달팽이가 된 심정으로 배낭을 골랐다
회사에 퇴사 이야기도 꺼내놨고 전세 사기꾼에게서 벗어날 날도 얼마 안 남았겠다, 집을 정리하고 있었다. 일단 창대하게 시작하고 점점 타협해 나가는 나답게 이번 정리의 목표는 배낭 하나에 들어갈 만큼만 남기고 전부 버리기. 보증금을 회수하고 회사 일이 정리가 되면 무기한 배낭여행을 가리라 마음먹었기 때문이다.
20대 초중반에 걸쳐 다녀온 40일 인도 배낭여행, 70일 유럽 배낭여행, 보름간 자전거 국토종주 같은 경험들을 통해 느꼈던 것은 마음 편히 쉴 곳이 있고 적절한 시점에 먹을 것만 있어도 행복할 수 있다는 것, 그리고 삶을 영위하는데 필요한 물건은 생각보다 많지 않다는 것이었다.
여행에서 돌아올 날짜는 정하지 않았지만 일주일치의 짐만 챙겨서 나가려고 한다. 일상적인 물건들은 계속 돌려 쓸 수 있으니까 충분할 것 같다. 남양주에서 시작해서 공주에서 머무르다 부산까지 갔던 보름간의 자전거여행 때도 (여름이라 가능한 일이긴 했지만) 필요한 물건들은 고작 15L짜리 안장가방에 모두 쑤셔 넣을 수 있었다. 정착생활을 시작하면 여러 필요에 의해서 물건이 늘어나겠지만 말이다. 한 군데 정착하기 시작하면 정말 필요한 것과 상대적 결핍에 의해 필요하다고 착각하는 것의 구분이 어려워지는 거 같다. 물건도 물건이지만 감정도, 인간관계도 마찬가지…
반면에 필요한 모든 물건을 등에 짊어진 내 몸뚱이 하나만 의지한 채, 따뜻한 물줄기 하나에도 감사를 느낄 수 있는 절대적 결핍 상태가 되면 일상의 권태로움은 사라지고 감사한 것들이 늘어난다. 이번에 오랜만에 다시 그 경계를 명확히 느끼고 오고 싶었다.
집을 항상 지고 다니는 달팽이가 된 심정으로 배낭을 골랐다. 한동안 나의 집이 될 등껍질은 48리터짜리 배낭으로 했다. 그동안의 여행은 돌아올 집이 있었지만 이제 나에게 돌아올 집은 없다. 배낭이 곧 내 집이다. 그렇게 마음을 먹으니 비장했다.
마음에 드는 곳이 나타나면 며칠 더 머무르고 지겨워지면 미련 없이 떠나는 생활, 걷다가 바다가 보이면 뛰어들어 파도를 타고 또 지겨워지면 자전거를 타고 멀리멀리 가도 아무도 나를 붙잡지 않는 생활. 내가 줄곧 동경했던 삶을 살러 갈 것이다!
하지만 나를 붙잡는 것이 없다는 것은 곧 내가 돌아오기를 기다리는 장소도 없다는 뜻이었다. 괜찮겠어? … 아직 잘 모르겠다. 그래도 한 곳에 뿌리내리고 싶은 마음보다 내 이상에 가까운 곳을 찾아 떠나보고 싶은 마음이 더 크다.
전세사기 당한 집이라 지긋지긋하다고만 생각했는데 돌아보니 곳곳에 내 손길이 닿지 않은 곳이 없었기에 생각보다 서운했다. 좋아하는 질감과 향기로 채운 크고 작은 가구들과 물건들을 매만지며 추억에 잠겼다가도 정신 차리고 당근으로 갈 것, 대용량 쓰레기 봉투에 넣을 것, 의류수거함에 넣을 것으로 분류해서 상자에 집어 넣었다. 집을 정리해 가면서 짐은 나름대로 점차 줄어들고 있었다. 솔직히 말하자면 ‘배낭 하나에 들어갈 만큼만 남기고 모두 버리기‘는 실패했다. 신입사원 때 피땀눈물 흘리며 공부했던 흔적이 남은 업무일지, 마음에 들어서 산 옷가지 같은 것들은 고민도 안 하고 훌렁 버려버렸지만 친구들과 주고받은 편지들, 그동안 써내려 온 일기들처럼 소중한데 배낭에 짊어지고 다닐 수는 없는 것들이 꽤나 많았다.
그런 것들을 모아 서랍에 집어넣고 본가에 두기로 했다. 내가 곧 집이고 집이 곧 나인 달팽이가 되겠다는 처음 목표와는 달리 본가에 한발 걸쳐두고 캥거루 새끼의 신분을 반쯤 유지한 채 배낭을 싼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