긴 머리 짧은 머리

byAnima

걷기를 마치고 단지 안을 천천히 걸어가고 있는데 한 사람이 눈에 띄었다.

어깨를 넘는 긴 머리를 한 사람이다.

앞서가서 확인하지 않더라도 각진 어깨, 반바지 아래 그을린 탄탄한 종아리가 남자가 분명했다.


우리는 보통 남녀를 구분할 때 먼저 머리 모양을 떠올린다.

어깨까지 오거나 허리 가까이 찰랑거리는 머리를 보면 거의 여자인데 가끔 확실한 남자가 치렁대는 머리카락을 파마를 하거나 묶고 다니는 것을 볼 수 있다.

남자의 긴 머리가 보기 싫다는 사람이 있는데 내 경우는 눈에 거슬리지 않는다

이왕 기르려면 차라리 묶고 다니는 것이 나아 보인다.


남자가 머리를 묶은 것은 영화배우 스티븐 시걸에게서 처음 보았다.

거구의 남자인데도 꽁지머리를 한 것을 보고 어울린다고 생각했다.

외국은 남자들이 꽁지머리나 포니테일 스타일로 다니는 것이 드물지 않은 일이라는 것을 그때 알았다.

그 이후 어울린다고 생각하는 남자나 귀찮아서 내버려 두는 남자들이 생겨나 우리 거리에서도 종종 볼 수 있는 스타일이다.


남녀를 구분하는 화장실도 머리 모양으로 구분하기도 하는데 대부분은 아직도 구태의연하게 치마 입은 여자, 바지 입은 남자로 구별한다.

여자들이 활동하기 편한 바지를 입기 시작한 것이 언제 적인데......


지나치게 짧은 머리를 한 여자는 스스로 의심할 바 없이 여자이기에 여자 화장실에 들어갔다가 사람들의 눈총을 받기도 하고 ‘여기는 여자 화장실인데요!’하고 치켜 뜬눈을 감수해야만 한다.

선입견대로 예쁘장하거나 아담한 키라면 아무리 짧은 머리라도 의심을 받지 않는데, 기골이 장대하거나 얼굴이 우락부락한 여자라면 한 번쯤은 눈총을 맞고 ‘나 여잔데요, 여자 맞다고요!’하고 증명이라도 해야 할 지경이다.

고등학교 때는 교칙상 단발을 고수해야 했고 예술계 빼고는 누구나 교복 입고 단발이라 자신의 개성을 드러낼 수가 없었다.

지금처럼 치마 길이를 줄인다거나 머리를 핀이나 리본으로 꾸밀 수도 없어 몰개성의 시기였다.

대학에 입학하고부터는 저마다의 개성을 살려 계속 기르거나 여고 시절의 연장처럼 짧고 가든하게 하고 다녔다.


어울려 다니던 친구 다섯 명 중에 한 명은 짧았고 세 명은 중단발인데 나만 어깨를 지나 넘실거리고 다녔다.

짧은 머리를 한 친구는 까무잡잡하기도 해서 가끔 화장실에서 오해를 받기도 했다.


졸업하기 전에 임용고시에 합격하여 졸업하고 동시에 발령을 받았다.

신임 발령을 받기 전에 며칠 간의 연수 과정이 있었다.

교사로서 갖춰야 할 기본자세를 숙지해야 한다고 세심히 읽고 있는데 ‘용모 단정’이 눈에 띄었다.


그때만 해도 용모 단정에 머리 길이도 해당하는 줄 알았다.

학교로 부임하기 전날에 긴 머리를 싹둑 잘라버린 것이다.

4년간 거의 자르지 않은 긴 머리가 잘려나간 후 허전하기도 하고 거울에 비친 내 얼굴이 어색하기만 했다.


학교에 부임하고 학생과 선배 교사들 앞에서 인사하러 단상에 올라갔는데 여교사들 머리가 생각보다 짧지 않았다.

심지어 같이 발령받은 동료들도 짧은 머리가 아니었다.

긴 머리라도 단정하게 묶거나 더 젊은 교사들은 그대로 찰랑거리고 다녔다.

그 후부터 다시 머리를 기르고 다녔다.


아무도 머리가 길다고 자르라고 하는 사람이 없었고 숱도 많고 윤기가 난다고 부러워했다.

갑자기 어렸을 때 세 자매를 차례로 앉혀놓고 큰 리본으로 머리를 묶어 주시던 엄니가 생각난다.

머리숱이 많아 다루기가 쉽지 않으셨으리라.


어느 날 과연구수업을 앞두고 신경 쓰여 어깨에 닿을 듯 말 듯한 단발로 잘랐다.

그 모양이 어울렸는지 한 동료가 ‘아니마님, 10년 후에 보고 싶어요. 이 모습이 10년 후에도 그대로일 것 같아요.’라고 말했다.

10년 후에도 머리 모양은 중단발을 유지했는데 그 동료를 만난 적이 없어 아쉬운 일이다.

머리 모양을 바꾸면 신변에 무슨 변화가 있을 것이라고 한다.

새 일을 시작하거나, 하던 일을 마무리하거나, 연애를 하거나, 반대로 실연을 당했거나......

어느 정도는 맞는 말이다.

할 일도 없는데 머리나 자르러 갈까 하는 것 외에는.


지금은 숱이 많이 줄었지만 그런대로 빈약한 티는 안 나서 긴 머리를 묶고 모자를 쓰고 다닌다.

이 머리 모양을 고수하는 것을 보고 긴 머리가 거추장스럽지 않냐고 한다.

미용실 가는 것이 귀찮은, 게으른 여자의 현상유지일 뿐이다.

한편으로 신상에 큰 변화가 일어나지 않아 머리카락 자를 일이 생기지 않기 바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