균열

by에티텔
halfmoon-web.jpg이효연, 반달, 아사에 유채, 116.7x91cm, 2025

올리브 그린과 하늘색이 얹혀진 캔버스 위로, 덜컥 고름 같은 물감이 터져 나왔다. 당황해서 손끝이 떨렸다. 물티슈를 한 장 뽑아 들고, 상처 부위를 조심스레 응급처치하듯 닦아낸다. 마치 응급실 침대 위에서 아슬아슬하게 누군가의 찢어진 살갗을 꿰매는 마음으로.


그림을 그리는 일에는 풀리지 않는 오래된 숙제가 있다. 밑색이 채 마르기도 전에 겉면이 얼추 굳었다 싶으면, 나는 그 위로 자연스럽게 새 레이어를 얹곤 했다. 겹겹이 쌓이는 색채 속에서 완성이라는 환상을 꿈꾸면서. 하지만 닫힌 어둠 속에 갇혀 있던 물감은 끝내 제 살아있는 축축함을 버리지 못하고, 가장 약한 살집을 뚫고 기어이 터져 나온다. 사람들은 그걸 '균열'이라 부르고, 내게는 서둘러 건너뛴 시간들이 뒤늦게 내지르는 비명처럼 들린다.


그나마 다행인 건 아직 작업대 위에 놓인 캔버스라는 점이다. 덧칠하고 수습할 여지가 남아있다는 것. 물감을 얹고, 그것이 온전히 제 몸을 말릴 때까지 가만히 기다렸다가, 다시 다음 색을 건네는 일. 그림이란 결국 그 묵묵한 순응이 번갈아 이어지는 일이다. 누군가는 단번에 베어 물듯 그림을 끝내기도 하지만, 나는 시간을 레이어로 쌓아 올리는 방식을 고수해 왔다.


그러나 이론은 매끄럽고 일상은 울퉁불퉁하다. 날씨와 습도는 통제할 수 없는 타자다. 속에서 미처 굳지 못한 감정과 물감을 느닷없이 흔들어놓는다. 겉과 속 사이, 스며들지 못한 축축함은 결국 가장 가녀린 틈을 타 세상 밖으로 새어 나온다. 액체가 겨우 고체가 되어가는 그 서러운 모서리를 들여다보다가, 문득 삶의 궤적들이 겹쳐졌다. 내 삶에서도 얼마나 많은 고름들이 이처럼 불쑥 터져 나왔던가.


어릴 적 무릎이 까졌을 때, 며칠 뒤 앉은 딱딱하고 까만 딱지를 보며 다 나았다고 섣불리 안심했었다. 조바심에 껍질을 살짝 들어 올리면 그 아래엔 언제나 붉고 진득한 속살이 짓물러 있었다. 겉만 말라 있었을 뿐, 속은 여전히 젖어 있었던 것이다. 그 아릿한 통증의 감각은 여전히 서늘하다.


살아가며 겪은 수많은 난감함도 그랬다. 깔끔하게 해결되었다고 믿었던 문제가 먼 훗날 더 커진 흉터로 돌아올 때, 나는 알게 된다. 그건 해결이 아니라 임시방편에 불과했다는 것을. 문제는 늘 모자란 시간과 서툰 생각에서 비롯된다. 여유가 없어서 생기는 결핍. 시간이 충분했더라면 마음은 더 깊어졌을 것이고, 그렇다면 타인과 나를 이토록 허기진 채로 내팽개치지는 않았을 텐데.


우리는 저마다 가슴속에 고름 한 덩이쯤을 품고 살아간다. 그 사정은 다들 비슷할 것이다. 빨리 잊고 싶어서, 혹은 어서 다음으로 넘어가고 싶어서 겉면을 서둘러 말려버린 까닭이다. 날씨가 개고 습도가 낮아질 때까지 내면의 계절을 기다려주지 못한 채, "이 정도면 됐겠지" 하고 다음 레이어를 덮어버렸기 때문이다. 서둘러 삶을 말리려 했던 대가는, 언제나 가장 원치 않는 순간에 청구서처럼 돌아온다.


그래도 다행이라 말하고 싶다. 그림에서도, 우리의 삶에서도 고름이 터져 나온 자리가 곧 완전한 파국을 의미하지는 않는다는 것. 도리어 그것은 이 캔버스가, 이 삶이 아직 죽지 않고 숨 쉬고 있다는 서글프고도 명확한 증거다. 이미 완결되어 딱딱하게 굳어버린 유물에서는 어떤 균열도, 어떤 눈물도 새어 나오지 않는 법이니까.


물티슈로 덧난 자리를 천천히, 가만히 닦아낸다. 이것은 돌이킬 수 없는 실패가 아니다. 그저 이 그림이, 그리고 나라는 존재가 조금 더 깊어지기 위해 자기만의 속도로 말라가는 중이라는 신호. 아직 우리는 살아있다는, 무척이나 유효한 신호다.


목요일 연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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