인도출장
"혹시 영어 인터뷰가 있나요?, 영어는 어느 정도 수준으로 해야하나요?"
오랜 구직 기간 끝에 만난 간절한 일자리였다. 내가 가장 잘 알고 경험을 쌓아온 오프라인 영업 직무였지만, 한 가지 마음에 걸리는 조건이 있었다. 바로 영어였다.
K-뷰티 매장을 인도에 오픈하는 일이었기 때문에 영어로 기본적인 의사소통은 할 수 있어야 했다. 비즈니스 문서는 AI 번역의 도움을 받을 수 있었지만, 실제 현장에서 사람들과 대화하고 즉각적으로 업무를 해결해야 한다는 부담은 컸다.
토익 공부를 제대로 해본 적도 없었다. 일상에서 영어로 대화할 일도 거의 없었으니, 기본적인 회화조차 제대로 할 수 있을지 자신이 없었다. 내가 잘할 수 있는 직무였지만 영어라는 필수 역량 하나 때문에 기회를 놓칠 수도 있다는 생각에 조마조마했다. 다행히 중급 정도의 영어 회화가 가능하다는 설명으로 별다른 테스트 없이 채용이 결정됐다.
입사 후 인도 법인 직원들과 슬랙으로 업무를 주고받기 시작했다. 번역 기능을 활용하면 문서나 메시지를 통한 소통은 가능했다. 하지만 내가 직접 영어로 말해야 하는 상황은 달랐다. 어느 정도 문맥과 리스닝은 가능했지만 괜히 왓츠앱으로 인도 현지 직원의 전화가 걸려올 때면 부족한 영어가 들통날까 급히 라운지로 뛰어가 통화를 하곤 했다.
내 뜻을 정확하게 전달하지 못할까 봐 두려웠고, 때로는 충분히 설명하지 못한 채 어물쩍 넘어가기도 했다.
그렇게 영어에 대한 부담을 안고 있던 중 오프라인 매장 오픈이 본격적으로 시작됐다. 장기와 단기 출장이 잦아졌고, 현지에서 함께 일할 한국인 뷰티 매니저를 채용하지 못하면서 예상하지 못한 역할까지 맡게 됐다.
인도 현지 직원들을 대상으로 제품 교육과 매장 서비스 교육을 직접 진행해야 했다. 그것도 영어로.
막상 교육을 준비하려니 걱정이 앞섰다. 제품의 특징과 사용법은 물론, 고객 응대 방식과 매장 운영에 필요한 내용까지 영어로 내가 직접 전달해야 했다. 한국어로 설명하는 것도 쉽지 않은데 영어로 교육을 진행할 수 있을까 싶었다.
일단 내가 할 수 있는 것부터 준비했다. 교육용 PPT를 만들고 각 페이지마다 영어 스크립트를 작성했다. 9시간의 비행시간 동안 반복해서 읽고 외워보려고 했다. 문장을 통째로 기억하면 현장에서 조금이라도 덜 당황할 것 같았다.
그렇게 도착한 인도에서 8명의 현지 직원을 만났다. 막상 교육을 시작하니 준비했던 순서에 따라 자연스럽게 진행했고 일하면서 오랫동안 썼던 키워드들이 자연스럽게 영어로 내뱉어졌다. 다만 중간중간 즉각적인 대응, 일상 대화는 버벅이곤 했다. 하지만 교육을 마쳤으니 그걸로 만족했다. 내 영어가 유창해서가 아니었다. 제품을 직접 보여주고 사용 방법을 시연했고, 매장에서 고객을 응대하는 상황을 예로 들며 설명했다. 내가 오랫동안 경험해 온 리테일 업무에 대한 전문성을 보여주자 직원들도 하나씩 이해하고 따라왔다.
언어로 충분히 설명하기 어려운 부분은 직접 행동으로 보여주었다. 말이 막히면 다른 표현을 찾아 설명했고, 서로 이해했는지 확인하며 교육을 이어갔다. 무엇보다 직원들은 부족한 영어 실력만으로 나를 판단하지 않았다. 내가 준비한 교육 내용과 업무에 대한 이해를 바탕으로 리더로서 나를 따라주었다.
인도에는 지역마다 다양한 언어가 존재했고, 직원들 역시 서로 지역과 피부색으로 다른 언어와 문화적 배경을 가지고 있었다. 함께 일하는 과정에서 서로의 언어를 배우고 익숙해지는 모습도 자연스러웠다. 그곳에서 언어는 분명 중요한 소통 수단이었지만, 일을 함께하는 데 필요한 모든 것을 결정하지는 않았다. 때로는 표정과 손짓, 직접 보여주는 행동 하나가 긴 설명보다 더 정확하게 전달되기도 했다.
일을 잘하기 위해서는 언어 능력도 필요하지만, 그보다 먼저 내가 맡은 일을 충분히 이해하고 상대에게 전달하려는 노력이 필요했다. 부족한 부분은 준비하고, 말로 전달하기 어렵다면 직접 보여주고, 서로 이해할 때까지 다른 방법을 찾아보면 됐다.
영어를 못한다는 생각에 시작도 하기 전에 가능성을 제한했던 건 어쩌면 나 자신이었다. 물론 지금도 유창한 영어 실력을 갖춘 것은 아니다. 여전히 번역기의 도움을 받고, 모르는 표현을 찾아보기도 한다. 하지만 적어도 영어 때문에 내가 잘할 수 있는 일까지 포기할 필요는 없다. 언어가 완벽해질 때까지 기다렸다면 나는 그 기회를 잡지 못했을지도 모른다.
부족한 영어 실력은 일을 시작하지 못할 이유가 아니라, 일을 하면서 채워가야 할 과제였다. 결국 현장에서 나를 움직이게 한 것은 완벽한 영어 실력이 아니라, 내가 맡은 일을 제대로 해내고 싶다는 마음이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