그와 함께 걸어간 한강은 며칠 전 내리던 폭우의 습기를 완전히 흡수한 뒤였다. 강가에서 불어오는 선선한 바람이 우리를 스쳤다. 더운 여름이 오면 그리워질 날씨 였다. 계절이 좋아서 날씨가 좋아서 한강에 나온 사람들이 많았다.
"저번 주 수요일 폭우 때문에 집까지 오시는데 고생하셨다고 했죠?"
이 말은 단순히 날씨 이야기를 건네는 것 이상으로 다가왔다.
"와! 기억력 좋으세요. 요일까지 기억하시고."
기억의 결이 조금씩 흐릿해져 가는 마흔의 나에게, 일주일 전 스쳐 지나간 날과 요일을 선명하게 기억해 내는 그의 모습은 새삼 신기하고 놀라웠다.
'그나저나 그날이 수요일이었나?'
폭우가 내렸던 그날의 기억을 더듬어 보았다.
'그러고 보니 그날 저녁 퇴근하고 피티(PT) 수업을 갔었지. 수업 끝나고 나오는 길에 비가 쏟아지기 시작했었지. PT수업은 수요일이니까 그날은 수요일이 맞네. '
내 머릿속에서는 이미 희미해져 가던 거의 10일 전의 기억을, 민수씨는 또렷하게 담아두고 있었던 것이다.
민수 씨는 부드러운 미소를 지으며 나를 바라보았다.
"제가 관심 있는 사람에 대한 건 기억을 잘해요."
'관심 있는 사람...'
그 단어가 머릿속을 맴돌며 그가 나에게 관심이 있다는 확신이 들었다. 지인에게 내 이야기를 하고, 여의도 데이트 코스까지 알아봤다던 주선자의 말이 떠올랐다. 이 한강 데이트도 나와의 데이트를 위해서 그가 계획한 코스였던 것이다.
"7시부터 분수쇼를 한다고 했는데, 왜 안할까요? "
7시가 지나자 민수 씨가 민망해하면서 말했다. 혹시 반포대교 달빛 무지개 한강 분수쇼를 잘못안 게 아닌가 싶기도 했지만 우리 앞에도 분수 비슷한 것이 있긴 했다. 그 분수는 끝까지 작동하지 않았다.
우리는 한강이 시원하게 보이는 계단에 나란히 앉아 있었다. 주변 사람들의 웃음소리와 떠드는 소리가 뒤섞이는 공간 속에서, 민수 씨가 조용히 고개를 돌려 나를 보며 물었다.
"연애하면 얼마나 자주 보기를 원하세요?"
조심스러운 말투였다. 앞으로의 우리 관계를 염두에 두지 않고는 쉽게 나올 수 없는 질문이었다. 머릿속으로 바쁜 온라인 게임인의 일주일을 빠르게 굴려보았다. 평일에는 업무와 야근에 치여 살아갈 테니 결국 허락된 시간은 주말뿐일 터였다.
"음...일주일에 한 번 정도요?"
나는 고심 끝에 웃으며 대답했다. 서로의 집과 온라인 게임이 가까운 편도 아니니, 현실적으로 그 정도가 서로에게 부담 주지 않는 선이라 생각했다. 하지만 내심 이 질문을 먼저 꺼내준 그의 의도가 내심 싫지 않았다. 나와의 만남을 그리고 있다는 증거 같았으니까.
그가 먼저 연애관에 대한 문을 열어준 덕분에 나도 용기가 생겼다. 가슴속에 묻어두었던 호기심이 불쑥 고개를 들었다. 물어볼까말까 고민하다가 물었다. 오늘만큼은 왠지 물어봐도 될 것 같은 분위기였다.
"민수 씨는... 마지막 연애가 언제예요?"
10년 전, 누군가 나에게 마지막 연애가 언제였냐고 물었던 적이 있다. 그 순간 그가 나한테 관심이 있는 것 가다는 기대에 부풀었다. 하지만 안타깝게도 그 사람과의 인연은 거기까지였다. 그당시 마음이 싱숭생숭했던 나는 인터넷 대형 커뮤니티에 글을 올렸다.
‘남자가 마지막 연애를 물어보는 건 호감 신호일까요?’
그 사람을 좋아하게 되어버린 내 마음은 그 사람도 나한테 호감이 있다는 확신을 바라고 있었던 것 같다. 호감이라고 말해준 이들은 하나같이 이야기했다. 관심도 없는 사람의 과거 연애가 뭐가 궁금하겠냐고. 그 커뮤니테에서 투표를 진행했고 투표 결과는 반반이었다. 호감일 수도 있고 아닐 수도 있다. 댓글도 많이 달려서 사람마다 생각이 많이 다를 수 있다는 것을 알았다. 지금에 와서 돌아보면 특별한 마음이 아니어도 어색한 공기를 채우기 위해 던질 수 있는 가벼운 질문일 수도 있다는 생각이 든다.
그 깨달음과 별개로 나는 민수 씨에게 호감을 담아 같은 질문을 던진 것이였다. 마지막 연애가 언제냐고 묻자 민수 씨는 조금 당황하는 기색을 하더니 특유의 어색한 미소를 지으며 대답했다.
"10년도 더 됐어요."
주선자에게 그가 연애를 오랫동안 쉬었다는 말을 전해 듣긴 했었다. 하지만 연애를 오래 쉰 것이 무려 10년을 훌쩍 뛰어넘는 세월일 줄은 감히 상상조차 못 했다. 10년을 넘는다는 것은 어쩌면 15년 일지도 그 이상일지도 모른다. 그 긴 세월 동안 그는 대체 왜 아무도 곁에 두지 않았던 걸까? 예상치 못한 그의 대답으로 당황했지만 그 당황함을 숨긴채 다시 질문을 건넸다.
"워낙 회사 규모가 크잖아요. 거기서 만나보실 생각은 안 하셨어요?"
민수 씨는 당황하면서 대답했다.
"벌이 때문에 그러시는 건가요?"
나는 그저 대기업이라는 큰 울타리 속에서 자연스럽게 피어나는 로맨스를 떠올리며 가볍게 던진 질문이었다. 지금 다니는 작은 회사만 해도 사내 연애는 흔했고 결실을 맺어 결혼까지 골인한 커플도 있었다. 인위적인 소개팅이 아니라면, 매일 얼굴을 마주하며 함께 일하는 일상이야말로 온라인 게임인에게 가장 자연스러운 인연의 시작 아니던가...하지만 그는 내 의도와 전혀 다르게 받아들였다. 하이닉스 다니는 여자들은 벌이가 좋으니, 조건 데 만나보지 그랬냐는 식의 계산적인 시선으로 내 말을 받아들인 것 같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