나는 전세사기 피해자로 데뷔하려고 준비 중인 연습생인 거다
빼뢔뢔뢔뢔-
비상구 조명만 환하게 방을 비추는 어두운 밤, 잠들어있던 나를 깨운 건 다름 아닌 화재경보였다.
"지금 화재가 발생하였으니 비상구를 향하여 신속히 대피하여 주시기 바랍니다."
철커덩- 빠박! 뿌우웅- 샷시에 붙은 자동 문열림 장치가 아주 힘차게, 잠가놓은 걸쇠를 부수고 방 한 면을 가득 채운 베란다 문을 열었다. 바로 앞에 마주 보고 있는 아직 공사 중인 오피스텔의 불 켜진 창문들이 보이기 시작한다.
우우우우웅- 아주 서서히. 그렇지만 불이 난 건 아닐 거다. 누군가 옆에 있었다면 깜짝 놀라 심장을 부여잡으며 대피하니 마니 하며 허둥댔을 테고 난 걱정 말라며 다독였을 거다. 하지만 나는 혼자였으니 깜짝 놀라 일어난 스스로를 직접 다독였다. 괜찮아 불이 난 건 아닐거야. 처음 있는 일도 아니잖아?
화재경보기라는 건 누구나 알다시피 날씨나 시간, 상황 같은 건 가리지 않고 건물 안에 불이 난 것을 감지하면 경보를 울리게 설계되어 있다. 그러나 우리 집의 고장 난 화재경보기는 화재여부 마저 가리지 않고 아무 때나 사이렌을 울려댔다. 그것과 연동된 자동 문 열림 장치는 경보가 울리는 즉시 베란다 문을 열어 완강기로 가는 경로를 확보해 주었다. 착실하게도 한 번도 빠짐없이. 자고 있을 때도, 회사에 있을 때에도, 여행 중일 때에도 화재경보기는 공연히 울려댔고 그때마다 베란다 문은 자동으로 열렸다. 잠금 여부도 상관없이 문을 박차고 여는 힘센 그 장치 덕에 베란다 문은 귀가하면 랜덤 확률로 활짝 열려있었고, 걸쇠는 벌어져 너덜해진 지 오래였다.
적어도 몇 시간에서 많으면 며칠을 열려있었겠지만 문 열린 사이 도둑이나 나쁜 의도를 가진 사람들이 드나들진 않았을까 걱정할 겨를은 없었다. 하루는 그사이 몰아친 비바람에 축축히 젖은 침구를 세탁하고 말리느라, 하루는 공사 중인 건너편 오피스텔에서 나온 꺼먼 분진을 뒤집어쓴 가구들을 닦느라, 하루는 비둘기라도 들어와 한참 퍼덕이다 갔는지 흙 깃털이 나뒹구는 방바닥을 쓸고 닦느라 바빴다.
건물 지은 이래로 불이 난 적은 아직 한 번도 없었다. 입주민 대표가 엉터리 경보기를 고치는 법을 백방으로 알아봤지만, 건축 처음 단계부터 잘못된 거라 고치려면 층 전체를 들어내야 한다 했다. 지은 지 3년도 안된 신축 건물인데도 얼레벌레 쌓아 올린 탓에 이런저런 문제가 많았다.
화재경보기뿐만 아니라, 현관 LED 센서등도 문제였다. 사람이 지나다니건 말건 제 멋대로 켜졌다 꺼지곤 했다. 처음에는 가끔씩만 켜지던 센서등이 점점 더 자주, 무작위로 켜지고 꺼지기를 반복했다. 나중에는 사람이 지나갈 땐 안 켜지고 그냥 아무 때나 켜졌다 꺼지기를 반복했다. 갈수록 그 간격이 빨라져서 그 집에서 세 번째 계절을 맞을 때쯤에는 현관에서 디스코 파티라도 열어야 할 판이었다. 조명 업자가 와서 보더니, 건축 처음 단계부터 잘못된 거라 고치려면 층 전체를 들어내야 한다 했다. 뭐? 이거 어디서 많이 들은 말인데.
집주인은 이 문제를 알고 있을까?
그러니까 간헐적으로 강제 개방되기를 여러 번 하다 걸쇠가 벌어져버린 베란다 문부터, 고장 났는데 배선이 엉망진창이라 고칠 수도 없는 현관 센서등까지... 집의 진짜 주인이라면 골치 아픈 문제일 수도 있는 것 아닌가.
글쎄, 처음 입주하고 일주일 만에 현관 센서등 문제로 그에게 연락했을 때, 그의 휴대폰은 착신정지상태였다.
뭐? 아저씨, 한 달 전에 나랑 직접 만나서 계약했잖아요. 당시에 계약했던 부동산 실장을 통해, 집주인의 부동산 대리인에게 연락을 시도해 봤지만 연락이 잘 안 된다는 소식만 돌아올 뿐이었다. 답답한 마음에 부동산으로 직접 찾아가 봤더니 부동산이 있어야 할 자리는 공실이 되어있었다. 어? 다시 연락하려고 메신저 창을 열자 실장의 연락처는 (알 수 없음)으로 변해있었다. 명함에 적힌 전화번호는 없는 번호가 되었다. 인터넷 등기소에서 등기부등본을 떼어보니, 집주인 앞으로 30억짜리 압류가 걸려있었다. 주택도시보증공사, 국세청 등등. 당연히 계약하기 전에는 없었던 것들이다.
아 그거구나 그거. 요즘 유명한 그거. 전세사기.
집주인에게는 이런 집이 219채 정도 있었다. 입주하자마자 알아챘어도 별다른 방법은 없었다. 계약기간이 끝나기 전까지는 전세사기가 성립되지 않는다. 계약이 끝날 무렵에 어쩌면 연락이 닿아 보증금을 돌려줄 수도 있기 때문이다. 나는 남은 1년 11개월의 계약기간을 기다린 후 보증금을 떼 먹히고 난 뒤에야 싸움을 시작할 수 있다. 그러니까 미리 알아챈 나는 전세사기 피해자로 데뷔하려고 준비 중인 연습생인 거다. 다들 똑같이 데뷔해도 사정에 따라 누구는 연습생활 길게 하고 누구는 좀 짧게 하고 그러는 것처럼. 나는 연습을 좀 길게 하는 연습생인 거다.
비극적이다. 그래도 어떡하겠는가? 일단 돈 벌어먹고 살아야지. 아니, 아니지. 사실은 비극이라서 돈을 벌어야만 했다. 숨 쉬기만 해도 월급의 삼분의 일이 집값 대출 이자로 나가고 회사는 집에서 두 시간 거리여도 이사를 못 가지만, 내 힘으로 돈을 벌어서 낼 수 있다는 사실을 다행으로 여기기로 한다. 남의 돈 벌어먹기가 으레 그렇듯 회사는 엿같았다. 평균 10시간, 많으면 13시간까지 근무하고, 왕복 통근시간을 빼면 일 외에는 아무것도 할 수 없었다. 집에 와서 따뜻한 물로 샤워하면 한순간에 긴장이 풀려 그대로 쓰러진 채 다시는 눈뜨지 못할 것 같아서 항상 찬물로만 빠르게 씻고 잠들었다. 씻고 나면 잠잘 시간이 겨우 서너 시간뿐이었다.
갑작스럽게 강제로 환기를 당한 그날도 나는 열세 시간 근무를 하고 찬물로 샤워를 한 뒤, 쓰러지듯 잠들어 있었다. 화재경보기의 오작동 탓에 보장된 단 세 시간의 수면마저 방해받았다. 부스스 일어나 앉은 채 화가 치밀어 올라와서 차라리 저 완강기를 타고 지하 끝까지 내려가버리고 싶다는 생각이 들려는 찰나, 또 덧없이 센서등이 번쩍거리기 시작했다.
웃기지 마. 말도 안 되는 간헐적 파티조명 아래서 사느니, 차라리 깜깜하게 살고 말겠어. 나는 작은 스툴 위에 올라가 천장에 달린 전등 뚜껑을 열고, 그 안에 줄줄이 엉켜있는 배선들을 한참 보다가 LED등에 연결된 회선을 찾아 싹둑, 잘라버렸다.
어디서부터 어떻게 잘못됐는지 알아도 내가 할 수 있는 일은 그걸 모를 때와 별반 다를 바가 없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