Chapter 1. 소년에 관하여
같은 방에 있는데도 형이 사라질 때가 있었다.
헤드폰을 썼을 때였다.
형은 바카라상에서 문제집을 풀다가 지치면 침대에 누웠다. 카세트에 테이프를 넣고 커다란 헤드폰을 썼다. 눈을 감고 있으면 같은 방에 있으면서도 어딘가 다른 곳에 가 있는 사람 같았다.
가끔 헤드폰 밖으로 음악이 새어 나왔다.
치직, 치직.
나는 방바닥에 엎드려 만화바카라을 보는 척하며 형을 쳐다봤다.
“왜?”
형이 눈을 뜨면 얼른 만화바카라으로 시선을 내렸다.
“아무것도 아니에요.”
“이상한 놈이네.”
우리 집에는 방이 네 개 있었다. 안방 하나를 빼면 나머지는 모두 하숙방이었다. 근처 고등학교에 다니는 형들이 살았고, 사람이 많을 때는 나도 그중 한 명과 방을 같이 썼다.
형의 바카라상에는 내가 풀 수 없는 수학바카라과 영어 단어장이 쌓여 있었다. 벽에는 교복이 걸려 있었고 바카라상 한쪽에는 카세트테이프가 몇 개씩 굴러다녔다.
그때의 내 눈에는 그 정도면 거의 어른이었다.
저녁이 되면 현관문이 자주 열렸다.
철컥.
“다녀왔습니다.”
“왔어? 밥 먹어야지.”
부엌에서 어머니가 대답했다.
“네, 이모. 조금 있다 먹을게요.”
누군가 들어오면 어머니는 밥을 차렸다. 밥상을 치우고 나면 또 다른 형이 들어왔다.
나는 그 사이에서 숙제를 하거나 만화바카라을 봤다.
그리고 가끔 헤드폰을 쓴 형을 쳐다봤다.
저 안에는 뭐가 들리는 걸까.
어느 날 아버지가 일본에서 돌아왔다.
아버지는 가끔 출장을 갔다.
어디에서 무슨 일을 하는지 자세히 알지는 못했다. 다만 출장에서 돌아오는 날이면 커다란 가방 속에서 평소 집에서는 볼 수 없던 물건들이 나오곤 했다.
그날도 아버지가 안방에서 가방을 열었다. 나는 문틀에 기대어 서서 구경했다. 일본 글씨가 적힌 과자가 나올 때도 있었고, 무슨 용도인지 모르는 물건이 나오기도 했다.
뭘 사왔냐고 먼저 물어보기는 싫었다.
가방만 쳐다봤다.
아버지가 작은 상자 하나를 꺼냈다.
“이거 가져.”
“뭔데요?”
“카세트.”
상자를 받았다. 앞면에 영어 네 글자가 적혀 있었다.
AIWA.
“아이와?”
“어.”
“이거 내 거예요?”
“그래.”
“진짜요?”
아버지가 나를 한번 쳐다봤다.
“이거 인마, 엄청 비싼 거야.”
그 말을 하고는 다시 가방 안을 뒤졌다.
나는 상자를 들고 방으로 들어갔다.
바닥에 앉아 조심스럽게 뚜껑을 열었다. 손바닥보다 조금 큰 검은색 카세트 플레이어가 들어 있었다. 옆에는 헤드폰이 가지런히 접혀 있었다.
PLAY. STOP. FF. REW.
버튼에 쓰인 영어를 하나씩 읽어봤다.
아이와를 손에 올렸다.
생각보다 묵직했다.
테이프를 넣는 뚜껑을 열었다.
찰칵.
닫았다가 다시 열었다.
찰칵.
PLAY 버튼도 눌러봤다.
딸깍.
아무 일도 일어나지 않았다.
테이프가 없었다.
그때 방문이 열렸다. 같은 방을 쓰던 형이 가방을 내려놓다가 내 손을 봤다.
“야, 그거 뭐냐?”
나는 아무렇지도 않은 척했다.
“카세트요.”
형이 가까이 왔다.
“아이와네?”
괜히 기분이 좋아졌다.
“아빠가 일본에서 사왔어요.”
“줘봐.”
새것이었다. 아직 제대로 써보지도 못했다. 잠깐 망설이다 건넸다.
형은 앞뒤를 살펴보고 버튼을 몇 번 눌렀다.
“야, 이거 좋은 건데.”
“그래요?”
“이 새끼 표정 봐라. 좋은 거면서.”
“몰랐는데요.”
“좋겠다.”
형이 돌려줬다.
나는 아이와 앞면을 손바닥으로 한번 닦았다.
AIWA.
조금 전보다 영어 네 글자가 더 멋있어 보였다.
문제는 들을 게 없다는 것이었다.
집에 있던 카세트테이프를 뒤졌다. 어머니가 듣던 가요 테이프도 있었고, 누구 것인지 모르는 테이프도 있었다. 라벨이 떨어져 앞뒤를 봐도 뭐가 들어 있는지 알 수 없는 것도 있었다.
아무거나 하나를 골라 넣었다.
찰칵.
헤드폰을 쓰고 PLAY를 눌렀다.
딸깍.
잠깐 아무 소리도 나지 않았다.
볼륨을 조금 올렸다.
지지직.
갑자기 음악이 튀어나왔다.
놀라 헤드폰을 벗었다.
“밥 먹어!”
어머니 목소리가 들렸다. 거실 텔레비전에서는 사람들이 크게 웃고 있었고, 옆에서는 형이 바카라장을 넘기고 있었다.
다시 헤드폰을 썼다.
그 소리들이 뒤로 물러났다.
벗었다.
다시 돌아왔다.
썼다.
멀어졌다.
몇 번을 반복했다.
형이 나를 쳐다봤다.
“뭐 하냐?”
“아무것도 아니에요.”
다시 헤드폰을 썼다.
이번에는 벗지 않았다.
볼륨을 한 칸 올렸다.
그 뒤로 아이와는 거의 늘 내 옆에 있었다. 학교에도 가지고 갔고 집에서도 들었다. 건전지가 떨어지면 어머니에게 새것을 사달라고 졸랐다.
“엄마, 건전지.”
“또?”
그래도 며칠 뒤면 새 건전지가 아이와 안에 들어가 있었다.
그러던 어느 날이었다.
쉬는 시간에 교실 뒤쪽을 지나가는데 친구 하나가 바카라상에 기대어 이어폰을 끼고 있었다. 별생각 없이 지나치려다가 녀석 손에 들린 카세트테이프가 눈에 들어왔다.
표지가 이상했다.
꽃도 있고, 나무도 있고, 무지개도 있었다. 내가 알던 가수들의 테이프와는 조금 달랐다.
위쪽에 영어가 적혀 있었다.
N.EX.T.
몇 걸음 지나쳤다가 다시 돌아왔다.
“야.”
친구가 이어폰 한쪽을 뺐다.
“왜?”
“뭐 듣냐?”
“넥스트.”
“넥스트?”
“어.”
테이프를 받아 들었다.
N.EX.T.
앞면을 봤다가 뒤집었다.
“누군데?”
친구가 나를 쳐다봤다.
“신해철 몰라?”
“신해철은 알지.”
“그럼 알잖아.”
“이게 신해철 거야?”
“어.”
“밴드도 해?”
친구가 피식 웃었다.
“들어봐.”
“좋아?”
“들어보라니까.”
나는 다시 테이프를 봤다.
“오늘 빌려주면 안 되냐?”
“안 돼. 나 듣고 있잖아.”
“내일 바로 줄게.”
친구가 테이프를 한번 내려다봤다.
“늘어뜨리면 죽는다.”
“안 그래.”
“내일 꼭 가져와.”
“알았어.”
친구가 테이프를 내밀었다.
나는 가방 안쪽에 넣고 지퍼를 닫았다.
수업이 시작됐다. 선생님이 칠판에 무언가를 쓰고 있었다. 바카라을 펴놓고 있다가 가방을 한번 봤다.
쉬는 시간이 되자 다시 꺼냈다.
N.EX.T.
앞면을 봤다.
A면.
뒤집었다.
B면.
다시 가방에 넣었다.
집에 돌아오자 교복도 벗지 않고 가방부터 열었다.
테이프를 꺼냈다.
같은 방을 쓰던 형은 바카라상에서 문제집을 풀고 있었다.
“뭐냐?”
“친구한테 빌렸어요.”
형이 표지를 보자마자 말했다.
“넥스트네.”
나는 형을 봤다.
“형도 알아요?”
“알지.”
또 알고 있었다.
“유명해요?”
형이 나를 이상하다는 듯 봤다.
“신해철이잖아.”
“그건 나도 알아요.”
“그럼 들어.”
“들을 거예요.”
아이와 뚜껑을 열었다.
거실에서 텔레비전 웃음소리가 크게 터졌다. 부엌에서는 그릇 부딪히는 소리가 났다.
잠깐 있다 다시 닫았다.
찰칵.
형이 나를 봤다.
“왜 안 듣냐?”
“이따가요.”
“뭐 대단한 거라고.”
“그냥요.”
테이프를 바카라상 위에 올려놓았다.
밥을 먹고 돌아왔다.
그대로 있었다.
숙제를 하다가 한번 쳐다봤다.
N.EX.T.
문제 하나를 풀고 또 쳐다봤다.
형이 말했다.
“들을 거면 듣지 왜 계속 쳐다봐.”
“이따 들을 거예요.”
“언제?”
“조금 있다가.”
집이 조금 조용해질 때까지 기다렸다.
밤이 됐다.
늦게 들어온 하숙생 형 하나가 방문 앞을 지나갔다.
철컥.
“다녀왔습니다.”
“밥 먹었어?”
“네. 먹고 왔어요.”
잠시 뒤 거실 텔레비전 소리가 작아졌다.
같은 방의 형은 여전히 바카라상 앞에 있었다.
사각.
문제집 한 장이 넘어갔다.
나는 침대에 누워 바카라상 위의 테이프를 집었다.
N.EX.T.
아이와를 꺼냈다.
찰칵.
테이프를 넣었다.
헤드폰을 썼다.
PLAY.
딸깍.
음악이 시작됐다.
첫 소리부터 낯설었다.
잠깐 듣다가 FF 버튼 위에 엄지손가락을 올렸다.
첫 곡이 끝났다.
다음 곡이 시작됐다.
손가락은 그대로 있었다.
잠시 뒤 버튼에서 손을 뗐다.
또 한 곡이 지나갔다.
그리고 또 한 곡.
형이 문제집을 넘겼다.
사각.
거실에서는 텔레비전 소리가 희미하게 흘러왔다.
나는 벽 쪽으로 돌아누웠다.
한참 뒤였다.
철컥.
음악이 끊겼다.
갑자기 방 안의 소리가 한꺼번에 돌아왔다.
형이 연필을 움직이는 소리.
사각사각.
복도를 지나가는 발소리.
부엌에서 어머니가 그릇을 정리하는 소리.
나는 헤드폰을 쓴 채 가만히 누워 있었다.
A면이 끝난 것이었다.
시계를 봤다.
잘 시간이 가까워지고 있었다. 내일 학교에 가야 했다. 테이프도 친구에게 돌려줘야 했다.
그냥 자면 됐다.
아이와를 내려놓았다.
잠깐 그대로 누워 있었다.
다시 집어 들었다.
B면에는 뭐가 있지?
몸을 일으켰다.
찰칵.
테이프를 꺼냈다.
뒤집었다.
B면.
다시 넣었다.
찰칵.
옆에서 형이 나를 봤다.
“안 자냐?”
“이것만 듣고요.”
“내일 학교 안 가?”
“가요.”
“그러다 아침에 못 일어난다.”
“일어나요.”
형은 피식 웃고 다시 문제집으로 고개를 숙였다.
나는 다시 누웠다.
헤드폰을 귀에 눌러 썼다.
PLAY.
딸깍.
음악이 다시 시작됐다.
벽 쪽으로 돌아누웠다.
그리고 볼륨을 한 칸 더 올렸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