다시 그 시절로

돌아갈 수 만 있다면

by양다경

경준을 만나 인희에게 있었던 이야기를 들은 철규는 병원으로 향했다.

하지만 병원에 가까워질수록 발걸음이 점점 느려졌다.

정문 앞에 도착한 철규는 한동안 그 자리에 서 있었다.

인희를 만나야 한다는 생각은 분명했다.

그런데 막상 병원 안으로 들어가려니 마음이 무거웠다.

경준의 이야기를 듣고 나서야 조금은 알 것 같았다.

인희가 왜 현실을 받아들이지 못하는지.

왜 자신이 사십 대의 주부라는 사실보다, 모든 것이 가능할 것만 같은 고3 시절에 머물러 있는지.

사람은 살아가면서 수많은 선택을 한다.

하나를 선택하는 순간, 다른 길은 포기해야 한다.

어쩌면 인희는 그때 놓아버려야 했던 무언가를 아직 놓지 못한 것인지도 모른다.

끝나버린 꿈.

다시 돌아갈 수 없는 시간.

그 모든 것을 마음속 깊이 묻어둔 채 살아오다가 결국 현실보다 기억 속으로 숨어버린 것인지도.

철규는 병원 앞 벤치에 털썩 앉았다.

눈을 감자 자신의 학창 시절도 떠올랐다.

친구들과 만화방에 가고, 라면 한 그릇을 나눠 먹으며 웃던 시절.

그때는 세상에 못 할 일이 없는 줄 알았다.

하루빨리 어른이 되고 싶었고, 졸업만 하면 모든 것이 달라질 거라고 믿었다.

그렇게 벗어나고 싶었던 시간이었는데…….

지나고 나니 오히려 가장 그리운 시간이 되어 있었다.

철규가 피식 웃었다.

‘사람 마음이 참 이상하군.’

그러다 문득 한 가지 의문이 떠올랐다.

‘그런데 인희는 왜 하필 고3일까?’

분명 그 시절에 무언가가 끝났을 것이다.

인희가 자신의 의지와 상관없이 놓쳐버린 것.

어쩌면 그 순간부터 인희의 시간도 함께 멈춰버린 것인지 모른다.

철규는 길게 한숨을 내쉬었다.

‘그럼 나는 인희를 어떻게 대해야 하지?’

고3 학생처럼 대해줘야 할까.

아니면 현실을 알려줘야 할까.

쉽게 답을 내릴 수 없었다.

하지만 한 가지는 분명했다.

지금 당장 인희에게 현실을 들이밀어서는 안 된다는 것.

철규는 자리에서 일어났다.

“서인희…….”

나지막하게 이름을 부른 그는 병원 안으로 들어섰다.

복도를 지나 병실 앞에 도착했지만, 이번에도 쉽게 문을 열지 못했다.

손을 문고리에 올린 채 잠시 머뭇거리던 순간이었다.

철컥.

병실 문이 먼저 열렸다.

답답함을 참지 못한 인희가 밖으로 나온 것이다.

그리고 바로 앞에 서 있던 철규와 마주쳤다.

인희의 눈이 동그랗게 커졌다.

“아저씨…….”

반가운 듯 미소를 지었지만 어딘가 어색했다.

“또 오셨네요.”

잠시 주변을 살피던 인희가 조심스럽게 말했다.

“그런데…… 아저씨.”

“응?”

“죄송한데요. 제 부모님한테 연락 좀 해주시면 안 돼요?”

철규의 얼굴에서 미소가 사라졌다.

“제가 여기 있는 줄 모르실 거예요. 분명 걱정하고 계실 텐데…….”

인희는 잠시 망설이다가 덧붙였다.

“그리고 저 학교도 가야 하고요.”

철규는 아무 말 없이 인희를 바라보았다.

그녀의 눈빛에는 경계심이 어려 있었다.

자신을 조금 무서워하는 것 같기도 했다.

철규는 애써 웃었다.

“걱정하지 마. 아저씨가 부모님께 연락할게. 곧 오시라고 할게.”

“정말요?”

“그럼. 부모님께서 얼마나 걱정하시겠어.”

철규는 최대한 다정하게 대답했다.

하지만 인희의 표정은 쉽게 풀리지 않았다.

철규는 지금까지 인희에게 몇 번이나 같은 이야기를 반복해 왔다.

길에서 쓰러져 있는 그녀를 우연히 발견했고 병원으로 데려왔다는 것.

갑작스러운 일이라 아직 가족들에게 연락하지 못했다는 것.

자신에게도 딸이 있으니 어린 학생이 걱정돼 수시로 병원에 들르는 것뿐이라는 것.

그럴듯한 이유를 만들어 시간을 벌어왔다.

하지만 이제는 더 이상 숨길 수 없었다.

경준에게서 모든 이야기를 들었으니까.

언제까지고 인희가 자신을 고3 학생이라고 믿으며 살아갈 수는 없다는 것도 알고 있었다.

언젠가는 현실과 마주해야 한다.

문제는 그 순간을 어떻게 맞게 하느냐였다.

잘못된 말 한마디가 인희가 간신히 붙잡고 있는 세상을 통째로 무너뜨릴 수도 있었다.

철규는 조용히 인희를 바라보았다.

그리고 자신이 해야 할 일이 무엇인지 조금씩 알 것 같았다.

현실을 억지로 들이밀어 인희를 깨뜨리는 것이 아니었다.

인희가 스스로 현실을 마주할 수 있을 때까지 곁에 있어주는 것.

어쩌면 그것이 지금 철규가 할 수 있는 유일한 일이었다.

하지만 인희의 일은 이제 혼자 감당할 수 있는 문제가 아니었다.

철규는 결국 병원을 나와 인희의 부모님에게 전화를 걸었다.

공중전화 앞에서 한참을 망설이다 수화기를 들었다.

현광이 전화를 받았다.

“인희에게…… 좀 안 좋은 일이 있습니다.”

철규는 잠시 말을 고르다가 조심스럽게 덧붙였다.

“자세한 이야기는 만나서 말씀드리겠습니다.”

전화로 한꺼번에 설명하기에는 너무 복잡한 일이었다.

무엇보다 현광에게 마음의 준비를 할 시간도 필요했다.

“그럼 내일 찾아뵙겠습니다.”

전화를 끊은 철규는 한동안 수화기를 바라보았다.

이제 정말 시작이었다.

집으로 돌아온 철규는 거실에 들어서다 문득 거울 앞에 멈춰 섰다.

며칠 동안 제대로 잠을 이루지 못한 탓에 얼굴은 잔뜩 지쳐 있었다.

칙칙하게 가라앉은 안색과 충혈된 눈.

철규는 짧게 한숨을 내쉬고 방으로 들어갔다.

침대에 누웠지만 잠은 쉽게 오지 않았다.

눈을 감자 어린 시절의 인희가 떠올랐다.

양 갈래로 머리를 땋고, 세상 걱정 하나 없는 얼굴로 웃던 아이.

“까르르, 까르르.”

그때의 인희는 정말 잘도 웃었다.

철규의 입가에도 저절로 미소가 번졌다.

하지만 그 미소는 오래가지 못했다.

“졸업은…… 했어야 했는데.”

혼잣말처럼 중얼거린 철규가 입을 다물었다.

어쩌면 인희가 졸업하지 못한 것은 자신의 탓인지도 모른다.

그때 자신이 얼마나 고집을 부렸던가.

철규는 깊은 한숨을 내쉬었다.

그러다 문득 TV에서 보았던 프로그램 하나가 떠올랐다.

늦은 나이에 다시 학교에 다니는 사람들의 이야기였다.

학생 때 이루지 못했던 배움에 대한 미련을 안고 살아가다 뒤늦게 다시 공부를 시작한 사람들이었다.

철규는 자리에서 일어나 거실로 나갔다.

리모컨을 이리저리 움직이다 다행히 그 프로그램을 다시 찾아냈다.

화면 속에는 늦은 나이에 교복을 입고 학교에 다니는 사람들이 나왔다.

주변의 시선도, 나이 차이도 개의치 않았다.

그저 자신이 이루지 못했던 것을 다시 시작하고 있었다.

철규는 한동안 말없이 화면을 바라보았다.

그러다 문득 인희가 떠올랐다.

‘인희도…… 다시 학교에 간다면 어떨까?’

그 생각이 머릿속을 떠나지 않았다.

‘그럼 예전의 인희를 되찾을 수 있을까?’

철규의 눈빛이 조금씩 달라졌다.

어쩌면 방법이 있을지도 모른다는 생각이 들었다.

현실을 억지로 받아들이게 하는 대신, 인희가 머물러 있는 그 시절로 다시 돌아가게 해주는 것.

그리고 그곳에서 자신이 놓쳤던 시간을 다시 살아보게 하는 것.

철규는 한참 동안 화면을 바라보다 천천히 고개를 끄덕였다.

‘그래…….’

그것이 인희에게 필요한 것일지도 모른다.

​

다음 날 아침.

철규는 거실 소파에서 눈을 떴다.

언제 잠들었는지도 기억나지 않았다.

창문으로 들어온 햇살이 거실을 가득 채우고 있었다.

철규는 급하게 시간을 확인했다.

다행히 현광과 약속한 시간은 아직 지나지 않았다.

그는 서둘러 일어나 세수를 하고 옷을 갈아입었다.

오늘은 피할 수 없는 이야기를 해야 했다.

장인과 장모에게 인희의 모든 것을 말해야 한다.

집을 나선 철규는 차에 올라 운전대를 잡았다.

하지만 운전하는 내내 마음은 무거웠다.

‘다시 학교에 보내는 게 정말 맞는 걸까?’

‘그게 인희에게 도움이 될까?’

생각이 꼬리를 물었다.

마음이 급해질수록 운전도 자꾸만 빨라졌다.

철규는 그제야 자신이 전혀 침착하지 못하다는 것을 깨닫고 속도를 늦췄다.

얼마 후 목적지에 도착했다.

차에서 내린 철규는 한동안 대문 앞에 서 있었다.

쉽게 초인종을 누르지 못했다.

하지만 이내 마음을 다잡고 버튼을 눌렀다.

띵동.

잠시 후 문이 열렸다.

인희의 어머니이자 철규의 장모인 민동순이 서 있었다.

동순은 철규의 얼굴을 보자마자 다급하게 물었다.

“어떻게 된 일인가, 박 서방? 인희에게 무슨 일이라도 있는 게야?”

철규는 대답 대신 물었다.

“장인어른은 집에 계신가요?”

“그럼. 자넬 기다리고 있지.”

동순의 목소리에는 불안이 묻어 있었다.

철규는 더 이상 시간을 끌 수 없었다.

“들어가서 말씀드리겠습니다.”

그는 동순과 눈을 마주치지 못한 채 집 안으로 들어섰다.

거실에는 낯선 탁자가 놓여 있었다.

그 위에는 바카라이 여러 권 가지런히 놓여 있었다.

그리고 그 탁자 앞 가죽소파에는 인희의 아버지, 서현광이 앉아 있었다.

현광은 철규가 들어오는 모습을 보자 긴장한 듯 자리에서 일어났다.

두 사람의 시선이 마주쳤다.

잠시 무거운 침묵이 흘렀다.

그리고 현광이 천천히 입을 열었다.

“박 서방…….”

그 목소리에는 이미 무언가를 짐작하고 있는 사람의 불안이 묻어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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금요일 연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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