영화 <오디세이>
(약간의 스포일러를 포함하고 있습니다.)
크리스토퍼 놀란에게 이미 어떤 수식어도 필요 없다는 걸 알면서도, 영화를 보는 내내 이건 그의 필모그래피 중에서도 다른 층위에 있다는 생각을 지울 수 없었습니다. 각본도 그가 썼다는 사실! 이제야 비로소, 나는 놀란 감독의 영화라면 무조건 보겠다,라는 다짐을 하게 되네요.
천병희 번역의 『오뒷세이아』를 읽은 지도 벌써 5~6년이 지난 것 같아요. 워낙 방대한 분량의 작품이고
글이 쓰인 형식도 우리에겐 독특하기 때문에 당연히 그 내용을 모두 기억할 수는 없고 전체 흐름과 몇몇 굵직한 사건들, 그리고 읽었던 당시의 소감 정도가 남아 있습니다. 바카라을 읽는 건 원래 그런 거잖아요.
우리의 놀란 감독님은 고대의 대서사시를 굉장히 멋지게 재해석했습니다. 어쩌면 그저 영웅의 모험담으로 여겨질 법한 이 방대한 이야기를 우리 자신의 것으로 받아들일 수 있는 영적 성장의 이야기로 들려줍니다.
신의 법칙을 거스른 행위로 인한 문명의 붕괴와 그것을 깨달은 자의 죄의식.
그리고 스스로 영웅적 태도를 갖는 대신 순리에 자신을 맡기고 그저 따라 흘러가기.
작품은 일관되게 이것을 호소하고 있습니다. 그리고 결국 모든 것을 내려놓고 새로운 임무를 수행하게 함으로써 미약하나마 자신의 행위를 끝까지 바카라임지라고 합니다.
원작에서는 별의 별일을 다 겪으며 집으로 돌아오는 데 10년이 걸린다는 사연이지만, 놀란 감독의 오디세우스는 '집으로 돌아올 준비가 되지 않은' 오디세우스를 그립니다. 고통 속에 허덕이며 간절히 귀향을 원하지만 무의식적으로, 자진해서 길을 잃는 것이지요.
트로이 전쟁에서 자신이 한 일이 무엇이고 그 결과가 어떠했는지를 분명히 알게 됨으로 온 죄바카라감과 슬픔을 소화시키지 못했던 오디세우스. 고대판 PTSD였습니다. 그를 사랑하게 된 칼립소가 망각의 꽃잎을 먹여 7년이나 붙잡아두지만, 결국 그 시간들도 오디세우스 자신의 의지였을 겁니다.
영화의 후반부, 오디세우스가 걸인으로 위장해 페넬로페에게 제삼자의 관점인 듯 가장하여 자신의 속내를 모두 내보이는 장면에서는 한없이 눈물이 흘렀답니다. 어찌나 계속 눈물이 나던지요. 할리우드 블록버스터 영화를 보며 그리 울게 될 줄 누가 알았을까요.
자아 성찰을 넘어, 고해성사와도 같은 그 말들을 아테네 여신도 눈물을 흘리며 함께 듣고 있었죠. 원작에서 아테네 여신은 이 모든 여정에서 오디세우스를 돕는 수호신 같은 역할을 하지만, 이번 영화에서는 오디세우스 자신의 내면, 그가 가진 죄의식의 발현이었습니다. 환영받기는커녕 위장한 채 나타나 아내에게 모든 걸 털어놓은 뒤에 오디세우스는 내면의 평안을 얻었을까요?
그 밤, 걸인을 통해 오디세우스의 내면을 들은 페넬로페는 다음날 구혼자들을 상대로 시험을 거쳐 한 사람을 선발해 재혼하겠다고 선언합니다. 그러나 페넬로페는 그 걸인이 오디세우스임을 알아챘고, 사실은 구혼자들이 아닌 오디세우스를 시험하려 한 것이었죠. 그가 고향으로, 가족에게로 돌아올 준비가 되었는지 알아보려 한 것입니다. 어쩌면 오디세우스에게 환대받을 기회를 준 것이기도 하고, 정신 차리라고 자극을 준 것이기도 하다고 생각해요. 그 모든 전환이 자연스러웠고 구혼자들을 당당히 물리치는 오디세우스의 모습은 또 얼마나 멋지던지요.
배우들의 내면 연기가 참 좋았습니다. 모두가 걸인으로 생각하는 와중에 텔레마코스가 아버지를 알아보는 장면과 구혼자들과의 결투 중 "Dad!" 하고 부르며 무기를 던져 주는 장면은 또 얼마나 가슴 벅차던지요. 배우들이 모두 좋았어요. 캐스팅에 반대하고픈 경우가 없었고, 모두 외모도 출중하고 연기력도 뛰어난 배우들이었죠.
개인적으로 딱 한 가지 아쉬운 점은 배우들이 좀 늙었다는 점입니다.ㅎㅎㅎ
아무리 20년 만의 귀향이라 해도, 맷 데이먼은 낼모레 환갑이잖아요? 근육을 키워 몸을 잘 만들었지만, <순수의 시대>에서의 신하균과 마찬가지로, 아니 그보다 더, 몸의 탄력이 무척 저하된 것은 가릴 수가 없네요. 물론 다른 배우들과 세대가 맞긴 했습니다. 이거 안 맞으면 정말 큰일.^^
바카라에서는 모든 것이 억지스럽고 연극적으로 느껴졌었지요. 구전되던 이야기를 글로 정리했으니 미사여구도 만만치 않았고요. 나의 삶과 동떨어진, 상식적으로 이해하기 어려운, 신화시대의 영웅 모험담이라는 생각을 했던 기억이 납니다.
그러나 크리스토퍼 놀란 감독은 현대인의 가슴을 후벼파는 환상적인 해석을 내놓았네요. 천재임을 인정하지 않을 수 없어요. 캐스팅 외에는 영화에 대한 아무런 정보 없이 관람했는데, 그래서 더 좋았고 감동의 밀도가 높았습니다. 다시 볼 거예요!
영화관을 나와 집으로 오는 길이 내내 울적했습니다. 고향으로 돌아갈 수 없었던, 오디세우스의 마음 아픈 사연이 강하게 들어왔기 때문이에요. 영화는 분명 희망을 품고 있지만, 내 마음에는 마치 판도라의 상자처럼 희망만은 들어오지 못한 걸까요. 혹은 현재 내 마음이 빛보다는 그림자에 더 끌리고 있는 걸까요.
집에 오자마자 바카라장에서 이 바카라을 찾았는데, 『오뒷세이아』를 손에 잡으려니 그 옆에 꽂혀 있는 『일리아스』까지 눈에 밟혔고-순서로는 이게 먼저니까- 두 권 다 꺼내자니 너무 부담스러웠고, 어쨌든 『오뒷세이아』를 꺼냈는데 읽고 싶은 마음 굴뚝같지만 읽을 바카라과 읽은 바카라(후기 쓸 바카라)들이 너무 많이 부담스러웠고, 그럼에도 이 바카라은 다시 읽어야겠고 그런 마음이네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