영국에 도착해 처음 아이들의 둥지로 낙점했던 곳은 버밍엄의 유서 깊은 사립학교, ‘프라이어리 스쿨(Priory School)’이었다. 딸아이는 Year 4로, 다섯 살 남동생은 Year 1으로 나란히 입학했다.
하지만 결론부터 말하자면, 우리는 이 학교를 딱 1년만 보내고 미련 없이 짐을 쌌다.
어린 남동생은 매일이 소풍인 양 즐겁게 다녔지만, 내 시선의 끝은 늘 위태롭게 흔들리던 여덟 살 딸아이에게 머물러 있었다. 그곳에서 만난 교우들과 학부모들은 더없이 다정하고 따뜻했으나, 한 학년 전체가 딱 한 반뿐인 단출한 규모가 빚어내는 시스템의 한계는 곳곳에서 삐걱거렸다.
딸아이 반의 여학생은 고작 다섯 명. 다섯 손가락 안에 들어오는 작은 세계는 아이들에게 아늑한 온실이 되어주기도 했지만, 다양한 자극과 관계의 확장을 가로막는 울타리이기도 했다. 영국 사립학교라면 으레 4학년 즈음 떠나는 며칠간의 야외 체험 학습(Residential Trip)조차 이 학교에는 아예 존재하지 않았다.
식당 바닥에서 친 골프, 그리고 거위들의 잔디밭
가장 아쉬웠던 부분은 방과 후 클럽 활동이었다.
한국의 다채로운 방과 후 프로그램에 익숙했던 내 눈에, 전교생을 통틀어 고작 7~9개 남짓한 클럽 목록은 턱없이 빈약해 보였다. 그마저도 요일이 겹치면 하나를 포기해야 했기에 실질적인 선택지는 더 좁아졌고, 어떤 요일은 아예 신청할 수 있는 수업이 없어 텅 비어버리기도 했다.
외부 전문 강사를 초빙하는 수업은 두세 개에 불과했고, 대부분은 교과 선생님들이 직접 운영하는 형태였다. 물론 학교 교사진이 맡아주는 덕분에 수업료가 전액 무료라는 고마운 장점도 있었지만, 프로그램의 질과 환경은 못내 아쉬웠다.
어느 날은 골프 클럽이 개설되어 신청하였는데 웅장하게 펼쳐진 학교의 야외 천연잔디를 누비며 멋지게 스윙을 배울 거라 기대했던 내 상상은 첫날부터 산산조각 났다. 아이가 다녀와서 전해준 풍경은 엉뚱하기 그지없었다.
"엄마, 우리 오늘 점심 먹는 급식실에서 의자랑 식탁 구석으로 다 밀어 두고 그 바닥에서 골프채 휘둘렀어."
탁 트인 푸른 들판을 두고 왜 굳이 좁은 식당 바닥에서 퍼팅을 연습해야 했을까? 기가 차서 이유를 물어보니 돌아온 대답은 더 황당했다.
학교의 자랑이라던 그 넓고 광활한 잔디밭은, 사실 동네 야생 거위(캐나다 기러기) 무리가 통째로 점령한 안방이나 다름없었다. 거위들이 온 잔디밭에 수북하게 남겨둔 무차별 배설물 흔적들 때문에, 아이들이 신발을 신고 발을 디딜 엄두조차 내지 못했던 것이다. 그림엽서처럼 아름다운 초록 벌판은 그저 유리창 너머로만 감상해야 하는 '관상용 액자'에 불과했다.
숲이 건네준 달콤한 위로, 포레스트 스쿨
그렇다고 이 학교에 불만만 가득했던 것은 아니다. 지금도 딸아이의 기억 속에 가장 반짝이는 추억으로 남아있는 독보적인 보물이 있었으니, 바로 학교 울타리 안에 자리한 진짜 숲 속 배움터, ‘포레스트 스쿨(Forest School)’이었다.
도심 속 학교에서는 흉내 낼 수 없는 울창한 자연 숲이 교내에 그대로 보존되어 있었고, 모든 학년 아이들은 정규 수업 시간표에 맞춰 숲으로 걸어 들어갔다.
교실 밖으로 나온 아이들은 흙을 만지고, 나뭇가지를 엮어 은신처를 만들고, 풀벌레의 이름을 배우며 오감으로 자연을 배웠다. 그중에서도 딸아이가 손꼽아 기다리던 최고의 순간은 타닥타닥 피어오르는 모닥불 앞에 옹기종기 둘러앉던 시간이었다.
긴 나뭇가지 끝에 마시멜로를 꽂아 노릇노릇하게 구워 먹고, 쌀쌀한 공기 속에서 김이 모락모락 나는 달콤한 핫초콜릿 한 잔을 손에 쥐던 날. 낯선 언어와 버거운 숙제로 얼어붙어 있던 아이의 작은 마음에, 영국의 자연이 건네준 가장 다정하고 따뜻한 위로의 순간이었다.
우리 학교 선배가 ‘주드 벨링엄’이라고?
프라이어리 스쿨 시절을 떠올릴 때마다 입가에 절로 미소가 번지는 거짓말 같은 에피소드도 하나 있다.
생일파티 날, 나를 다정하게 불러준 캐나다 퀘백 친구. 체육 감각이 유독 뛰어났던 그 아이는 전교에서 유일하게 교내 축구부에 이름을 올린 여학생이었다.
어느 날, 그 친구 엄마의 인스타그램에 버밍엄 시내 한복판에서 어떤 앳된 흑인 청년과 다정하게 어깨를 나란히 하고 찍은 사진 한 장이 올라왔다. 당시만 해도 손흥민 선수 말고는 축구의 '축' 자도 모르던 문외한이었기에, 나는 그저 평범한 현지 청년이겠거니 하고 대수롭지 않게 넘겼다.
그런데 웬걸, 며칠 뒤 드러난 사진 속 주인공의 정체는 다름 아닌 전 세계 축구계를 뒤흔들고 있는 슈퍼스타, ‘주드 벨링엄(Jude Bellingham)’이었다.
알고 보니 프라이어리 스쿨은 바로 그 벨링엄이 어린 시절 축구화를 꿰매 신고 운동장을 누비던 진짜 모교였다. 레알 마드리드로 이적하며 천문학적인 몸값을 기록하던 그 거물이, 오랜만에 고향 버밍엄에 들렀다가 까마득한 모교 후배이자 축구부 아이들만을 위해 은밀하고 다정한 깜짝 만남을 열어준 것이었다.
주변 한국 지인들은 "설마 진짜 벨링엄이겠어? 동생인 조브 벨링엄이겠지"라며 믿지 않았지만, 사진 속 주인공은 의심의 여지없는 레알 마드리드의 에이스였다.
비록 몸치에 가까웠던 딸아이는 축구부 근처에도 가지 않아 그 역사적인 현장에 함께하지 못했지만, 한 교실에서 지우개를 빌려 쓰던 단짝 친구가 세계 최고의 스타와 마주 보고 웃었다는 사실만으로도 우리 가족에게는 잊지 못할 짜릿한 일상의 추억이 되었다.
갈라진 등굣길, 엄마의 자만이 부른 대가
하지만 추억의 따스함과 벨링엄의 반짝이는 후광도 학교의 앙상한 인프라를 채워줄 수는 없었다. 1년간의 치열한 관찰 끝에 우리는 마침내 결단을 내렸다.
남매의 동시 전학.
딸아이는 전통의 명문 사립 여학교인 EHS(Edgbaston High School)로, 아들은 유서 깊은 사립 남학교인 West House School로 각각 둥지를 틀기로 했다.
결정을 내리고 나자마자 현실적인 폭풍이 몰아쳤다. 남녀공학을 다닐 때는 한 번에 차에 태워 한 교문 앞에 내려주면 끝났지만, 이제는 서로 다른 방향으로 동선이 찢어지게 된 것이다. 남편은 혀를 내두르며 깊은 한숨을 내쉬었다.
"여보, 아침저녁 출퇴근길 버밍엄 트래픽이 얼마나 지옥 같은지 몰라서 그래? 두 군데를 매일 라이딩하는 건 물리적으로 불가능해. 애들도 생이별하듯 떨어뜨려 놓으면 적응하기 더 힘들고 학교 행사나 공지사항도 다 다를 텐데 영어도 못하는 사람이 왜 굳이 사서 고생을 해?"
남편의 현실적인 경고 앞에서도 당시의 나는 이상할 만큼 고집스러웠다.
"영어가 안 되면 몸으로라도 때워야지! 아이들에게 더 넓은 운동장과 더 좋은 기회를 줄 수만 있다면, 내가 아침마다 운전대 한 시간 더 잡는 게 대수야? 내 체력만 갈아 넣으면 다 해결돼."
돌이켜보면, 더 좋은 환경을 열어주겠다는 열망에 취해 정작 새로운 교실의 문을 다시 맨몸으로 열어야 할 아이의 마음을 충분히 헤아리지 못했던 것은 아니었을까.
새로운 교복을 입고 또 한 번 낯선 출발선에 서야 했던 딸, 아들아이들에게, 엄마의 결단은 과연 어떤 무게로 다가갔을까. 설렘과 두려움이 교차하는 문턱 너머로, 또 한 번의 새로운 계절이 우리를 기다리고 있었다.
[알아두면 좋은 영국 교육 이야기] 영국 학교 시스템 이해하기: 3텀제와 학사 운영
1. 1년 3학기(3 Terms) 시스템
한국이 1·2학기 중심이라면, 영국의 학년도는 9월에 시작해 총 3개의 텀으로 구성됩니다.
* 가을 학기 (Autumn Term): 9월 초 ~ 12월 중순 (가장 길고 학년이 새로 시작되는 중요한 텀)
* 봄 학기 (Spring Term): 1월 초 ~ 3월 말/4월 초
* 여름 학기 (Summer Term): 4월 중순 ~ 7월 초
2. 텀마다 새로워지는 클럽 활동과 악기 레슨
영국 사립학교의 방과 후 클럽(Co-curricular)과 개인 악기 레슨(Music Lessons)은 1년 단위가 아니라 매 텀이 시작되기 직전에 새롭게 신청합니다. 인기 있는 수업은 신청 오픈 몇 분 만에 마감되기도 하므로, 학교 학부모 포털의 신청 일정을 미리 챙겨야 합니다.
3. 계절에 맞춰 바뀌는 체육(PE & Games) 종목
영국 학교의 체육 수업은 계절의 흐름에 맞춰 텀마다 주력 종목이 완전히 바뀝니다. (예시)
* Autumn Term: 축구(Football), 럭비(Rugby), 넷볼(Netball)
* Spring Term: 하키(Field Hockey), 수영(Swimming), 크로스컨트리
* Summer Term: 크리켓(Cricket), 육상(Athletics), 라운더스(Rounders), 테니스
* Tip: 종목이 바뀔 때마다 필요한 유니폼과 보호 장비(정강이 보호대, 마우스가드, 전용 스터드 축구화 등)를 새로 구비해야 하므로 학기 초 준비물 체크가 필수입니다.
4. 영국식 생태 교육, 포레스트 스쿨(Forest School)
학교 부지 내 자연 숲을 활용해 자연과의 교감, 위험 감수 능력(Risk-taking), 협동심을 기르는 영국 특유의 정규 야외 교육입니다. 사립학교마다 운영 방식이 다르지만, 기후와 일정을 고려해 보통 1년에 한 텀 정도 집중적으로 배정되어 야외 탐색, 불 피우기, 목공 등 교실 밖 수업을 경험하게 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