김초엽 작가의 인터뷰를 듣다가 생각이 꼬리를 물고 이어졌다. 소설 속 인물을 더 깊이 이해하려 애쓰다 못해, 그만을 위한 시점 인물을 새로 만들어내기도 했다는 이야기. 인물은 처음부터 완성된 체온을 가지고 태어나는 게 아니라, 작가가 그 윤곽을 다듬어가며 알아가는 과정 속에서 비로소 고유한 형태를 얻는다는 것.
마침 정물화를 그리던 참이었다. 상대적으로 넣고 빼는 것이 수월한 그림이었다. 그 수월함 덕분에 그림전체의 운명이 사라지기도 하였지만 자주 나는 그림의 균형을 위해 새로운 소재를 필요로 하곤 했다. 소설의 인물이 필요에 의해서만 태어나는 게 아니듯, 그림의 소재도 마찬가지였다.
작업을 위한 재료들을 아주 작게 쪼개고 나눈 뒤 미리 저장하기 시작한 지는 얼마 되지 않았다. 이전에도 정리는 해두었지만 적절히 소분해두지 못한 탓에, 무언가 필요해질 때마다 자료를 찾는 일은 늘 숨이 가빠오는 바쁜 아침의 먼거리를 다녀와야 하는 심부름 같았다. 서랍을 열면 즉시 손에 잡히는 대신, 상자를 통째로 뒤엎고 나서야 겨우 조각 하나를 건져 올리는 식의 비효율. 그 투박함을 더는 견디지 못해 재료를 쪼개고 하나씩 이름을 붙여주기 시작한 게 최근의 일이다.
생각이 거기에 이를 즈음 대화는 ‘직관’이라는 단어로 넘어갔다. 인물을 이해한다는 건 결국 직관이 만들어내는 일이라는 말. 그러나 그 직관을 얻기 위해 작가는 전체의 많은 부분을 치밀하게 계산하며 엮어왔을 것이다. 그러다 어느 지점에 이르러 직관이 솟아오르고 판단이 가벼워졌다는 그 고백을 들으며, 나는 이상하게 안심했다. 직관이란 처음부터 주어진 눈부신 재능이 아니라, 계산과 시행착오를 수없이 겹쳐 쌓은 자에게만 아주 뒤늦게 도달하는 선물 같은 것이라는 사실에.
대체로 물리적으로 큰 화면을 다룰 때에는 장편소설에 수많은 인물이 얽히듯 많은 사물과 레이어가 필요해진다. 그렇게 요소를 찾고 배치하는 막막함 속에서, 나 역시 어느 순간 직관에 의해 필요한 조각을 선별하는 시간을 맞이한다. 하지만 그 지점에 도달하기 전까지, 수많은 계산과 서툰 발걸음이 쌓여야만 그림은 비로소 앞으로 움직인다. 그 움직임은 느리고, 때로는 제자리를 지루하게 맴도는 것처럼 보인다. 그러나 훗날 돌이켜보면, 그 자리를 맴돌던 시간조차 뚜렷한 하나의 궤적이었음을 알게 된다.
다행히 오늘은 미리 나누어둔 재료들이 있어 작업이 순조롭게 흘러가지만, 이 재료들이 처음부터 지금의 이 그림만을 위해 태어나지 않았다는 점은 흥미롭다. 다른 작은 정물화를 그리다 부산물처럼 남겨진 조각이, 긴 호흡과 구상으로 시작된 대형 작품의 결정적인 요소로 들어앉기도 한다. 목적을 가지고 모아둔 자료보다, 다른 그림을 그리다가 이 화면으로 ‘캐스팅’되는 일이 오히려 더 흔하다. 짧은 조연으로 스쳐 지나갔던 인물이 훗날 다른 이야기의 주인공으로 다시 불려 나오는 것처럼.
작품들 사이에 어떤 은밀한 연결고리가 존재한다면—바꿔 말해 이미 하나의 커다란 흐름이 정해져 있다면—화면을 채우는 요소는 전략적인 목표를 향해 달려온 것들이 아니다. 그건 힘을 빼고 걷다가 땅바닥에서 무심코 주워 올리는 돌멩이에 더 가깝다. 계획해서 찾아낸 것보다 우연히 손에 쥔 것이 더 정확한 자리에 딱 맞아떨어지는 순간들.
아마도 그건 우연이 아닐 것이다. 내가 오래전부터 걸어온 그 길 위에, 그 돌멩이가 이미 놓여 있었기 때문일 터다.
직관이라는 것 역시 그렇게 축적된 길 위에서 비로소 단단해지는 결정체 아닐까. 계산으로 촘촘히 다져진 길을 충분히 걸어본 사람만이, 어느 순간 발밑을 내려다보지 않고도 정확한 돌멩이를 주워 들 수 있게 되는 것처럼.