영화 〈악마는 프라다를 입는다 2〉 리뷰
메릴 스트립을 좋아합니다.
에밀리 블런트도 좋아합니다.
〈악마는 프라다를 입는다〉 1편을 재미있게 봤고, 좋아하는 두 여배우를 더욱 사랑하게 된 작품이었죠.
예상치 못했던 20년 만의 속편 소식에 설레며 기다렸다가, 찬란한 봄 연휴 첫날에 보고 왔습니다.
결론부터 말하자면, 혹평도 있던데 저는 꽤 흥미롭게 관람했습니다.
세 줄 요약을 하자면 이렇습니다.
강렬함과 악마적인 재미는 다소 줄었다.
시대의 변화가 충실히 반영되었다.
인물들이 살아온 20년의 여운이 깊었다.
미란다 프리슬리의 유명한 대사, 기억나시죠?
"That's all."
이번에 홍보차 내한했을 때, 앤 해서웨이가 메릴 스트립에게 팬 서비스로 이 대사를 한 번 날려 달라고 했다잖아요. 여성스럽고 우아하면서도 차갑고 도도한 그 목소리로 툭 뱉는 한 마디. 영화이기 때문이지만, 기가 막히면서도 몹시 매력적이었죠.
속편에서 이 대사는 단 한 번 등장한 것 같아요. 은근히 아쉬웠습니다.
그만큼, 표독스러운 미란다의 모습은 확연히 줄었습니다. 전편에서 우리를 마음 졸이게 했던, 까탈스럽고 이기적이며 상대를 무시하는 태도가 거의 사라졌어요. '사람이 변했다' 수준이라 할 만큼요.
화려한 패션계의 면모를 강렬하게 보여주던 전편의 맛도 조금 약해진 듯 느껴졌습니다. 이미 강렬한 맛을 본 관객들을 더 기함하게 하기란 애초에 어려운 일이었을 거예요.
그래도 이 점들이 그리 섭섭하지는 않았습니다. 아래의 이유들 덕분에요.
세계적인 패션 잡지 〈런웨이〉는 디지털 시대의 도래와 함께 크게 축소되어 있습니다. 전성기는 지나간 듯 보이고, 정체성의 위기마저 감지됩니다. 대단히 현실성 있는 설정이에요.
영화는 전체적으로 〈런웨이〉의 위기를 극복하려는 여러 인물들의 고군분투를 통해 이야기를 풀어냅니다.
눈에 띄는 장면도 있었어요. 미란다의 제1 비서가 늘 그림자처럼 곁에 붙어 그녀의 말실수를 지적하는 모습인데요. 갑질과 성희롱 문제가 법적 분쟁으로까지 번지는 요즘 세태를 꽤 날카롭게 반영했다고 생각했습니다.
초반 몇 분 동안 영화가 기본 설정을 속사포처럼 쏟아내는 방식도 흥미로웠어요. 숏폼에 길들여진 현대 관객들에게 맞춘 연출처럼 느껴졌거든요. 그렇게 했어도 러닝타임이 2시간이었으니, 제작진의 고민이 깊었겠다 싶었습니다.
이것이 이번 속편에서 가장 마음에 남은 부분인데요,
20년이라는 시간이 흐른 지금, 각 인물들은 더욱 단단한 전문성을 갖췄을 뿐만 아니라 인격적으로도 한 뼘씩 깊어져 있었습니다.
20년간 언론계에 몸담은 앤디는 기사를 끝내주게 써내는 전문가가 되었고, 어려움을 감당하고 돌파하려는 의지와 여유가 빛났습니다.
얄미웠던 에밀리는 여전히 기막힌 일을 벌이지만, 결국 먼저 손을 내미는 성숙한 선택을 합니다.
그리고 우리의 미란다. 그녀야말로 가장 많이 달라진 사람입니다.
자신의 커리어에 목숨을 걸던, 안하무인의 일 중독자였던 그녀가 이제는 '사람'을 봅니다. 도움을 청할 줄 알고, 감사할 줄도 알게 되었어요.
무엇보다 탁월한 편집장을 넘어 '조직을 바라보는 리더'의 면모를 갖추었습니다. 자신의 커리어만이 아니라 더 먼 미래를 내다보며 〈런웨이〉를 지켜내고자 하고, 패션 산업을 순수하게 사랑하는 마음을 드러내죠.
많이 유해진 그녀의 모습, 이것이 시간의 힘이겠지요.
그새 스무 살이나 더 먹었는데 사람이 똑같으면 되겠습니까. 더 넓어지고 깊어지는 것이 당연지사죠.
바로 이 점 때문에, '악마적인 재미'가 덜어진 결과가 되었을 것입니다. 전반적인 긴장감도 덜하고요. 조금 아쉽긴 하지만, 저는 성숙해진 인물들을 보는 마음이 더 흡족했습니다.
소중한 사람, 나이젤
전편에서 극적인 배신을 당했던 나이젤은 여전히 이곳에 남아 있습니다. 남아 있을 뿐 아니라, 미란다에게 없어서는 안 될 조력자가 되어 있어요.
나이젤은 이런 인상을 줍니다. 바람이 지나가기를 기다리며 누워 있는 풀 같은 사람, 내일 쫓겨날지언정 오늘 할 일은 하는 사람, 흔들리지 않고 중심을 지키며 사람을 바라볼 줄 아는 사람. 이런 인물은 든든함을 넘어 조직의 구원자이기까지 합니다. 때가 되어야 알게 되는 것이지만요.
미란다의 남편 — 비중은 작지만 중요한 존재
전편과 달리, 지금의 미란다 곁에 있는 남편은 비중은 작아도 중대한 인물입니다. 미란다가 넘어지지 않고 중심을 잡을 수 있도록 묵묵히 지지하고 격려하죠. 이런 사람을 곁에 두게 된 것 자체가 미란다의 변화 중 하나일 것입니다.
암컷 승!
〈런웨이〉를 인수하려던 성급하고 어설프고 호들갑스럽던 계획은 수포로 돌아가고, 또 다른 중대한 인물이 그 모든 것을 가져갑니다. 스포일러는 여기까지만.
아무튼, 암컷들의 승리입니다.
그럼에도 아쉬웠던 것들
지나치게 극적인 서사에 기댄 전개- 위기를 돌파하게 해주는 한 줄기 빛이, 너무 갑작스럽게 그냥 등장해 버렸습니다. 조금 더 긴장감을 주고 애태우며 펼쳐졌더라면 더 좋았을 것 같아요.
패션을 보는 재미의 아쉬움- 전편이 워낙 강렬했기에 뛰어넘기 어려웠을 것입니다. 예를 들어, 전편에서 벨트를 고르며 "블루라고 다 같은 블루가 아니다"라는 말로 앤디를 완전히 기죽이던 그 장면처럼, 패션에 잠시나마 집중하게 만드는 디테일이 있었다면 이 아쉬움이 조금은 채워지지 않았을까 싶습니다.
20년 만의 속편이라니, 할리우드이기 때문에 가능한 일 아닐까요.
배우들이 모두 그대로 돌아왔다는 사실이 경이롭고도 반갑습니다. 특히 에밀리 블런트. 지난 20년 사이 유명세가 높아져 이제는 주연급 배우임에도 불구하고, 비중이 적고 어설픈 캐릭터인 에밀리 역을 변함없이 맡아준 것에 경의를 표합니다. 상업성뿐만 아니라 작품성과 팬들을 향한 배려까지 담긴 선택이라 생각해요.
미란다의 레드 드레스가 몹시 탐나지만,
쨍한 빨강 하이힐이라도 사고 싶어지는 영화였습니다.
아, 흰 뿔테 안경과 짙은 뿔테 선글라스도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