오랜만에 집에 내려온 아들은 카이스트 캠퍼스가 따뜻한 봄 햇살과 함께 슬슬 기지개를 켜기 시작했다는 소식을 전해주었습니다. 비대면 수업이 점점 줄어들고 대면 수업이 활성화되면서 학교에서의 활동량도 늘어났다고 했습니다.
2학년이 되며 달라진 학교생활에 대해 이것저것 이야기해 주던 아들은 잠시 뜸을 들였습니다. 그리고는 저희에게 종이 한 장을 내밀었습니다. 도보, 전동킥보드, 전동스쿠터, 그리고 스쿠터의 장점과 단점을 일목요연하게 비교한 '카이스트 이동편의를 위한 운송수단 구입(안)'이었습니다.
사실 얼마 전부터 자전거 이용이 불편하고 힘들다며 오토바이 이야기를 심심찮게 해오고 있었습니다. 저는 중학교 때부터 타던 자전거라 오래되기도 했기에, 아들의 말에 공감은 했습니다. 하지만 오토바이의 위험성을 봐오던 터라 선뜻 허락하기가 쉽지 않았습니다. 남편도 멀쩡한 자전거를 두고 오토바이를 산다는 건 이해할 수 없다고 대꾸하면서도 자신의 허락이 행여 사고로 이어질까 봐 두려워하는 듯했습니다.
초등 고학년 이후부터 원하는 것을 사기 위해서는 아빠를 설득하고 동의를 얻어야 했던 아들은 포기하지 않았습니다. 사야 하는 이유, 그 물건을 샀을 때의 장점과 단점을 깔끔하게 정리한 표를 내미는 것으로 승부수를 던졌습니다. 대신 오토바이보다는 속도가 덜 나고 크기가 작아 교내 이동에 적합한 스쿠터로 대안을 찾아냈습니다.
그 표를 바라보는 남편의 입꼬리가 슬그머니 올라갔습니다. 제가 봐도 그럴듯했거든요.
그 표에 따르면, 도보는 기본적으로 걷되 필요할 때 공유킥보드를 이용하는 방식이라 연간 150만 원가량의 사용료가 들고, 전동킥보드는 이동 수단 사용료는 없지만 잦은 배터리 충전을 단점으로 꼽았습니다. 가장 사고 싶은 것은 스쿠터지만 높은 보험료가 걸림돌이었고, 전동스쿠터는 비가 올 경우 내구성 관리가 필요하지만 가성비가 가장 좋은 것으로 결론지어져 있었습니다.
게다가 운송수단 구입비는 엄마 아빠가 주는 용돈 말고 아르바이트비 등 자신이 직접 벌어놓은 돈으로 쓰겠다는 내용까지 정리되어 있었습니다.
저는 아들이 제안한 표를 보며, 이번에는 남편이 순순히 설득당하겠거니 생각하며 흐뭇했습니다. 하지만 남편은 아들의 제안을 꼼꼼히 살펴보더니 한 가지 질문을 던졌습니다.
“전동스쿠터 구입 시 향후 중고 재판매로 인한 환수 비용도 고려했니?”
저는 남편의 질문이 탐탁지 않았습니다. 나중에 중고로 내놓는 것까지 고려하라는 건 좀 지나치다는 생각이었죠. 그런데 아들은 이미 아빠의 질문을 예상하기라도 한 듯 막힘없이 대답했습니다. 전동스쿠터는 새 제품 구입 시 90만 원, 중고 제품 구입 시 70만 원, 나중에 중고로 팔면 약 50만 원을 회수할 수 있다고 말이죠.
그날 남편은 아들의 전동스쿠터 구입안 결재란에 사인을 했습니다. 헬멧도 착용하고 규정 속도로 안전하게 타며 캠퍼스 밖에서는 타지 않겠다는 약속까지 받아냈습니다. 그 과정을 지켜보는 내내 저는 부자 사이가 아닌 상사와 부하 직원 같다는 생각에 웃음이 떠나질 않았습니다.
이후 아들은 인터넷을 뒤지며 가격과 성능을 비교해 최종 한 가지 제품을 선택했습니다. 저는 혹시나 하는 마음에 아들 몰래 구매평을 찾아보며 나름 검증까지 해봤지만, 평이 괜찮아 괜한 오지랖이었나 싶었습니다. 다만 해외 직구 제품이라는 것은 마음에 걸렸습니다.
아들 역시 100만 원 가까이 되는 큰돈을 해외 직구로 결제해야 한다는 것에 부담을 느꼈나 봅니다. 마치 수시 원서를 넣을 때처럼 저희 가족 단톡방에 아들의 결제 과정이 하나하나 기록되기 시작했습니다.
그렇게 신중하게 접근했음에도 결국 그 시도는 실패로 돌아갔습니다. 결제 과정에서 또 하나의 문제가 생겼기 때문입니다.
해외직구에 필요한 개인통관고유부호는 가지고 있었습니다. 신입생 때 해외직구 교재를 아빠가 사주면서, 나중에 필요할지도 모르니 미리 받아두라고 했었거든요. 이번에 말썽인 것은 아들의 카드였습니다. 미성년자인 아들이 사용하던 카드로는 해외결제가 되지 않았던 것입니다. 결국 아빠의 도움을 받아 결제하고, 전동스쿠터 값은 아빠 계좌로 넣어주는 방법을 택했습니다.
아들은 오매불망 기다리는데, 남편은 서두르지 않고 시간을 두고 결제를 해주었습니다. 그리고 아들에게서 ‘GREAT’ 이모지를 받아냈습니다. 결제 대행을 해주었을 뿐인데 GREAT 이모지까지 받았으니 남편으로서는 남는 장사였던 셈이죠.
하지만 이 또한 깔끔하게 끝나진 않았습니다. 아들의 당시 계좌는 1일 이체 한도가 50만 원이어서 두 번에 걸쳐 아빠에게 대금이 전달되었거든요.
우여곡절 끝에 마련한 전동스쿠터를 아들은 한 3년 정도 타고 다녔습니다. 그 기간 동안 멍청 비용을 몇 번 지불하긴 했지만, 아빠와의 약속대로 안전모를 착용하고 천천히 운전하며 사고 없이 탔습니다. 그리고 지금은 부득이 다시 도보로 캠퍼스를 누비고 있습니다.
어른들에겐 별거 아닌 일들도 어른이 되어 가는 아들에게는 매번 새로운 경험이고 도전이라는 것이 신기합니다. 돈을 벌고, 쓰고, 결정하고, 그 결과까지 감당하는 과정을 하나씩 배워나가는 거겠죠.
저희 역시 아들의 속도에 맞춰 조금씩 자리를 내어주는 중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