약 19년 전, 만삭 상태로 강단에 섰던 저는 2학기 기말고사 전날 아들을 낳았습니다. 그때는 꽤 괜찮은 타이밍이라 생각했었죠. 강의는 끝냈고, 시험 감독은 저를 대신해 줄 사람들이 많았으니까요. 그 영향이 이렇게나 오래갈 줄 모르고 말이죠.
아들이 어릴 때는 생일이 늦어 또래보다 작은 것이 걱정이라면 걱정이었을 뿐 별다른 불편함은 없었습니다. 그런데 초, 중, 고를 거치면서 보니, 아들의 생일이 기말고사와 겹치는 날이 많은 겁니다. 아들은 미리 챙겨준 생일에도 시험공부를 하느라 제대로 즐기지 못했고, 생일날에는 시험을 망친다는 속설에 신경 쓰며 미역국을 거부한 채 학교를 갔습니다.
“왜 내 생일에 맨날 기말고사를 치냐고...”
혼잣말하듯 울분을 토하던 아들은 어느새 만 19세 성인이 되었습니다. 놓쳐버린 성년식을 마음에 담아두고 있던 저는 그해 생일만큼은 좀 더 신경을 쓰고 싶었습니다. 다행히 대학생의 기말고사는 1~2주 뒤인 데다가 마침 생일이 주말이기에 집에서 생일을 보내면 좋겠다는 마음을 전달했죠. 아들은 친구들이 챙겨주는 생일을 조금 일찍 당겨서 하고 기꺼이 집에 내려와 주었습니다.
얼마 만에 생일 아침에 끓여주는 미역국인지. 아들이 좋아하는 홍합을 잔뜩 넣어 미역국을 끓이고, 고기를 굽고, 아들의 최애 반찬 오이까지 듬뿍 담은 엄마표 정성 가득 생일상을 차려내었습니다. 저녁에는 아이스크림 케이크와 와인도 준비했죠. 이제 성인이니 술 한잔 제대로 하자고 말입니다.
사실 남편은 아들이 만 17세 미성년자 대학생이 되었을 때 첫 술은 어른한테 배워야 한다면서 주도를 가르쳤습니다. 아마도 억지로 강요된 술 문화를 겪었던 자신의 경험 때문이었던 것 같은데 아들에게 도움이 되었는지는 알 수 없습니다.
그날 저희는 와인 한 병을 다 마시지 못했습니다만, 도란도란 이야기를 나누던 그 분위기에 취해 기분이 좋았습니다. 아들 생일 즈음이면 아프던 손가락 통증, 산후조리 때 기말고사 시험지를 채점하느라 생긴 고질병을 느끼지 못할 만큼 행복한 날이었습니다.
언제 이렇게 커서 함께 술을 마시나 싶어서 마음이 몽글몽글해졌습니다.
자주는 아니었지만, 특별한 일이 생길 때면 축하주를 마시는 것이 일상이 되었습니다. 아들도 법적으로 성인이 된 이후 술 약속이 늘어나는 듯했습니다. 그래도 걱정이 될 만한 일은 일어나지 않았습니다. 커피 대신 녹차를 우려 마시던 아들은 술도 적당히 조절하는 어른이 되어갔습니다.
술로 인한 해프닝은 정작 집에 내려온 날 생겼습니다.
정말 오랜만에 중학교 동창과 약속이 있다며 오후에 외출한 아들은 술 한잔하고 들어가겠다는 연락을 해왔습니다. 웬만해서는 저희와 시간을 보내던 아들이었기에 재미있게 놀고 오라고, 대신 12시 전에는 들어오라는 대답을 했죠. 그런데 12시가 다 되어가는데, 들어가고 있다는 연락이 없는 겁니다. 엄마의 직감에, 무슨 일이 일어난 것 같아 가슴이 두근두근 대기 시작했습니다. 그때 전화벨이 울렸습니다.
“어머님, 저 OO인데요, OO이가 너무 취해서 제가 혼자 데리고 갈 수가 없습니다. 혹시 나와주실 수 있을까요?”
너무나 공손한, 역시나 술에 취한 아들 친구의 전화에 옷을 주섬주섬 챙겨 입으며 남편과 함께 집을 나섰습니다. 새벽 밤거리에 그렇게 많은 청춘들이 배회하고 있다는 사실을 그날 처음 알았습니다.
아들은 어느 골목길에 주저앉아 있었습니다. 남편은 주차할 공간이 없어 깜빡이를 켠 채 기다리고 있는데, 걸음도 제대로 걷지 못하는 아들을 차까지 끌고 가려니 여간 힘이 드는 것이 아니었습니다. 정신을 못 차리는 건 아들 친구도 마찬가지여서 차에 태워 집까지 바래다주었습니다.
그 와중에 어찌나 인사성이 바른 지, 감사하다는 인사를 스무 번도 넘게 들었습니다. 아들은 연신 “죄송해요”를, 아들 친구는 “감사하다”는 말을 번갈아 하는데, 이상하게 웃음이 계속 났습니다.
남편은 아들을 거의 둘러업다시피 해서 집으로 데리고 왔습니다. 골목길에서 차까지 아들을 겨우 끌고 왔던 저와 달리 역시 아빠는 힘이 셌습니다. 아들은 속이 부대끼는지 계속 변기를 붙들고 있었습니다. 남편은 아들의 이를 닦이고 손발을 씻기며 수발을 들었습니다. 그동안에도 아들은 계속 죄송하다는 말을 뱉었습니다.
“괜찮아, 그럴 수 있지.”
“아니에요, 엄마 아빠한테 이런 모습 보이면 안 되는데, 정말 죄송해요.”
“엄마, 아빠니까 이런 모습 보여도 괜찮아.”
집에 있는 헛개 엑기스까지 마시고 나서야 속이 좀 편해졌는지 아들은 깊은 잠에 빠져들었습니다. 저는 밤새 숨소리가 괜찮은지 신경이 쓰여 아들 방을 들락날락했습니다.
아들은 거의 점심때가 다 되어서 일어났습니다. 저는 해장국을 끓여주며 아들의 안색을 살필 뿐 전날 있었던 일에 대해서는 입 밖으로 내지 않았습니다. 남편 역시 싱긋이 웃을 뿐 아무 말하지 않았습니다. 그날은 그렇게 평안한 하루를 보내고 아들은 대전으로 돌아갔습니다.
몇 달 뒤 우연히 밤늦은 시간, 그 거리를 다시 지나가게 되었습니다. 그때도 12시가 넘었는데, 젊은 친구들이 거리를 배회하고 있었습니다.
“여기, 아들 주워 왔던 곳인데.”
남편의 말 한마디에 그만 웃음이 터져버리고 말았습니다. 아들의 마음을 배려해 침묵했던 남편도 그날만은 잊히지가 않았던 모양입니다.
“귀여웠는데.”
저희 부부는 그날을 이렇게 기억하고 있었습니다.
잔소리나 조언으로 갈무리하지 않아도 이미 아들이 앞으로 잘 살아갈 거라는 믿음, 그리고 처음으로 저희에게 흐트러진 모습을 보이며 미안해했던 그 마음을 충분히 이해하면서 말입니다.
이 글은 밀리의 서재, 밀리로드에도 입성해 있습니다.
어느덧 시즌 3 공모전의 마감(~ 8. 31.)이 다가오고 있네요.
작가님들의 밀어주기 덕분에 사막 같은 곳에서도 꿋꿋이 견디고 있습니다.
감사합니다.

https://www.millie.co.kr/v4/millieRoad/38141