방을 빠져나갔다.
현관문이 닫혔다.
노래도 끊겼다.
에이스 학원 애들과 경기한 날에는 만 원이 걸려 있었다.
우리에게 만 원은 꽤 큰돈이었다.
다리 밑 농구장에 도착했을 때 상대 애들은 이미 몸을 풀고 있었다. 특히 한 녀석의 드리블이 빨랐다. 공을 낮게 튀기며 다리 사이로 바꾸는 걸 보고 있자니 괜히 입안이 말랐다.
“너 먼저 들어가.”
한우가 말했다.
“나 조금 있다가.”
태윤이가 내 얼굴을 봤다.
“쫄았냐?”
“닥쳐.”
조금 쫄았다.
경기가 시작됐다. 다리 아래에서 공 튀는 소리가 겹쳤다.
탕. 탕. 탕.
한우가 계속 소리쳤다.
“왼쪽!”
“뒤!”
“패스!”
조금 지나 나도 들어갔다.
첫 번째 공이 왔다. 수비가 붙었다. 던질까 잠깐 망설이다 옆으로 넘겼다. 다시 공이 왔다.
이번에는 던졌다.
텅.
림을 맞고 튀어나왔다.
“아.”
한우가 리바운드를 잡았다.
“괜찮아! 다시 해!”
몇 번 뛰고 나니 숨이 찼다. 이상하게 그때부터 겁이 조금 없어졌다.
공이 다시 왔다.
받자마자 던졌다.
철썩.
태윤이가 내 등을 때렸다.
“오, 슈터.”
“이제 알았냐?”
그 한마디에 다음 공은 더 자신 있게 던졌다.
안 들어갔다.
“슈터 맞냐?”
“닥쳐.”
경기는 막판까지 붙었다.
우리가 한 점 앞선 상황에서 상대 가드가 공을 잡았다. 내가 붙었다.
왼쪽.
막았다.
오른쪽.
따라갔다.
다시 안쪽.
이번에는 놓치지 않을 것 같았다.
녀석이 골밑으로 몸을 넣었다. 나도 따라붙었다.
어깨가 부딪혔다.
“파울!”
공이 멈췄다.
“뭔 파울이야!”
상대는 내가 밀었다고 했다. 나는 몸싸움이었다고 했다. 목소리가 점점 커졌다.
여기서 파울을 인정하면 끝이었다.
뒤를 돌아봤다.
우리 애들이 있었다.
당연히 같이 따져줄 줄 알았다.
한우가 다가왔다.
“됐어.”
“뭐가.”
“파울 맞아.”
나는 한우를 쳐다봤다.
“뭐?”
“졌어. 가자.”
한우는 이미 주머니에서 만 원을 꺼내고 있었다.
“야.”
한우가 돌아봤다.
나는 입을 열었다가 닫았다.
돌아가는 길에는 운동화 끄는 소리만 났다. 한참 뒤 종규가 입을 열었다.
“근데 진짜 파울이긴 했어.”
고개가 바로 돌아갔다.
“씨발, 너도 한우 편이냐?”
종규가 안경을 밀어 올리며 나를 식은 얼굴로 쳐다봤다.
할 말이 없어졌다.
잠시 뒤 태윤이가 내 옆으로 왔다. 녀석도 한동안 말없이 걸었다.
“야.”
“왜.”
“배고프다.”
나는 태윤이를 봤다.
“지금 그게 중요하냐?”
“나한텐 중요한데.”
입술을 한번 깨물었다.
“지랄이네 지랄이여. 집에나 갑시다”
다음 날 학원이 끝나자, 한우가 농구공을 한번 튀겼다.
탕.
“할래?”
나는 한우를 봤다.
한우가 손을 내밀었다.
“어제 만 원 내놔.”
“뭔 소리여. 멋있는 척은 혼자 다 해놓고. 나도 다음에 따라 할라 했다.”
태윤이가 공을 빼앗았다.
종규가 가방을 멨다.
우리는 다시 농구장으로 갔다.
고등학교에 들어간 뒤 면도칼은 서랍 안으로 들어갔다.
아침에 눌린 머리는 그냥 두었고, 셔츠 자락이 바지 밖으로 빠져 있어도 굳이 집어넣지 않았다.
점심시간이었다. 아이 하나가 축구공을 들고 교실 뒤에서 소리쳤다.
“준경아, 축구.”
팔 사이로 얼굴을 조금 들었다.
“안 해.”
“농구는?”
“그것도.”
“그럼 뭐 할 건데?”
잠깐 생각했다.
“잘 건데.”
아이들이 웃으며 교실을 나갔다.
이어폰에서는 오래전에 듣던 노래가 흘러나오고 있었다.
〈Hope〉.
운동장에서 누군가 소리쳤다.
“뛰어!”
잠시 뒤 공이 튀었다.
탕.
나는 바카라 한 권을 세워 얼굴로 들어오는 햇빛을 가렸다. 창문에 흐릿하게 내 모습이 비쳤다.
한쪽으로 눌린 머리.
이번에는 손을 올리지 않았다.
다시 엎드렸다.
처음에는 약속에 시간과 장소가 있었다.
“토요일 두 시?”
“태윤이네 앞.”
그러면 만났다.
조금 지나서는 장소가 먼저 사라졌다.
“이번 주 볼래?”
“난 안 돼.”
“그럼 다음 주.”
“그래.”
나중에는 날짜도 없어졌다.
“언제 한번 보자.”
“그래.”
“다음에.”
“어.”
종규는 밥을 거의 다 먹은 뒤에야 다시 입을 열었다.
“중학교 때는 네가 좀 멋있는 애인 줄 알았나 봐.”
“내가?”
“옷도 잘 입고, 운동도 하고. 애들도 많이 알고.”
“그런 애였나?”
“나한테 묻지 마. 태윤이가 그랬다니까.”
“근데?”
종규가 웃었다.
“고등학교 가서는 완전 달랐잖아.”
“뭐가.”
“맨날 엎드려 있고. 머리는 자다 일어난 그대로고.”
“그건 네가 뭘 알아.”
“다 알지.”
“또.”
“축구하자고 해도 싫다, 농구하자고 해도 싫다.”
나는 피식 웃었다.
“맞네.”
“태윤이는 그게 싫었대?”
“싫었다기보다…… 좀 실망했다는 식이었던 것 같은데.”
“그래서 나 보기 싫다고 한 거야?”
종규가 젓가락을 내려놓았다.
“그건 모르지.”
“왜 몰라.”
“그 얘기랑 그 얘기가 꼭 같은 얘기냐?”
나는 대답하지 않았다.
종규가 물을 한 모금 마셨다.
“넌 꼭 이유가 하나 있어야 되냐?”
“뭐?”
“친해진 것도 이유가 있어야 하고, 안 보는 것도 이유가 있어야 하고.”
“그럼 이유가 없냐?”
“몰라.”
녀석이 어깨를 으쓱했다.
“그냥 안 보게 된 걸 수도 있지.”
잠깐 뒤 종규가 말했다.
“우리도 그렇잖아.”
“뭐가.”
“우리도 몇 년 만이잖아.”
할 말이 없었다.
종규가 계산서를 집었다.
“네가 살 거지?”
“왜 내가 사.”
“옛날에 농구 져서 만 원 잃었잖아.”
“그거랑 이게 무슨 상관이야.”
종규가 자리에서 일어났다.
“그러니까.”
집으로 가는 길에 오래전 학원 계단이 떠올랐다.
`너 어떤 애냐고.`
그날 유리문도 생각났다. 태윤이가 먼저 나갔고, 내가 그 옆에 있었다. 유리에 비친 얼굴을 보고 머리를 한번 만졌던 것까지는 기억났다.
그날 무슨 옷을 입었는지는 기억나지 않았다.
태윤과 가까워진 때를 세어봤다.
학원.
농구.
태윤이 방.
졸업.
손가락이 멈췄다.
“일 년이네.”
다시 세어봤다.
그래도 일 년 남짓이었다.
내 기억 속에서 우리는 중학교 내내 붙어 다녔다.
바카라장 안쪽에서 오래된 테이프를 꺼냈다.
N.EX.T.
카세트에 넣었다.
찰칵.
PLAY를 눌렀다.
딸깍.
〈Hope〉가 시작됐다.
피식 웃었다.
이상하게 그런 건 기억났다. 만 원짜리 농구 경기도, 채윤정이 나를 어떤 애냐고 물었다는 말도.
그런데 마지막으로 네 명이 농구한 날은 떠오르지 않았다.
어디였는지, 누가 이겼는지, 누가 먼저 집에 갔는지.
아무것도 기억나지 않았다.
눈을 감았다.
코트 밖으로 공 하나가 굴러갔다. 누군가 뛰어가 주워 왔다.
네 명이 가방을 멨다.
한 명이 먼저 돌아섰다.
거기서 장면이 끊겼다.
다시 떠올려봤다.
이번에도 거기까지였다.
그런데 이상하게 목소리 하나만은 들리는 것 같았다.
진짜 기억인지는 모르겠다.
“내일 보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