일하지 않는 나를 받아들이는 일

성장

by계발자

나는 오랫동안 일만이 나를 성장시킬 수 있다고 생각했다. 이직할 때마다 조금 더 나은 환경에서 일하고 싶었고, 이전보다 성장한 사람이 되고 싶었다. 새로운 회사에 들어가면 기존과 다른 업무를 배우고, 더 많은 바카라임을 맡으며, 그만큼 나의 가능성도 넓어질 거라고 기대했다.


그렇게 일을 통해만 나를 증명하고 성장하는 데 익숙해졌다.


그런데 지금은 백수다. 결혼을 하고 낯선 도시로 이사했다. 오랫동안 살아온 서울을 떠나 청주에서 새로운 생활을 시작했고, 다음 커리어를 준비하기 위해 잠시 멈춰 있는 중이다. 그동안 생각만 해왔던 직무 전환을 준비하고 있고, 새로운 분야를 공부하며 앞으로의 방향을 찾아가고 있다. 분명 다음을 위한 준비의 시간이다. 그런데도 아무것도 생산하지 않고 있다는 생각이 들 때면 주눅이 든다. 쉬고 있다는 사실이 괴롭기도 하다. 통장에 따박따박 찍히는 안정감을 잃었다.


검지손가락에 관절염이 생길 정도로 마우스를 클릭하며 일했던 때가 그립다. 바쁘게 회의하고, 자료를 만들고, 사람들과 의견을 주고받던 시간. 하루가 끝나면 몸은 피곤했지만 내가 무언가를 해냈다는 감각은 분명했다. 일 때문에 피곤한 기분을 다시 느끼고 싶다는 생각까지 한다. 종종 일때문에 피곤하다는 남편이 얄밉기도 하다.


돌이켜보면 나에게 힘들었던 건 구직 과정 자체만은 아니었다. 매번 이직을 준비하면서 가장 견디기 어려웠던 순간은 아무것도 하지 않고 있는 것처럼 느껴지는 시간이었다. 다음 회사를 찾기 위해 이력서를 고치고 면접을 준비하면서도, 소속된 회사가 없다는 사실 하나만으로 나의 자리가 사라진 것 같았다. 사원증 하나 없다는 사실이 생각보다 크게 느껴졌다.


매순간 일하는 모습이 가장 나답고 만족스러웠다. 물론 회사에서 겪는 갈등과 바카라임, 사람 때문에 지치는 순간도 있었다. 그럼에도 나는 일을 할 때 가장 높은 집중력을 발휘했고, 무언가를 해결하고 결과를 만들어 내는 과정에서 에너지를 얻었다. 어쩌면 나는 일에 몰입하고, 그 과정에서 에너지를 소모해야 비로소 하루를 잘 보냈다고 느끼는 사람인지도 모른다.


하지만 이번 공백은 이전과 조금 다르다. 단순히 다음 회사를 기다리는 시간이 아니다. 낯선 도시에서 새로운 생활을 시작했고, 이전과는 다른 직무를 준비하고 있다. 지금까지 쌓아온 경험을 바탕으로 앞으로 어떤 일을 하며 살아갈지 다시 생각하는 중이다. 그러니 이전과 같은 속도로 다음을 결정할 수만은 없다.


하루 중 써야하는 에너지가 넘치다보니 일에 쏟았던 집중력을 다른 곳으로 옮겨보기도 했다. 처음 배우는 수영에 빠져들었고, 몸을 움직이며 새로운 동작을 익히는 데 시간을 썼다. 공부를 하고, 글을 쓰고, 내가 앞으로 해보고 싶은 일을 정리하기도 했다. 그럼에도 회사에서 일할 때만큼의 성취감을 충족시키진 못했다. 여전히 쉬고 있는 나를 만족스럽게 바라보지 못하는 날이 많다.


그래도 이제는 일하지 않아도, 나 스스로 가치있고 만족스러운 삶을 사는 방법을 하나씩 시도해보고 있다. 여유롭게 점심을 챙겨먹고 강아지와 오후 산바카라을 나가 3000원 에이드 한 잔을 마시며 시원함을 느끼는 소소한 행복. 주어진 시간에 나를 재촉하지 않을 수 있도록 말이다.


누구나 같은 시기에 같은 속도로 성장하는 것은 아니다. 결혼과 이사, 새로운 역할과 직무 전환처럼 삶의 변화가 찾아오면 이전과는 다른 방식으로 다음을 준비해야 한다. 예전의 연차와 경력에 맞춰 서둘러 자리를 찾기보다, 지금의 나에게 필요한 시간을 들여보는 것도 하나의 선택일 수 있다.


나는 여전히 일하고 싶다. 다시 사원증을 목에 걸고, 맡은 일에 몰입하고, 하루가 끝나면 녹초가 되는 날도 맞이하고 싶다. 다만 이제는 일하지 않는 시간의 나까지 쓸모없다고 여기고 싶지는 않다. 일을 통해 성장해 온 사람이라는 사실은 변하지 않는다. 그리고 지금은 일하지 않는다고 해서 그동안 쌓아온 경험이 사라지는 것도 아니다. 다만 이번에는 조금 다른 속도로, 이전과는 다른 방향을 바라보면서 일을 하지 않아도 의미없이 흘러가는 시간도 성장하는 시간으로 받아들여보려고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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