인희를 이해하다
경준이 철규를 기다린 지 몇 분쯤 지났을까
건조하고 무더운 날씨 탓에 경준은 손을 만지작거리며 창밖을 바라보고 있었다.
그때 카페 문이 벌컥 열렸다.
“헉… 헉…….”
철규였다.
무더운 날씨에 헐레벌떡 뛰어온 탓인지 이마에는 땀이 송골송골 맺혀 있었다.
철규는 숨을 고르며 카페 안을 둘러봤다.
그리고 혼자 앉아 있는 경준과 눈이 마주쳤다.
두 사람은 잠시 아무 말 없이 서로를 바라봤다.
이상하게도 설명하지 않아도 서로가 누구인지 단번에 알 수 있었다.
경준은 키가 훤칠했고 이목구비도 뚜렷했다. 웬만한 모델이라고 해도 믿을 만큼 반듯한 외모였다.
철규는 순간 멈칫했다.
‘아…… 저 학생이구나.’
사진으로도 본 적 없는 얼굴이었다.
그런데 직접 마주하고 보니 생각보다 훨씬 잘생겼다.
철규의 시선이 경준의 얼굴에서 어깨, 키까지 슬쩍 내려갔다.
그리고 아주 짧은 순간, 이상한 감정이 스쳤다.
‘……나도 젊었을 때는 저 정도였는데.’
철규는 속으로 헛웃음을 쳤다.
‘아니, 내가 지금 무슨 생각을 하는 거야.’
그러면서도 경준을 다시 한번 바라봤다.
‘잘생기긴 했네.’
철규는 괜히 목을 한 번 가다듬고 경준에게 다가갔다.
“강경준 학생?”
“네. 철규 아저씨시죠?”
“그래요.”
두 사람이 마주 앉았다.
그런데 이번에는 경준이 철규를 유심히 바라봤다.
중년의 나이에도 흐트러짐 없이 단정한 모습이었다.
억지로 젊어 보이려 애쓰는 사람과는 달랐다. 세월을 자연스럽게 받아들인 사람에게서만 느껴지는 여유가 있었다.
경준은 속으로 생각했다.
‘아…… 저분이구나.’
인희의 남편.
사진으로만 상상했던 사람을 실제로 마주하니 묘한 기분이 들었다.
그런데 이상하게도 철규는 생각보다 훨씬 편안한 인상이었다.
경준은 잠시 망설이다 입을 열었다.
“생각보다…….”
“응?”
“아니에요.”
“뭔데?”
“아무것도 아닙니다.”
경준이 살짝 웃었다.
철규도 따라 웃었다.
하지만 두 사람의 머릿속에는 서로 다른 생각이 떠오르고 있었다.
철규는 ‘저 녀석이 인희와 그렇게 많은 이야기를 나눴구나.’
경준은 ‘저분이 인희가 그토록 기다리던 남편이구나.’
그렇게 한동안 두 사람은 마주 앉아 아무 말도 하지 않았다.
마치 묵념이라도 하듯 고개를 숙인 채, 음료도 없는 테이블만 바라보고 있었다.
서로 할 말은 많았지만 누구부터 입을 열어야 할지 몰랐다.
결국 철규가 먼저 고개를 들었다.
“이렇게 나와줘서 고마워요, 학생, 덥죠? 일단 뭐라도 마시면서 이야기할까요?”
"마실 음료는?"
“네. 전 레모네이드”
경준은 짧게 대답했다.
철규는 자리에서 일어나 카운터로 갔다.
“레모네이드 하나 주세요. 그리고 아메리카노 한 잔.”
잠시 후 음료를 받아 돌아온 철규는 경준 앞에 레모네이드를 내려놓고 자리에 앉았다.
그리고 한숨을 작게 내쉬었다.
“일이 이렇게 되어버렸네요.”
철규는 한동안 아메리카노 잔을 바라보다 입을 열었다.
“학생도 몰랐던 일이었으니 당황스러웠을 거예요. 어쩌면 속았다는 생각도 들었을 테고요.”
철규는 고개를 숙였다.
“그건 내가 아내 대신 사과할게요. 정말 미안합니다.”
경준은 아무 말 없이 레모네이드 잔만 만지작거렸다.
“그런데…… 이제는 사실을 제대로 정리해야 할 것 같아요.”
철규의 목소리가 조금 무거워졌다.
“아내가 학생을 속인 건 분명 잘못이에요. 하지만 일부러 학생에게 상처를 주려고 그런 건 아닐 겁니다.”
잠시 망설이던 철규가 씁쓸하게 웃었다.
“아내가 한동안 많이 힘들어했어요. 나는 워낙 무뚝뚝한 사람이고…… 아마 많이 외로웠을 겁니다.”
그는 아메리카노를 한 모금 마셨다.
“어쩌면 이렇게 된 데에는 내 바카라임도 있겠죠.”
경준이 처음으로 철규의 얼굴을 똑바로 바라봤다.
생각보다 표정이 무거웠다.
철규는 잠시 침묵하다가 조심스럽게 말을 이었다.
“그리고…… 이건 좀 이기적인 부탁인데요.”
“네?”
“아내가 지금 병원에 있어요.”
경준의 손이 멈췄다.
“병원이요?”
“머리를 다쳤어요.”
철규의 목소리가 낮아졌다.
“다행히 크게 다친 건 아니라고 합니다. 그런데…… 문제가 하나 있어요.”
“무슨 문제인데요?”
철규가 잠시 뜸을 들였다.
“자기가 고3이라고 생각해요.”
“……네?”
경준의 눈이 커졌다.
철규는 허탈하게 웃었다.
“나도 처음에는 내가 잘못 들은 줄 알았습니다.”
“그럼…… 지금도요?”
“네.”
철규가 창밖을 바라봤다.
“자기가 결혼한 사십 대 주부라는 걸 모릅니다. 깨어나기는 했는데…… 마치 다른 시간에서 깨어난 사람처럼 굴어요.”
경준의 얼굴이 굳었다.
“그래서 학생에게 부탁할 게 있어요.”
철규가 경준을 똑바로 바라봤다.
“인희가 학생과 무슨 이야기를 나눴는지 알고 싶어요.”
“…….”
“왜 하필 고3인지, 무엇을 그렇게 그리워하는지…… 학생과 나눈 대화 속에 답이 있을지도 모르니까요.”
철규의 목소리가 떨렸다.
“조금만 도와줄 수 있을까요?”
경준은 한동안 아무 말도 하지 않았다.
그리고 갑자기 레모네이드를 들이켰다.
벌컥, 벌컥.
철규가 그 모습을 바라봤다.
‘많이 당황했나 보군.’
경준은 잔을 내려놓자마자 입술을 닦았다.
“아…… 다치셔서 병원에 계시는군요.”
“네.”
“어쩐지…….”
경준은 옷소매를 만지작거렸다.
“그래서 연락이 없었던 거라고 생각했어요.”
철규가 고개를 들었다.
“무슨 말이죠?”
“저는 아주머니가 갑자기 연락을 끊은 줄 알았거든요.”
경준은 잠시 머뭇거렸다.
“그런데 머리를 다치셨다니…… 생각보다 일이 커졌네요.”
“그렇죠.”
“그런데 어쩌다가 다치신 거예요?”
철규의 표정이 굳었다.
잠시 침묵이 흘렀다.
그리고 철규가 조용히 말했다.
“내 탓이에요.”
경준의 눈썹이 올라갔다.
“네?”
“학생과 채팅하는 걸 알게 됐어요. 그래서 그만두게 하려고 했습니다.”
철규는 자신의 손을 내려다봤다.
“그런데 내가 너무 흥분했어요. 차분하게 이야기했어야 했는데…… 서로 밀고 당기다가 내가 인희를 놓쳤고…….”
철규가 입술을 깨물었다.
“계단에서 넘어졌어요.”
경준은 아무 말도 하지 않았다.
철규는 한동안 고개를 들지 못했다.
“일이 이렇게 될 줄은 정말 몰랐어요.”
경준은 철규를 바라보았다.
만나기 전에는 조금 겁이 났다.
혹시 자신을 탓하면 어쩌나 싶었다.
그런데 막상 만나보니 예상과 달랐다.
이 남자는 화를 내기보다 자신을 탓하고 있었다.
그리고 자신보다 아내를 걱정하고 있었다.
경준은 그제야 이 사람이 자신에게 원하는 게 무엇인지 알 것 같았다.
자신을 추궁하려는 게 아니었다.
인희를 이해할 단서를 찾고 있는 것이었다.
“저…….”
경준이 천천히 입을 열었다.
“인희라는 이름이 익숙하긴 한데…… 이제부터는 아주머니라고 부를게요.”
철규가 고개를 끄덕였다.
“그래요.”
“아주머니는 저한테 이런 말을 자주 했어요.”
경준의 얼굴에 희미한 미소가 떠올랐다.
“자기는 지금이 제일 행복하다고요.”
철규의 표정이 미묘하게 변했다.
“지금이…… 제일 행복하다고요?”
“네. 아마도 상상의 고3인 지금이요.”
경준은 웃으며 말했다.
“꿈을 이루려고 열심히 공부하고 있다고 했어요.”
철규는 아무 말도 하지 않았다.
경준이 말을 이었다.
“그리고 굉장히 밝았어요. 제가 보기에는 진짜 열아홉 살 같았어요.”
철규의 입가에 씁쓸한 웃음이 걸렸다.
“그랬구나.”
“저는 정말 학생인 줄 알았어요.”
“그럴 만했겠죠.”
“그리고 교사가 되고 싶다고 했어요.”
철규의 눈빛이 흔들렸다.
“교사?”
“네. 학생들을 가르치는 사람이 되고 싶다고요.”
철규는 아무 말도 하지 않았다.
머릿속에 오래전 인희의 모습이 떠올랐다.
활짝 웃으며 자신의 꿈을 이야기하던 어린 인희.
그리고 얼마 지나지 않아 결혼을 하고, 집안 일과 아이들을 챙기느라 자신의 꿈을 뒤로 미뤄두었던 인희.
철규의 가슴 한구석이 서늘해졌다.
‘그래서였나…….’
왜 하필 고3이었는지.
왜 그토록 그 시절을 행복하다고 말했는지.
그제야 조금 알 것 같았다.
경준은 계속 이야기를 이어갔다.
사진을 주고받았던 이야기.
서로의 꿈을 이야기했던 일.
자신에게 절대 꿈을 포기하지 말라고 했던 말.
별것 아닌 것 같았던 일상의 이야기까지.
경준은 하나씩 꺼내놓았다.
그러다 문득 경준 자신도 이상한 생각이 들었다.
‘혹시…… 아주머니는 나와 이야기하면서 자기 청춘을 다시 살았던 게 아닐까?’
자신보다 어린 학생과 이야기를 나누며, 어쩌면 그는 잊고 있던 열아홉 살의 자신을 다시 마주하고 있었던 것은 아닐까.
그럴지도 모른다는 생각이 들었다.
철규는 경준의 이야기를 한마디도 끊지 않았다.
그저 묵묵히 듣고 있었다.
마침내 경준이 말을 꺼냈다.
“저는 아주머니가 저를 속였다고 해서 그렇게까지 나쁘게 생각하지 않아요.”
철규가 고개를 들었다.
“그 나름대로 힘든 일상에서 빠져나갈 곳이 필요했던 거 아닐까요?"
경준은 레모네이드를 한 모금 더 마셨다.
“그리고 저한테 미안해하실 필요도 없어요.”
철규는 한동안 경준을 바라보다가 피식 웃었다.
“학생…… 참 이상하네요.”
“제가요?”
“요즘 학생 같지가 않아서.”
“그게 칭찬이에요?”
“칭찬입니다.”
두 사람 사이에 처음으로 작은 웃음이 흘렀다.
어색했던 공기가 조금 누그러졌다.
철규가 고개를 끄덕였다.
“고마워요.”
“별말씀을요.”
“정말 도움이 됐어요.”
철규는 처음 경준을 만났을 때와 전혀 다른 눈으로 그를 바라보고 있었다.
처음에는 괜히 잘생긴 얼굴이 마음에 들지 않았다.
그런데 지금 보니…….
‘괜찮은 녀석이네.’
철규는 속으로 그렇게 생각했다.
경준 역시 처음 품었던 경계심이 조금씩 사라지고 있었다.
그날 두 사람은 오랫동안 인희에 대해 이야기를 나눴다.
철규가 기억하는 인희.
경준이 기억하는 인희.
서로 다른 두 사람의 기억이 하나씩 맞춰지면서, 그동안 누구도 제대로 들여다보지 못했던 인희의 마음이 조금씩 모습을 드러내고 있었다.
그리고 철규는 처음으로 깨달았다.
자신이 아내를 너무 오랫동안 ‘현재의 인희’로만 바라보고 있었다는 것을, 그는 그제야 깨달았다.
그 안에 아직도 꿈을 꾸던 열아홉 살의 인희가 남아 있다는 것을.