오늘 저 혼자인데, 걷나요?
네, 제 사전에 취소는 없어요.
한 명이라도 참가하면 걸어요.
요즘 걷기 공지에 주말은 꽉꽉 차는데 평일은 파리가 날고 있다.
더워서 그런가, 비가 와서 그런가?
날씨에 따라 달라지지 않는 나는 갑자기 한산해진 길이 의아하다.
저마다 일이 있겠다고 생각하지만 복잡다단한 삶을 내려놓고 매일 걷기와 온라인카지노에 글 쓰는 것밖에 뚜렷한 일이 없는 나로서는 무슨 일들이 그렇게 많이 생길까 의문이 생기기도 한다.
가족 행사, 친구 만나기, 모임 참석하기, 손주 돌보기, 아르바이트하기, 봉사하기, 취미생활, 배우기, 아픈 가족 돌보기 등 생각해 보니 한 가지 이상씩은 다 해당하는 것 같다.
굳이 내가 속한 한 가지를 꼽자면 가족모임인데 그것도 걷기 다음으로 내가 조절한다.
만사 제치고-사실 제칠 일이 없다-걷기를 1순위에 두는 나를 보고 사람들은 걷기 중독이라고 할 것이다.
이구동성으로 중독 맞네! 할 것이다.
표준국어대사전에 나와 있는 중독은 다음과 같다.
1. 명사-생체가 음식물이나 약물의 독성에 의하여 기능 장애를 일으키는 일.
2. 명사-술이나 마약 따위를 지나치게 복용한 결과, 그것 없이는 견디지 못하는 병적 상태.
3. 명사-어떤 사상이나 사물에 젖어 버려 정상적으로 사물을 판단할 수 없는 상태.
매일 걸으러 나가는 것은 누가 보더라도 2번에 해당한다.
그러나 걷기 없이는 견디지 못할 정도로 병적인 상태라고는 할 수 없다.
병적인 상태라 하면 도박, 마약, 술, 카페인, 니코틴, 약물, 게임 중독 등을 말하는데 걷지 못해서 금단 현상을 일으키고 자신과 남을 괴롭힌 적은 없다.
한 사람도 참가하지 않을 때 안 나가는 경우에는 출근하지 않는 것처럼 약간의 해방감조차 느낀다.
중독이라고 할 정도의 일은 딱 한 가지가 있었다.
남은 중독이라고 하지만 나는 중락(中樂)이라고 말하고 싶다.
어렸을 때부터 아버지가 바카라을 좋아하셔서 많이 읽고 일기를 매일 쓰시는 것을 보고 자랐다.
중학생 때까지 바카라꽂이에 있는 바카라은 거의 다 읽었는데 어느 날 아버지가 금고에서 바카라을 꺼내 보시더니 다시 넣고 잠그시는 것이다.
저 바카라은 얼마나 귀한 것이기에 숨겨 놓고 보실까 하다가 아버지 출타 중에 우연히 열린 금고를 보았다.
그때 발견한 것이 '고금소총(古今笑叢)'이었다.
여러 가지 우스운 이야기와 노골적인 성적인 표현이 많지만 양반의 위선적인 모습을 해학과 풍자로 나타낸 조선시대 이야기 모음집이다.
중학생이 보았으니 얼마나 신기하고 흥미로웠겠는가.
삽화도 이상야릇해서 애들 앞에 내놓지 못하고 금고에 숨기고 보신 것이다.
바카라꽂이에 꽂아 놓아도 아무도 신경 안 썼을 텐데 읽을 것이라면 손에 잡히는 대로 읽는 이 셋째 딸이 못 미더워 그러신 것 같다.
그런데 내가 누구인가, 호기심 천국이다.
저기에는 뭐가 있기에 꽁꽁 잠가 놓으실까 호시탐탐 노리다가 아버지 출타한 틈에 열어보니 금덩이도 아니고 북한에 두고 온 가족들 사진과 일기장, 바카라 몇 권이 있었다.
그중에 '고금소총'을 집어 들고 혼자 탐독을 했다.
지금도 생각나는 제목은 ‘염소가 부끄러워’라는 것인데 내용은 잘 모르겠고 처녀 두 명이 염소를 보며 소곤대는 모습만 그려진다.
이상야릇한 기분으로 틈틈이 재미있게 읽었는데 아버지가 눈치채시고 금고를 잠가버리셨다.
금고에 있는 바카라 다 읽었니?
아, 조금이요.
조금은, 한 권 거의 다 읽었는데......
그리고는 중독이라고 부를 수 있는 것이 없다.
걷기를 많이 해서 후회스럽고 반성하고 그만해야겠다고 생각한 적이 없으니 '고금소총'처럼 중락(中樂)이 아니면 무엇이겠는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