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아... 그런 뜻이 아니고요! 보통 인원수가 많은 대기업이면 그만큼 사람을 만날 기회도 선택의 폭도 훨씬 넓지 않나 해서 드린 말씀이었어요.”
내가 당황한 기색을 숨기지 못하고 분위기를 수습하려 하자, 민수 씨는 단호하고 무게감 있는 목소리로 대답했다.
“저는 온라인 게임 내 연애는 절대로 안 된다고 생각합니다. 사내 소개팅 제안이 들어온 적이 몇 번 있었지만 무조건 거절해 왔고요.”
납득하기 힘들다는 듯 내 눈이 동그랗게 커지자, 그는 낮고 차분한 목소리로 말을 덧붙였다.
“저희 회사가 워낙 커서 직원이 엄청 많아요. 그냥 지금 우리 눈앞에 보이는 이 여의도 한복판을 지나는 행인들이라 생각하시면 됩니다. 완벽하게 타인인 거죠.”
소규모 온라인 게임에 다니는 나로서는 한 다리만 건너면 직원들 속사정을 알 수 있었다. 반면 수만 명이 넘는 대기업의 울타리 안에 있는 그에게 회사 동료란, 그저 길거리를 메운 무수한 스쳐 지나가는 인파 중 하나일 뿐이었다.
'오히려 서로를 잘 모르면 소문날 염려도 없고, 연애하기엔 더 수월하지 않나?'
보통 나이가 들면 고집의 모서리도 닳아 뭉툭해지고, 정말 마음에 드는 사람이라도 나타나면 스스로 세운 철칙쯤은 자연스레 무너지기 마련이다. 아무리 엄격한 기준을 세워 두었더라도 매일 같은 공간에서 얼굴을 마주하고 부대끼다 보면 없던 호감도 스르륵 피어나지 않을까?
어느덧 쉰이라는 나이에 도달한 남자. 젊은 날의 뾰족함은 시간이 흘러 유연함으로 바뀌었어야 마땅한데 그는 여전히 자기만의 딱딱한 기준을 갖고 있었다.
이 남자는 철저한 원칙주의자인 걸까, 아니면 유난스러운 고집불통인 걸까.
10년이 넘는 긴 세월 동안 연애를 쉰 까닭은 아마 스스로 쌓아 올린 저 단단하고 융통성 없는 벽 때문이었으리라.
그때, 그가 흐름을 깨고 뜬금없는 질문을 던졌다.
“아까 제가 물어봤었죠. 배고픈 거 잘 참냐고요. 사실은 예전 여자친구가 배가 고프면 울고 그랬거든요.”
그가 마지막으로 연애를 한 게 10년도 더 전이라 했으니 그가 20대나 30대 시절의 이야기일 터였다.
'배가 고파서 운다고…? 전 여자친구가 성격이 좀 이상했나?'
“아… 배가 많이 고프면 눈물이 날 수도 있죠. 당이 떨어지면 마음도 약해지니까요.”
나는 이해할 수 없는 상황에 영혼 없는 대답을 했다.
“그냥 칭얼거리는 수준이 아니라 정말 서럽게 통곡을 했습니다. 그것도 길거리 한복판에서요. 그때 깨달았죠. 허기짐이라는 본능을 통제하지 못하는 사람이 있구나.”
'배가 고파서 운 게 아니라, 배가 고픈데도 자신을 챙겨주지 않는 남자친구에게 서운했던 건 아니었을까?'
이런 생각이 들어왔지만, 차마 말할 수는 없었다.
“그래서 저는 사람을 볼 때 식탐이랑 참을성을 중요하게 봅니다. 혹시 배고프면 화가 나거나 눈물이 나지는 않으시죠?”
“네, 뭐… 저는 배가 고프면 바로 먹는 편이라서요...혼밥도 잘하고요. 요새 길거리에 먹을 게 얼마나 많은데요. 사 먹으면 되잖아요.”
“다행이네요. 참 성숙한 분이십니다. 그런데 너무 제 얘기만 했네요. 혹시 실례가 안 된다면 마지막 연애가 언제였는지 물어봐도 될까요?”
나는 헤어진 지 1년 좀 넘었다고 적당히 둘러대며 웃어넘겼다.
사실, 그를 마주하고 앉아 있는 바로 오늘이 그 지난 연애가 끝난지 정확히 1년째 되는 날이었다.
가슴 한구석에 여전히 선명하게 남아 있어 잊으려야 잊을 수 없는 날짜. 아직은 잊혀지지 않은 그런 날이다. 그렇다고 민수 씨에게 "오늘이 그 사람과 헤어진 지 딱 1년 되는 날이에요.” 라고 솔직하게 털어놓을 수는 없었기에 얼버무릴 수밖에 없었다.
작년 오늘만 해도 나는 갑작스러운 이별 통보에 세상이 무너져 내린 듯 울고 있었다. 그렇게 서럽게 울던 내가 어느덧 시간이 흘러 아픔을 털어내고, 또 다른 누군가와 새로운 시작을 엿보며 이 자리에 앉아 있다는 사실이 참 묘했다.
게다가 하필 민수 씨와 만난 여의도는 그 전 연인이 살고 있는 동네였다. 그럴 리 없다는 걸 알면서도 혹시나 길을 걷다 스쳐 지나치지는 않을까, 혹시 그가 나를 보지 않았을까하는 부질없는 생각이 스쳤다. 헤어지고 1년이라는 세월은 속절없이 빠르게 흘렀다. 나이가 들수록 시간의 태엽은 어째서 이리도 가파르게 돌아가는 걸까. 날짜가 날짜이다 보니 문득문득 그 사람이 떠올랐다. 결코 좋은 기억으로 남지 않은 사람이었기에, 내 앞에 있는 민수 씨만큼은 그 사람보다 조금 더 다정하고 나은 사람이기를 속으로 가만히 바라보았다.
어느덧 여의도의 하늘은 붉은 주황빛으로 물들어가더니 이내 짙은 어둠을 드리우기 시작했다. 강바람이 선선함을 넘어 서늘한 쌀쌀함으로 바뀌어갈 때쯤, 우리는 자리에서 일어났다. 민수 씨는 내게 다음 약속을 기약하는 말을 던졌다.
“다음에 저희 동네에 놀러 오시면 족발 먹으러 가요. 진짜 맛있는 집이 있거든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