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년 반을 껑충 뛰어넘은 일곱 살 딸의 눈물, 그리고 영국 학교의 침묵
내게는 현재 만으로 아홉 살 된 아들과 열두 살 된 딸아이가 있다. 두 아이 모두 눈에 넣어도 아프지 않을 내 분신들이지만, 오늘은 그중에서도 유독 마음 한구석이 아릿한 흉터처럼 쓰려오는 나의 첫째, 딸아이에 대한 기억을 꺼내보려 한다.
시간의 태엽을 4년 전으로 거슬러 올라가 본다. 딸아이가 처음 영국 땅에 발을 디뎠을 때의 나이는 고작 일곱 살. 한국에서 초등학교 2학년 1학기를 갓 마치고 비행기에 올랐던 참이었다. '영국으로 이사를 간다'는 말이 자신의 삶에 어떤 거대한 파도를 몰고 올지 알 턱이 없던 아이는, 그저 피터팬의 네버랜드로 소풍이라도 떠나는 양 엄마의 손을 천진난만하게 잡고 지구 반대편의 낯선 공항에 내렸다.
혹여나 낯선 나라의 차가운 언어 장벽에 아이의 여린 마음이 생채기라도 입을까 봐, 나는 한국에 있을 때부터 발바닥에 땀이 나도록 운전대를 잡고 아이를 영국문화원에 실어 날랐었다. 비싼 학원비와 픽업의 수고를 쏟아부었으니 작은 방패막이라도 되어줄 거라 굳게 믿었다.
하지만 그 야심 찼던 조기 교육의 결과물은 영국 땅을 밟자마자 단체로 까마귀 고기를 삶아 먹었는지, 히드로 공항의 회전문 사이로 새하얗게 증발해 버렸다. 아이의 머릿속은 백지장처럼 말끔했고, 입술은 본드로 붙여놓은 듯 굳게 닫혀 있었다.
정글 같은 캠프, 그리고 말보다 앞선 주먹 쥔 손
영국에 도착한 직후 첫 한 달, 우리는 아이들을 다섯 살짜리 남동생과 함께 손잡고 갈 수 있는 스포츠 캠프인 '킹스 캠프(Kings Camps)'에 보냈다. 복잡한 문법이나 알파벳 대신, 공 하나만 던져주면 눈빛과 몸짓이라는 만국 공통어로 뒹굴 수 있는 정글 같은 운동장이 영어를 한마디도 못 하는 아이들에게는 최고의 피난처가 될 거라는 얄팍한 계산이었다.
하지만 매일 오후 캠프가 끝나고 돌아온 아이들의 일과를 전해 들을 때마다, 내 가슴은 덜컹 내려앉기를 반복했다.
다섯 살배기 남동생이 서툰 언어와 어리바리한 행동 때문에 덩치 큰 영국 아이들 틈바구니에서 억울한 일을 당할 때마다, 일곱 살짜리 누나는 한 치의 망설임도 없이 동생의 앞을 가로막아 섰다고 했다.
"야! 내 동생 괴롭히지 마! 저리 가!"
알아들을 리 만무한 100% 토종 K-한국어였지만, 그 기세만큼은 새끼를 지키려는 어린 암사자처럼 맹렬하고 당찼다.
제 몸 하나 건사하기에도 벅차고 두려웠을 낯선 땅. 알파벳 소리 하나조차 낯설어 주눅 들 법한 그 넓은 잔디밭에서, 자기도 아직 엄마 품이 절실한 일곱 살 꼬마가 피붙이 동생을 지키겠다고 온몸으로 방패막이가 되어 서 있던 것이다.
집으로 돌아와 땀방울이 송골송골 맺힌 딸아이의 흙 묻은 작은 손을 씻겨줄 때마다, 씩씩한 아이의 얼굴 뒤편으로 차오르는 짠함에 나는 몇 번이고 몰래 목구멍으로 뜨거운 눈물을 삼켜야 했다.
그렇게 우리 모녀의 영국 생존기는 눈물겹도록 든든하고도 가슴 아린, 일곱 살 누나의 당찬 외침으로부터 시작되고 있었다.
껑충 뛰어넘은 1년 반의 공백, 그리고 통곡의 바카라상
진짜 살얼음판 같은 사투는 9월, 영국의 정식 가을 학기가 시작되면서부터였다.
영국의 엄격한 나이 기준(Cut-off)에 맞춰 아이는 들어가자마자 덜컥 ‘Year 4(초등 3~4학년 과정)’로 배정을 받았다. 한국에서 초등학교 2학년 1학기까지만 마치고 왔으니, 학업 과정으로 치면 무려 1년 반의 거대한 공백을 아무런 징검다리도 없이 단숨에 장대높이뛰기로 뛰어넘어야 하는 처지였다.
가랑이가 찢어지다 못해 아이가 완전히 부러질 것만 같아 사색이 된 나는 학교 측을 찾아가 사정사정했다. 제발 학년을 한 단계만이라도 낮추어 달라고, 아이가 영어를 한마디도 못 한다고 애원했지만, 교장 선생님은 특유의 온화하고 성스러운 미소를 지으며 내 손을 부드럽게 토닥였다.
“어머니, 전혀 걱정하지 마세요. 아이들은 어른들의 좁은 생각보다 훨씬 더 강하고, 놀라울 정도로 잘 해낼 겁니다.”
그 다정한 호언장담은 학교 문을 나서는 순간 차가운 신기루처럼 부서졌다. 아이가 매일 바카라가방에 짊어지고 오는 숙제의 난이도는 상상을 초월했다. 회사 생활로 다져진 남편의 비즈니스 영어로도 단어를 몰라 끙끙대며 사전을 뒤적여야 할 지경이었다. 지금처럼 문맥을 기가 막히게 짚어내는 똑똑한 AI 번역기가 있던 시절도 아니었으니, 번역기 창에 뜬 외계어 같은 문장들은 안 그래도 깜깜한 머릿속을 더 짙은 안갯속으로 밀어 넣었다.
매일 방과 후 거실 식탁은 그야말로 눈물의 ‘통곡의 벽’으로 변했다. 의자에 엉덩이를 붙이기 무섭게 딸아이의 커다란 눈망울에서 서러운 눈물이 닭똥처럼 뚝뚝 떨어져 내렸고, 그 모습을 마주하는 엄마의 가슴은 매일 밤 날카로운 칼날로 난도질당하는 것만 같았다.
삼켜버린 눈물과 깊어가는 밤의 자바카라
어느 날은 조심스레 학교에서 있었던 일을 털어놓았다. 수업 시간 중 선생님이 아이를 콕 집어 질문을 던졌는데, 머릿속에서는 거센 지진이 일어났지만 입술은 본드로 붙인 듯 단 한마디도 떨어지지 않았다고 했다.
아이들의 시선이 일제히 쏟아지는 교실 한복판에서, 아이는 흐르는 눈물을 입술이 하얗게 질리도록 깨물며 억지로 참아냈다. 여기서 울음을 덜컥 터뜨려버리면 자신이 진짜 '바보'가 되어버리는 것 같아서, 자존심 하나로 눈물을 목구멍 뒤로 꾹꾹 욱여넣었다는 딸아이의 고백을 들은 밤. 나는 방 한구석에서 걷잡을 수 없는 자바카라감의 늪에 빠져 허우적댔다.
'한국에서 알맹상점 사업을 한답시고 제로웨이스트니 환경이니 밖으로만 나돌며 내 자식을 너무 방치했던 건 아닐까.'
'영국문화원 같은 부드럽고 우아한 곳이 아니라, 대치동의 빡빡한 스파르타식 보습학원에 보내서 스펠링이라고 뼈에 새겨지도록 달달 볶았어야 했나.'
꼬리를 물고 이어지는 자바카라과 후회의 파도가 밤새도록 내 숨통을 짓눌렀다.
딸아이의 당시 영어 실력이 어느 정도로 백지상태였는가 하면, 다섯 살배기 남동생이 가져온 'Year 1'의 기초 파닉스 숙제조차 읽어내지 못할 정도였다. 바카라상(Desk)이나 바카라(Book)처럼 당연히 눈 감고도 알 거라 믿었던 기초 단어들 앞에서도 아이의 눈동자는 갈 곳을 잃고 사정없이 흔들렸다.
도대체 그 비싼 돈을 들여보냈던 한국의 영국문화원에서는 뭘 배우고 온 건지 기가 차서 넌지시 물어보았다. 그러자 딸아이는 배시시 웃으며 순진무구한 얼굴로 폭탄선언을 날렸다.
"엄마, 나 수업 시간마다 맨 뒷자리에 앉아서 친구랑 귓속말로 맨날 놀았는데?"
그랬다. 한국의 원어민 선생님들은 아이들의 자유와 인권을 지켜준답시고, 교실 뒤편에서 딴청을 피우든 장난을 치든 그 어떤 제지도 하지 않았던 모양이었다. 방임과 방치를 고상하게 '자율과 존중'이라 포장해 부르는 영국식 교육의 서늘한 민낯을, 나는 지구 반대편 영국 땅에 도착해서야 비로소 뼈저리게 실감하고 있었다.
샴페인 거품 뒤로 닥친 두 현지 교사의 경고
아이의 눈물로 집안 공기가 눅눅하게 가라앉아가던 무렵, 영국에 갓 둥지를 튼 우리 동네에서 뜻밖의 작은 사건이 일어났다.
이사 온 지 얼마 되지 않아 길눈조차 어두웠던 내게, 바로 옆집에 살던 이웃 'M'이 먼저 다정하게 말을 건네온 것이다. 영어라면 입술조차 떼기 버거웠던 나는 만능 방패인 스마트폰 번역기 앱을 들이밀었고, 그녀 역시 특유의 영국식 미소를 지으며 기꺼이 번역기 화면에 대고 소통을 이어갔다.
어느 날 M은 동네 여성들의 소소한 친목 모임이 있으니 함께 나가보지 않겠냐고 제안했다. 당시만 해도 낯선 땅에 대한 의욕이 하늘을 찌르던 시절이라 덜컥 그러겠노라 고개를 끄덕였다. 퇴근 후 그 소식을 들은 남편은 사색이 되어 손사래를 쳤다.
"여보, 인사도 버벅거리면서 무슨 배짱으로 원어민들 수다 모임에 나가? 제발 참아!"
"왜 안 돼? 내 손에 스마트폰 번역기가 있는데 뭐가 무서워? 안 되면 말고!"
모임 당일, 어쩌다 보니 나는 긴 식탁의 가장 상석에 덜컥 앉게 되었다. 눈앞에 둘러앉은 동네 여성들은 짙은 인조 속눈썹에 화려한 장신구와 스카프로 무장한, 그야말로 영국의 내공이 철철 넘쳐흐르는 '현지 베테랑 언니들'이었다.
평소 기죽는 법을 모르던 나였지만, 사방에서 번역기 거칠 틈도 없이 영국식 빠른 영어가 융단폭격처럼 쏟아지자 이마에서 식은땀이 비 오듯 흘렀다. 번역기 자판을 두드리며 혼자 쩔쩔매는 내 모습이 마치 유쾌한 잔칫집에 찬물을 끼얹는 민폐처럼 느껴졌다. 결국 나는 타들어 가는 속을 달래려 웰컴 드링크로 내어준 샴페인을 알코올 소독하듯 연거푸 목구멍으로 털어 넣었다.
알코올 기운을 빌려 간신히 호흡을 가다듬고 있을 때, 건너편에 앉아있던 M이 번역기를 톡톡 두드리며 아이들의 안부를 물어왔다. 취기와 설움이 한데 뒤섞여, 나는 번역기 창에 숨겨둔 속마음을 털어놓았다.
"첫째 아이가 매일 학교 숙제를 감당하지 못해 밤마다 눈물을 흘리고 있어요."
문장을 읽은 M의 눈빛에서 장난기가 순식간에 사라졌다. 그녀는 옆자리의 친구와 심각한 표정으로 귓속말을 주고받더니, 이번 주말 동네 카페에서 딸아이를 직접 만나 상태를 봐주겠노라 선뜻 손을 내밀어 주었다. 알고 보니 M은 현지 사립학교의 보조교사였고, 옆자리 친구는 중학교에서 생물을 가르치는 베테랑 교사였다.
주말 오후, 딸아이의 손을 잡고 나간 카페에서 두 선생님은 다섯 살 남동생의 Year 1 기초 교재를 펼쳐놓고 아이의 실력을 차분히 짚어나갔다. 그리고 채 몇 분이 지나지 않아, 두 사람의 얼굴은 차갑게 얼어붙었다. 다정했던 주말 카페 테이블 위로 시베리아 칼바람이 불어닥치는 순간이었다.
"이건 생각했던 것보다 훨씬 심각해요. 아이가 Year 1 수준의 기초 단어조차 읽어내지 못하고 있어요. 사립학교에는 영어가 모국어가 아닌 학생을 돕는 EAL(비모국어 집중 지원) 프로그램이 필수적으로 있으니 당장 그걸 신청하세요. 그리고 학교에 강력하게 요구해서 학년을 반드시 Year 3로 한 단계 낮추셔야 합니다."
현지 영국 학교의 교사 두 명이 내 눈을 똑바로 응시하며 내린 냉정하고도 서늘한 진단. 그들의 입술에서 흘러나오는 경고를 듣는 순간, 내 머릿속은 까맣게 타들어가다 못해 새하얀 재가 되어버리는 것 같았다.
집으로 돌아오자마자 사시나무 떨듯 떨리는 손으로 노트북 자판을 두드렸다. 현지 교사들의 전문적인 조언을 전하며, 아이의 학업 공백이 너무나 크니 제발 학년을 Year 3로 낮춰주고 전문 EAL 수업을 지원해 달라고, 교장(Headmaster)에게 피를 토하는 심정으로 장문의 SOS 메일을 띄웠다.
하지만 메일함 너머로 돌아온 것은 돌부처 같은 차가운 침묵뿐이었다.
하루가 지나고, 이틀이 지나고, 일주일이 흘러도 교장실에서는 '된다, 안 된다'라는 최소한의 거절한 줄조차 날아오지 않았다. 겉으로는 성스러운 미소로 "아이를 믿으라"며 환대하던 학교가, 정작 도움의 손길을 뻗은 이방인 엄마 앞에서는 서슬 퍼런 묵묵부답으로 문을 걸어 잠근 것이었다.
영국 사립이라는 거대하고 견고한 벽 앞에서, 나는 이 낯선 땅에 어린 자식과 함께 발가벗겨진 채 홀로 내던져진 것 같은 지독한 무력감과 공포를 뼈저리게 맛보고 있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