남매의 동시 전학이라는 무모한 결단 끝에, 딸아이는 전통 있는 사립 여학교인 EHS(Edgbaston High School)의 Year 5로 첫발을 내디뎠다.
이 학교는 영어와 수학 수업을 실력에 따라 네 개의 반(Set)으로 나누어 가르쳤다. 이전 학교에서 이제 막 입이 트인 채 건너온 만 아홉 살 딸아이에게 쥐어진 이름표는 아래에서 두 번째인 'Set 3'였다.
새 교복, 낯선 교실, 그리고 Set 3.
엄마인 나는 꼴찌 반(Set 4)이 아니라는 사실에 안도하며 "새로운 곳이니 천천히 따라가면 된다"라고 무심코 위로를 건넸다. 하지만 매일 낯선 교실 문을 열어야 하는 아이에게 그 시작은 결코 가볍지 않았다. 이미 단단하게 뭉쳐진 현지 아이들의 틈바구니에서 수업 진도는 전 학교와 비교할 수 없을 만큼 빠르고 촘촘하게 느껴졌다.
아이는 집에 돌아와도 별다른 불평을 하지 않았다. 그저 조용히 테이블 앞에 앉아 낯선 단어들을 하나씩 사전에 찾아가며 숙제를 해나갈 뿐이었다.
전학을 밀어붙인 건 엄마의 계산이었지만, 다시 이방인의 자리에서 눈치를 보고 현지 아이들의 속도를 따라잡느라 숨을 헐떡여야 했던 건 오롯이 아홉 살 아이였다. 아이는 엄마에게 짐을 얹어주지 않으려 그 낯선 시간을 묵묵히 견뎌내고 있었다.
그리고 정확히 한 텀(Term)이 지난 뒤, 아이는 제 힘으로 한 단계 위인 'Set 2'로 올라섰다.
아이에게 레벨업 소식을 전해 들었을 때, 기쁨보다 먼저 가슴 한구석이 찡하게 아려왔다. 아이는 엄마의 조바심이나 운전 수고 없이도 스스로 제 자리를 다져가고 있었다. 흔들리며 환경 탓을 하던 건 언제나 엄마였고, 낯선 땅에 진짜 뿌리를 내리고 있던 것은 아이였다.
밤 10시까지 달리는 아이, 방학마다 떠나는 가족
새 학교에서 아이는 한 중국인 친구 'L'과 단짝이 되었다. 그런데 그 친구의 하루는 곁에서 보기만 해도 숨이 찰 지경이었다.
L은 이미 영어와 수학 모두 최고 반(Set 1)이었지만, 영국의 중등 입시인 ‘11+ 시험’을 위해 일요일을 빼고는 매일 밤 10시까지 문제집을 풀었다. 평일에 허락된 유일한 취미는 수영 강습 한 번 뿐이었다.
그렇다고 모든 아이가 입시 레일에 뛰어든 것은 아니었다. EHS는 초등부터 고등(Sixth Form)까지 이어지는 '올스루(All-through)' 학교라, 기준 성적만 유지하면 굳이 외부 시험을 치르지 않아도 중등부 진학이 가능했다.
자연스럽게 학교 안 학부모의 분위기는 둘로 나뉘었다. 내부 승급의 여유를 누리며 아이에게 유년기를 돌려주는 쪽과, 더 높은 명문 그래머스쿨이나 타 명문 사립교로 점프하기 위해 고삐를 바짝 죄는 쪽.
우리 집은 딱 그 중간에 서 있었다.
나의 원칙은 "영국에 살며, 방학 때 집에만 있는 건 아까운 일이다, 무조건 떠나서 다른 세상을 봐야 한다"였다. 방학이 시작되면 짐을 싸서 국경을 넘나드는 우리를 보며, 밤마다 입시 공부를 하던 L은 "너희 또 여행 가?"라며 눈을 동그랗게 뜨곤 했다.
물론 손을 완전히 놓고 있을 수는 없었다. 아이는 여전히 현지 아이들에 비해 영어와 수학의 기초가 얕았기에, 학기 중에는 좋은 개인 튜터와 함께 빈틈을 차근차근 메워나갔다. 선행이 아닌, 오늘 배운 것을 놓치지 않기 위한 최소한의 보폭 맞추기였다.
"너랑만 놀아야 해?" — 우정의 경계선
단짝 L 덕분에 학교에 빠르게 안착했지만, 머지않아 여자아이들 특유의 예민한 친구 관계가 고개를 들었다.
L은 우리 아이를 향한 소유욕이 유독 강한 편이었다. 딸아이가 쉬는 시간에 다른 친구와 어울려 웃기라도 하면 매섭게 토라지거나 질투를 숨기지 않았다.
하굣길에 나는 딸아이의 마음부터 물었다.
"지안아, 너는 어떻게 하고 싶어? L이랑만 둘이 놀고 싶어, 아니면 다른 친구들과도 어울리고 싶어?"
"난 다른 친구들이랑도 다 같이 놀고 싶어."
"그럼 L한테 솔직하게 말해주는 거야. '나는 너를 정말 좋아해. 하지만 너랑 제일 친하다고 해서 다른 친구들과 놀지 못하는 건 아니야'라고."
아이는 고개를 끄덕였지만, 어린아이들에게 우정의 적정 거리를 지키는 일은 생각보다 쉽지 않았다. L의 투정과 토라짐은 졸업할 때까지 완전히 사라지지 않았다.
하지만 아이는 대화를 거치며 점차 타인의 변덕스러운 감정에 끌려다니지 않는 법을 배웠다. 딸아이가 단호하게 제 중심을 잡자, L의 질투도 점차 힘을 잃어갔다.
강한 자에겐 강하게, 약한 자에겐 약하게
친구 문제로 아이의 고민이 깊어지던 무렵, 나는 가슴속 깊이 묻어두었던 어린 시절의 기억을 조심스레 꺼내놓았다. 학창 시절 나를 송두리째 흔들었던 따돌림의 상처였다.
세상에서 가장 크고 단단해 보이던 엄마가 그런 아픔을 겪었다는 사실에 아이는 흠칫 놀란 눈으로 귀를 기울였다.
"지안아, 따돌림이라는 건 나도 모르는 사이에 피해자가 되기도 하고, 반대로 무리에 휩쓸려 가해자가 되기도 해. 그때 엄마는 온 세상이 무너진 것처럼 힘들었어. 하지만 그 모진 시간을 묵묵히 버텨낸 덕분에 지금의 단단한 엄마로 자라날 수 있었던 것 같아."
물론 그런 시련은 겪지 않는 것이 가장 좋다. 하지만 살아가다 언젠가 내 딸에게, 내 아들에게 그런 먹구름이 드리운다면 부모로서 꼭 이 말을 마음에 새겨주고 싶었다.
"혹시라도 그런 상황이 오더라도, 그건 절대 네 잘못이 아니야. 세상 어디엔가는 너를 믿고 응원하는 사람이 한 명이라도 분명히 있고, 무엇보다 네 등 뒤에는 언제나 우리 가족이 있어."
그리고 또래 집단 안에서 조용히 작동하는 또 다른 칼날에 대해서도 경계를 잊지 않았다.
"친구들이 마냥 좋고 무리에 속하고 싶다 보면, 나도 모르게 분위기에 쓸려 누군가를 밀어내는 쪽에 설 수도 있어. 그럴 때 네 마음 한구석이 불편하다면 망설이지 말고 네 목소리를 내야 해. 그리고 혼자 외롭게 떨어져 있는 아이에게 먼저 손을 내밀 수 있어야 해. 그건 엄청난 용기란다. 진실과 용기를 가진 사람은, 시간이 조금 걸리더라도 결국 사람들에게 깊은 믿음을 얻게 되거든."
말을 맺으며 아이에게 다시 한번 당부했다.
"엄마는 네가 무조건 남들보다 똑똑한 사람보다, 정직하고 용기 있는 사람으로 살았으면 좋겠어. 아닌 건 아니고, 맞는 건 맞는 거야. 다수의 분위기에 휩쓸려 네 소신을 숨기지 마."
그 후 5학년과 6학년을 보내는 2년 동안, 나는 매일 아침 학교 앞 골목에 차를 세우고 딸아이의 작은 두 손을 꼭 맞잡았다. 그리고 둘만의 다짐처럼 이 말을 나직하게 건넸다.
"강한 사람에겐 강하게, 약한 사람에겐 약하게!"
쌀쌀한 영국의 아침 공기 속에서 나눈 그 짧은 약속. 낯선 세상의 파도 앞에서도 아이가 휘둘리지 않고 스스로 단단해지길 바랐던, 엄마가 쥐여줄 수 있는 가장 소박하고 분명한 나침반이었다.
[알아두면 좋은 영국 교육 이야기] 사립학교 전학 규칙과 'Set' 시스템
1. 위약금을 피하는 전학의 공식: 'Two Terms Notice'
영국 사립학교를 다니다 다른 학교로 옮길 때 반드시 숙지해야 하는 규칙이 있습니다. 바로 '두 텀 전(Two Terms, 약 6개월 전) 서면 통보' 규정입니다.
* 통보 시점: 영국의 새 학년이 시작되는 9월 학기에 맞춰 전학할 계획이라면, 늦어도 4월 이스터(Easter) 방학 전에는 현재 학교에 정식 서면(Withdrawal Form)을 제출해야 합니다.
* 주의할 점: 이 시기를 넘겨 전학을 알릴 경우, 실제 학교를 다니지 않더라도 한 학기치 학비(약 800만~1,000만 원 상당)를 위약금(Fee in lieu of notice)으로 물어내야 합니다.
2. 수준별 이동 수업: 'Set' 시스템
영국 사립 세컨더리(중등) 및 초등 고학년(Prep) 과정에서는 주요 과목인 영어와 수학을 학생 역량에 따라 나누어 수업하며, 이를 **'Set(셋)'**이라고 부릅니다.
* 유연한 이동 구조: Set 1(최상위반)부터 Set 4(기초반)까지 나뉘며, 고정된 것이 아니라 매 텀 치러지는 정기 평가와 교사의 지속적인 관찰을 통해 승급하거나 반을 바꿉니다.
* 현명한 접근법: Set 번호에 일희일비하기보다는 아이가 주눅 들지 않고 제 속도에 맞게 기초를 쌓아 올릴 수 있는 기회로 활용하는 것이 바람직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