빌린 물건들의 부조화
한창 나갈 준비로 분주하던 차에 민수 씨의 메시지가 도착했다.
“오늘 저 여의도 구경시켜주실 준비 되신거죠?”
화장도 하고 머리도 만지려면 손이 열 개라도 모자란 시간. 때마침 울린 알림에 답장을 보내는 일은 조금 귀찮고 번거롭게 느껴졌다. 하지만 상대가 기다릴까 봐 서둘러 답장을 보낸 뒤 다시 정신없이 외출 준비를 했다.
전신 거울 앞에 섰다. 빌린 검정색 가디건을 입고, 단색어 단조로움을 깨줄 루이비통 스카프를 목에 살그머니 둘렀다. 루이비통 스카프 역시 빌린 것이였다. 부드러운 실크가 목을 감싸자 시원하고, 고급스러운 촉감이 내 목덜미에 밀려 들어왔다. 그 촉감은 마음이 은은하게 들뜨게했고, 거울에 비친 내 입가에 옅은 미소가 지어지는 것이 보였다. 내심 신경 쓰이던 목주름까지 자연스레 가려주어서 고마웠다. 스카프에 빼곡하게 새겨진 루이비통 로고는 자칫 밋밋해 보일 수 있는 내 옷차림에 생기를 넣어주는 것 같았다. 몇 해 전 거금을 들여 산 스커트는 몇 번 입지도 않았는데 기운이 빠진 듯 색이 옅게 바래 있었다. 희뿌옇게 된 스커트를 보니 속상한 마음이 몰려왔지만 다른 대안이 없었기에 아쉬운 대로 그 스커트를 입었다. 색은 바랐지만, 소재는 톡톡해서 스커트의 모양을 잘 잡아주었다.
신발장 문을 열자 민수 씨와 첫 만남에 신었던 둥근 코의 메리제인 구두가 눈에 들어왔다. 발등을 투박하게 가로지르는 끈은 어딘가 촌스러운 구석이 있었다. 하지만 신발장 안의 명품 구두들을 두고 자꾸만 이 신발에 손이 갔다. 5cm가 채 안 되는 뭉툭한 통굽은 억지스럽지 않게 비율을 살려주면서도 내 발과 다리를 묵묵하고 편하게 받쳐주었다. 발등을 덮어주는 메리제인 구두의 끈은 걸을 때마다 신발이 벗겨질까 신경쓰이던 긴장감을 없애주었다.
마지막으로 빌린 루이비통 가방을 손에 들었다. 명품인지조차 모를 정도의 수수한 디자인이었다. 단지 가방 한쪽 구석에 루이비통 로고가 아주 작고 소심하게 음각으로 새겨져 있었다. 내 목에 두른 실크 스카프에는 이미 루이비통 LV 모노그램 로고가 수십개나 박혀 있었다. 화려한 스카프로 힘을 주었는데 가방마저 로고로 가득한 것을 들었다간 자칫 과하고 촌스러워 보였을 것이다. 그래서 그 존재감 없는 루이비통 가방을 드는 것이 제격이라는 생각이 들었다.
괜찮은 여자로 보이고 싶어 빌린 물건들과 내 몸의 편안함이 먼저라며 기어코 고집한 것들이 썩 조화롭지는 않았다. 어릴 적의 나라면 예뻐 보이기 위해 불편한 구두에 억지로 발을 구겨 넣었을 것이다. 하지만 시간이 흐르며 나는 알게 되었다. 남의 눈에 보이는 내 모습보다 나 스스로를 다치지 않게 돌보는 일이 더 중요하다는 것을 말이다. 잘 보이고 싶은 마음과 편안함을 고집하는 내마음이 뒤섞여서 만들어낸 이날의 소개팅룩. 어쩌면 내 모습과 닮아있는 것이 아닐까싶은 생각이 들어왔다.
시간에 쫓겨 비로소 현관문을 나섰다. 민수 씨와 두 번째 데이트 장소는 내가 제안한 여의도였다. 지하철에 올라타 시계를 확인한 순간 약속 장소에 제시간에 도착하지 못할 것 같다는 생각이 들었다. 그가 길에 서서 기다리는 것이 마음에 걸려 메시지를 보냈다.
“저 조금 늦을 것 같아요. 오늘 저녁 먹기로 한 식당에 먼저 들어가 계시겠어요?”
잠시 후 민수 씨의 답장이 도착했다.
“그냥 식당 앞에 앉아서 기다릴게요.”
그 문장을 보는 순간 깨달았다.
'민수 씨는 식당 안에 혼자 들어가 누군가를 기다리는 걸 좋아하지 않는구나.’
나는 혼자 식당에 먼저 들어가 있는 것에 별다른 거부감이 없어서 첫 번째 만남에서도, 그리고 두 번째 만남에서도 당연하게 식당 내부에서 보자고 제안했었다. 생각해보니 그는 매번 돌려서 그 제안을 거절했었다. 이유는 모르겠지만 식당에 혼자 들어가거나 식당 안에서 혼자 앉아 있는 것이 불편한 것 같았다. 다음부터는 식당안에서 보자는 제안은 하지 말아야겠다고 생각했다.
'여의나루역이 이렇게 지하 깊숙히 있었나? '
에스컬레이터를 몇 번이나 갈아타고 나서야 겨우 지상으로 나가는 출구가 보였다. 나는 빠른 걸음으로 걷다가 마음이 급해질 때면 가볍게 뛰기를 반복하며 약속 장소로 발걸음을 재촉했다. 발을 불편하게 하는 명품 구두 를 신었다면 이런 상황에서 뛰기 불편했을 것이다. 굽이 낮고 튼튼한 메리제인 구두를 신고 온 것이 천만다행이라 위안하면서 서둘러 약속 장소로 향했다.
가쁜 숨을 몰아쉬며 도착한 약속 장소인 식당. 식당 문 앞에는 지하를 향해 넓게 탁 트인 거대한 계단들이 이어져 있었는데 단순히 오르내리기 위한 계단이 아니었다. 야외 공연장의 객석 같았다. 완만하게 만들어진 넓고 큰 계단 중간 중간에는 나무와 식물들이 심어져 있었다. 그리고 계단에는 사람들이 자유롭게 앉아 바카라을 읽거나 도란도란 이야기를 나누며 저마다의 휴식을 즐기고 있었다.
그 평화로운 풍경의 한가운데에 익숙한 뒷모습이 눈에 들어왔다. 넓은 계단에서 앉아 살짝 쪼그린 자세로 핸드폰을 보고 있는 남자. 민수 씨였다.
"민수 씨, 뒤를 보세요. "
나는 도착했다는 카지노톡 메시지를 보냈다. 계단에 앉아 있던 민수 씨의 핸드폰 화면에 내 메세지가 뜨는 것이 보였다. 팝업으로 뜬 알림창을 확인하고 곧바로 일어서서 뒤를 돌았다. 그는 핸드폰을 대충 주머니에 쑤셔 넣으면서 긴 다리로 널찍한 계단을 성큼성큼 밟으며 나를 향해 걸어 올라오기 시작했다. 그때 내가 보냈던 카지노톡 메세지 옆의 숫자 1은 데이트를 마치고 헤어질 때까지 사라지지 않았다. 그는 부드러운 레몬빛이 감도는 노란색 셔츠를 입고 있었다. 노란색, 그 따뜻하고 밝은 색감은 그의 피부를 한층 더 환해 보이게했다. 차가워 보이는 그의 얼굴에 노란색 특유의 다정하고 포근한 느낌이 덧입혀지자 처음 봤을 때보다 인상이 더 부드러워 보였다. 나를 마주하자 그의 얼굴에 환한 반가움이 번졌다. 나는 늦어서 미안하다고 사과를 건내고 함께 식당으로 향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