첫 번째 만남보다는 한결 편해졌다
초록색 문을 밀고 들어선 식당 안은 은은하고 따뜻한 크림빛으로 채워져 있었다. 크림톤의 벽은 민수 씨가 입고 온 셔츠의 색과 겹쳐보였다. 오렌지빛 조명의 가게 내부는 카운터 공간이 반, 테이블 공간이 반이었다. 가게 내부에는 작은 테이블들이 촘촘하게 박혀있었다. 빼곡하게 놓인 작은 테이블들은 이 가게에 올 때마다 답답하고 불편했다. 그곳의 테이블은 내가 주문할 메뉴들이 다 올라갈 수 있을까싶은 사소한 불안감이 들어오는 크기이다. 이른 저녁에 방문한 덕에 가장 구석진 아늑한 자리가 우리를 기다리고 있었다.
그는 지난 첫 만남에서 머리끝부터 발끝까지 어둠을 껴입은 사람 같았다. 셔츠와 바지, 운동화까지 전부 검정색이였다. 그 차림으로 밤공기 속에서 뱉어내던 하얀 담배 연기는 그가 유일하게 뿜어내는 밝은색이었다. 그 가 입고 있던 무거운 색채의 옷과 그의 입에서 뿜어져 나와 허공으로 흩어지는 자욱한 연기는 그의 인상을 한층 더 어둡게 물들였었다. 하지만 오늘 그는 전혀 다른 느낌의 사람이 되어 있었다. 햇살 같이 환한 노란색 셔츠를 입고 왔고, 그 따뜻한 색감 덕분인지 그의 표정도 첫만남보다는 훨씬 밝아 보였다.
메뉴판을 펼치며 각자 먹고 싶은 메뉴를 하나씩 고르기로 했다. 나는 이 식당의 메뉴를 거의 다 먹어봤을 정도로 단골이었지만, 민수 씨는 이 식당에 처음 방문한 것이었다. 한참 메뉴를 보던 그가 샐러드 하나를 골랐다. 그 샐러드는 이 식당에서 내가 제일 선호하지 않는 메뉴였다. 속으로는 다른 샐러드가 훨씬 맛있다고 알려주고 싶었지만 이런 참견은 오랜 연인이나 가족에게나 허용되는 법이었다. 그는 그 샐러드를 선택했고 나는 그곳의 시그니처 파스타를 선택했다.
"저 보기보다 많이 안 먹어요. 뷔페에 가도 두 접시 이상은 절대 안 먹는 걸요."
그는 살이 많이 쪄서인지 먹는 것을 절제하는 모습을 보였다. 내가 물어본 적은 없지만 그는 하루도 빠지지 않고 헬스장에서 운동을 하고, 음식은 적게 먹는다고 말했다.
'그런데 왜 살이 이렇게 찐거지?'
'신진대사에 문제가 생길 만큼 어디가 안 좋은 걸까, 아니면 안 먹는다고 거짓말하는건가? '
'내가 아직 가보지 않은 50이라는 나이는 아무리 덜 먹고 운동을 해도 살이 찌는 건가? '
마흔과 쉰 그 사이에 있는 우리였기에 건강에 대한 염려도 조그맣게 피어올랐다.
''배고픈 거 잘 참으세요? ''
민수 씨가 내게 물었다.
''배고픈 거 참을 일이 있나요? 배고프면 밖에 나가서 사 먹으면 되는걸요. ''
배고픈 것을 잘 참느냐는 질문은 한 번도 받아보지 못한 질문이었다. 주변에 음식점이 수두룩하고, 편의점만 가도 먹을 것이 지천이기에 배고픔을 참을 일은 내 삶에서는 없었다.
도란도란 이야기를 나누다보니 어느덧 접시는 깨끗하게 비워졌고, 약속한 대로 계산은 내가 했다. 쿠팡 아르바이트로 번 돈보다 더 많은 금액이 나왔지만, 그날의 노동의 대가는 데이트 비용으로 요긴하게 사용되었다.
식당을 나와 발걸음을 옮긴 곳은 여의도 더현대였다. 그는 수년 동안 여의도에 발을 들일 일이 없었고, 더현대는 텔레비전에서나 봤다고 한다. 내가 더현대에 몇 번 와봤다고 하자, 민수 씨는 나에게 더현대를 안내해 달라고 말했다.
마침 행사가 있어서 번잡하고 소란스러웠던 여의도. 그 활기찬 소음을 뒤로하고 더현대의 에스컬레이터에 올라탔다. 필요 이상의 소비를 하지 않는 나에게 백화점은 익숙하지 않은 장소다. 내게 백화점이라는 곳은 어쩌다 한 번 식사를 하기 위해 찾는 곳일 뿐이다. 더현대 역시 겉보기엔 어디서나 볼 수 있는 뻔한 브랜드들이 입점한 평범한 백화점이지만 이곳의 진짜 매력은 공간 그 자체에 있었다. 답답한 일직선의 동선이 아닌 부드러운 곡선으로 길이 이어져 있었고, 1층부터 천장까지 시원하게 뚫려 있어 천장이 한없이 높았다. 위를 올려다보는 순간 눈과 마음이 탁 트이는 압도적인 개방감이 밀려왔다. 곳곳에 우쑥 서있는 식물들과 꼭대기 층에 자리한 거대한 정원까지 더해져 백화점이라기보다 하나의 거대한 도심 속 자연을 연상케 했다. 눈빛처럼 새하얀 내부와 그 안의 독특한 구조와 공간감 덕에 특별해진 이곳은 민수씨와 함께 다시 한번 와보고 싶다는 생각이 들었었다.
5층에 발을 디디는 순간 여의도 한복판이라는 사실을 까맣게 잊게 만드는 풍경이 눈앞에 펼쳐졌다. 탁트인 넓은 공간에 거대한 돔형 철골 구조가 웅장하게 놓여져 있었다. 바깥이 보이는 투명한 창을 통해 들어오는 자연광은 실내의 환한 조명에게 잡아 먹혀버렸다. 흙에 뿌리를 뻗고 자라나고 있는 푸른 나무들과 마구잡이로 놓여진 커다란 화분들은 백화점의 하얀 차가움을 잊게해주었다. 5층 곳곳에는 푸른 식물들이 저마다 자유롭게 자라고 있었고, 그 사이 사이의 길은 정형화되지 않아 어디로 발을 딛어야 할지 모르게 만들었다. 몇 번 방문해 본 경험으로 호기롭게 민수 씨를 5층으로 데려왔지만 그 거대한 숲속에서 그를 데리고 어느방향으로 걸어야할지 몰라서 조금 당혹스러웠다.
5층에서 목적없이 걷다가 1층으로 내려오니 더현대의 인공 폭포에서 흘러내리는 물소리가 시원하게 내 귓가를 때린다.
"저는 이번에 고유가 지원금 못 받았어요."
민수 씨가 살짝 입꼬리를 내리며 아쉬운 티를 냈다. 연봉이 높으면 대상에서 제외된다고 들었는데 주변에 못 받은 사람이 없어서 관심 밖이였는데 실제로 못받은 사람이 있었다. 괜히 투정하듯 말하는 그의 모습이 귀엽기도 하고 은근한 자랑처럼 느껴지기도 했다. 1층 루이뷔통 매장 앞을 지나치던 순간 민수 씨의 시선이 내 목에 매인 스카프로 향했다.
"이 스카프 브랜드네요?"
빌린 스카프라고 솔직히 말해야 할까 싶은 생각이 스쳤지만 굳이 말하지는 않았다.
특별할 것 없던 백화점 구경을 마치고 우리는 여의도 한강 공원으로 발걸음을 옮겼다. 민수 씨 지인이 여의도 한강 공원에서 7시에 분수쇼가 열린다는 정보를 줬다며 발걸음을 재촉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