눈을 감았다 뜨니 반나절이 지나가있었다. 나는 살아남았다. 하지만 살아남았단 말은 이전과 같은 삶으로 돌아왔다는 뜻이 아니었다. 리셋(reset)의 의미를 사전에서 찾아보니 데이터를 처리하는 기구 전체나 일부를 초기 상태로 되돌리는 일이라고 적혀 있었다. 가슴에는 흰색 써지 브라가 입혀져 있었다. 가슴 위쪽에 선명한 칼자국이 남았다. 수술은 끝이 아닌 시작이었다. 의사는 암조직을 떼내어 어떤 상태인지 조직 병리검사를 통해 알 수 있다고 말했다. 암이 아니었으면 좋겠다는 의사의 말이 차갑게 들렸다. 검사결과를 기다리는 동안 매일매일 속이 탔다.
아니길 바라는 마음에 부처님, 하느님, 천지신명님께 기도했다. 절, 교회는 물론, 성당에는 한 번도 가 본 적이 없었는데 성모마리아님께까지 빌었다. 천주교 신도인 친구가 초도 켜줬다. 뭔가가 있을 거라는 조짐은 있었지만 아니기를 바라는 믿음은 금세 깨졌다. 나는 암이 맞았다. 불행 중 다행이라면 0기, 제자리암이었다. 또한 잔여암이 존재해 한 번 더 가슴을 열어 절제연부위에 남은 것들을 떼 내야 한다고 했다. ‘아무리 그래도 그렇지 왜 나야?’ 원망, 미움, 증오는 화살이 되어 다시 나를 향해 돌아왔다. 지금껏 잔병치레는 많았지만 건강에는 문제가 없었으니까. 이유가 뭔지, 뭐가 잘 못된 건 지를 찾고 싶었다. 원인을 찾으려 할수록 내 병을 온전히 받아들이지 못했다. 지금도 내가 왜 암에 걸렸었는지 명확한 이유를 알 수 없다.
돌이켜보면 당연했던 일상들 속 크고 작은 스트레스가 많았으리라 짐작된다. 잦은 회식과 야근, 회사일과 집안일의 크고 작은 문제들이 쌓이며 내 몸에도 나타났던 것일 테지. 내 몸은 늘 팽팽한 고무줄처럼 긴장돼 있었다. 지금도 일을 하다 보면 ‘왜 이렇게 몸이 경직돼 있냐’는 말을 듣곤 한다. 그럼 나는 ‘실수하지 않으려고요’ ‘이왕이면 잘 하려고요’라고 대답한다. 회사를 다니며 실수할 때마다 크게 혼난 기억이 있다. 처음 맡아본 대다가 급하게 들어온 건이라 설정값을 잘못 입력해 수습이 필요한 상황이었다. 팀장님이 크게 호통을 치셨는데 모든 게 다 내 잘못 같아 크게 상처받았다. 나는 누군가에게 피해 주는 걸 매우 싫어하는 편이다.
살면서 누군가를 미워한 적은 있지만 나쁜 마음을 먹은 적은 한 번도 없는데. 신은 내게 왜 ‘암’이라는 형벌을 내려주셨을까. 친구들은 0기라 다행이라며, 하늘에 계신 어머니가 도와주셨다며 심심한 위로를 건넸다. 수술 후 가슴의 감각이 무뎌졌다. 시간이 흐르면 흉터가 아물 줄 알았는데 수술 자국은 여전했다. 방사선을 하며 처음으로 걷는 게 힘들 수도 있다는 걸 알았다. 몸이 물먹은 솜처럼 축 늘어진 채 있는 것 같다. 방사선으로 암이란 녀석을 얼씬도 못하게 태워버리길 바랐다. 무딘 감각과 개미가 기어다니는 것처럼 간지러운 살갗의 고통과 함께 뜨거운 방사선 빛을 견뎌냈다. 차라리 유전병이면 부모님을 원망하기로 하며 유전자검사도 마다하지 않았었다. 그러나 내게 유전인자는 발견되지 않았다. 그러니 내가 암에 걸린 건 ‘우연’인 것이다.
사람들은 암에 걸리는 건 교통사고와 같다고 표현했는데 그 말이 딱 맞았다. 그래도 나는 미련이 있는지 ‘그게 왜 나지’라며 하늘에게 화풀이를 했다.
나는 2024년 3월, 4월 두 번의 수술 후 두 해의 봄을 건너왔다. 설령 내 병명이 발생한 이유에 대해 알게 됐다 한들 이전으로 돌릴 수 없으니. 난 내가 두 번째 다시 태어났다고 받아들였다. 2회차 인생은 힘들어도 아파도 오래 참지 않기로 한다. 나는 나만의 약속 몇 개를 만들었다. ‘스트레스받지 않기’ ‘술 마시지 않기’ ‘아프면 병원 가기’ 화가 나는 일이 있으면 대화로 풀고, 조금만 아파도 병원에 가고, 술은 입에도 대지 않는다.
건강식만 먹을 수 없으니 라면이나 매운 음식은 가끔 먹는다. 먹는 걸로 스트레스를 받을 순 없으니까. 이전과 비교할 수 없는 몸이지만 그렇게 보이지 않기 위해 노력한다. 한동안 나는 ‘병에 걸렸는데 일을 할 수 있을까’를 생각한 적도 있었다. 나를 써주는 회사가 있을까. 생각의 소용돌이에 빠지게 되면 무기력하게 있게 된다. 나는 뭐라도 움직이는 일을 하기로 마음먹었다.
카페에서 커피를 타고, 치킨을 튀기기도 포장하기도 한다. 몸이 고되기는 하지만 서비스업을 하며 손님들을 만나며 설명해 주고 전달하는 이 일이 재밌다. 내가 정말 살아있다고 느끼니까. 실수로 잘못 나간 치킨을 보며 탄식하는 나를 보며 나보다 열 살 어린 매니저가 말했다.
“이렇게 하면서 느는 거죠” 긴장을 풀어주려는 듯 너스레를 떠는 그가 쌩긋 미소 짓는다. 그의 말을 듣고 안도감이 들었는지 상체에 힘이 풀렸다. 처음은 익숙하지 않아 늘 어렵다. 나는 내 안의 리셋 버튼을 눌러 초기화가 됐지만 다시 채워나갈 것이다. 내가 할 수 있는 것들에 최선을 다하는 마음으로 말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