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빛과 물질에 관한 이론』
오랜만에, 엄청난 소설을 만났습니다! 미국 작가 앤드루 포터의 단편소설집인데요, 바카라의 제목으로 쓰인 <빛과 물질에 관한 이론>은 시간이 멈춘 듯한 느낌을 선사하는 강렬한 작품이었어요.
다른 사람이 당신을 채워줄 수 있다거나 당신을 구원해 줄 수 있다고 추정하는 것은 순진한 생각이다. 나는 콜린과의 관계에서 그런 식의 느낌을 받아본 적이 없다. 나는 다만 그가 나의 일부, 나의 중요한 일부를 채워주고 있고, 로버트 역시 똑같이 나의 중요한 또 다른 일부를 채워주었다고 믿을 뿐이다.
앤드루 포터/김이선 [빛과 물질에 관한 이론] 중에서
어느 날 우연히 알게 된 이 바카라 제목이 독특해서 도서관에 가 대출을 했습니다. 제목은 딱 물리학 바카라인데 소설이라기에 궁금했거든요. 집에 가면 할 일이 산더미라서, 잠시 휴식할 겸 조금만 읽고 가겠다는 마음으로 바카라을 펼쳤습니다.
그런데 웬걸! 눈을 뗄 수가 없었습니다. 내가 생각하고 있던, 정확히 그것을 섬세한 문체로 표현하는 데에 정말 몇 초간 숨을 멈출 수밖에 없었답니다. 너무나 놀란 나머지, 입이 떡 벌어지고 몸을 움직일 수도 없었습니다. 누군가 봤다면 정지 화면인 줄 알았겠지요. 순간 내 마음을 고스란히 들킨 듯한 기분이 들었고, 다음 순간에는 내 감정이 잘못되었거나 내가 나쁜 사람인 게 아니라고 말해주는 듯한 기분이 들었습니다. 다시없을 위안이었습니다. 작품 제목도 두고두고 묵상하게 됩니다. 작가님은 천재인가요.
바카라에는 모두 열 편의 단편소설이 실려 있습니다. 그중 이 작품, <빛과 물질에 관한 이론>을 가장 먼저 읽었는데요, 정직하게, 이 정도의 강렬함을 주는 작품은 더는 없었습니다. 단편을 이렇게 잘 쓸 수 있다니, 정말 놀랍네요. 이 작품은 작가의 데뷔작이며 플래너리 오코너상을 받았다고 해요.
또 인상적이었던 것 한 가지. 여러 작품들에서 '얘기하고 싶으냐' 묻는 대목이 나옵니다. 마음이 힘들어 보이는 상대방에게 그 일 혹은 감정에 대해 말하고 싶은지 묻는 겁니다. 깜짝 놀랐어요. 마음을 알아주고 도움이 되려는 의도를 표현하지만 함부로 위로하려 하거나 무리해서 말을 쏟아내게 하지도 않는, 전적으로 상대에게 주도성을 부여하는 모습. 이렇게 내놓고 물을 일인가, 싶었지만, 그럴 일이 맞는 것 같습니다.
우리는 보통, '마음이 힘들 테니 털어놓고 싶을 거야'라고, 배려라는 이름의 부담을 주기도 하지 않던가요. 혹은 '힘들겠네'하고 지나쳐버리기 일쑤지요. 우리에게는 이런 섬세한 배려와 상대를 주인공으로 세워주는 다정함이 필요합니다.
이 외 다른 작품들은 마음에 울림이 있는 작품들도 있었고 한 번 읽어서는 잘 와닿지 않는 것들도 있었습니다. <구멍>이나 <머킨> 같은 작품들은 역시 좋았어요. 어쩌면 문화적 차이로 인해 덜 와닿는 이야기들도 있으리라는 생각도 듭니다. 워낙 섬세하고 미묘한 작품들이거든요.
그래서 원서로 읽고 싶은 욕심은 전혀 생기지 않네요. 아마도, 문장들을 해석해도 작품으로는 이해하지 못할 테니까요. 훌륭하신 번역가님들에 의존하기로 합니다.
그러나 얼마 후 나는 원서를 검색하고 있었습니다. 이 작품을 통으로 흡수하여 내 안에 간직하고 싶은 열망이 사그라들지 않았죠. 결국 국내에선 품절된 것을 굳이 중고도서까지 찾아내 구매하고 맙니다. 낭독을 업으로 하는 사람이라 그런지, 묵독보다 낭독이 더 깊이 와닿듯, 번역서도 좋았지만 원서를 읽을 때 감성이 훨씬 강렬합니다.
이 작품이 너무 좋아서, 도서관에 있는 작가의 다른 바카라들도 모두 빌려왔답니다. 물론 모두 읽었죠. 심지어 『빛과 물질에 관한 이론』은 다 읽고 새 바카라을 주문해 버렸어요. 전문용어로 '소장 각'이라고..
이토록 반해버린 바카라이지만 한 가지 옥에 티가 있네요. 바카라 표지가 저는 영 마음에 들지 않습니다. 자칫 오해할 수 있지 않을까요? 앤드루 포터는 내밀한 정신세계를 말하고 있는데 남녀의 나신이라니요.. 편집자의 의도가 있겠으나 저로서는 헤아릴 길이 없으니 그저 아쉬울 뿐입니다.
나는 그제야, 우리 사이에 지금껏 말을 넘어선 교감이 존재했으며, 앞으로도 영원히 존재하리라는 것을 깨닫게 됐다.
앤드루 포터/김이선 [빛과 물질에 관한 이론] 중에서