청계산에서 다시 태어난 생각들

오늘 다시 태어나기로 하자면서 웃었다.

by김지연

가벼운 하이킹과 요가를 하러 청계산에 다녀왔다. 약속시간보다 조금 일찍 도착해서 주변을 구경했다.


집결지에는 턱수염을 적당히 기른 남자와 곱슬머리를 촉촉하게 늘어뜨린 장발의 남자 그리고 얼굴에 웃는 모양으로 보조개가 자리잡은 맑은 인상의 여자가 나를 반겨주었다.


몇 가지 안전에 관한 주의사항이 적혀있는 서류에 서명을 갈기는데 여자가 뒤에서 필체가 멋지세요, 하며 내 글씨를 칭찬했다. 갑자기 쑥스러워서 당황하는 바람에 생년월일 란에 멋진 필체로 당당하게 오늘 날짜를 휘갈겨 적는 실수를 했다. 오늘 다시 태어나기로 하자면서 웃었다.


알고보니 참가자들을 맞이해준 세 사람 중 장발의 남자는 요가 인도자였고, 수염 남자와 보조개 여자는 도보와 자전거로 세상을 여행하는 과정을 영상으로 기록하는 부부 유튜버라고 했다.


산행을 하는데 문득 우리 일행이 앞으로 걸어가고있는 풍경과 하늘이 너무 예쁘게 보였다. 잠시 멈춰서 사진을 찍으려고 기다렸다가 부부와 나와 친구만 무리에서 뒤로 조금 떨어졌다.


부부는 한국인 최초로 미국의 3대 종주길을 완주했다고 했다. 하던 일을 그만두고 종주길을 떠나게 된 전후상황이 궁금해서 물었다.


그들이 PCT를 가게 된 건 영화 와일드 때문이었다. 영화를 보고 떠나야겠다는 생각이 들어서 그렇게 했다. 남편인 수염 선생님은 번아웃이 와서 떠났다고 했지만 보조개 선생님은 달랐다.


7년전 그는 동료들에게 인정받는 회사원이었고 하던 일이 적성에 맞았고 일상에 활기가 있었다. 하지만 오히려 그랬기에 일보다 더 끌리는 다른 것에 용기와 확신을 가지고 떠날 수 있었다. 왠지 모르게 불안한 마음은 들지 않았다. 도망친 게 아니라 능동적으로 행복을 찾아 떠났기 때문에 자신있었던 거다.


보조개 선생님의 이야기를 듣고 나의 막연한 자신감에 대해서 생각했다. 퇴사하고 돌아올 기약이 없는 여행을 떠나겠다는 나의 계획을 들은 사람들이 나의 앞날이나 내 커리어에 대해 걱정하는 기색을 보일 때면 분명히 그들이 내 이야기를 하고 있는데도 나는 그게 남일 같았다. 그 불안감은 내 것이 아니었다. 하지만 그렇게 남들이 내 인생에 하는 걱정을 들을 때마다, 사람들은 알고 내가 모르는 뭔가가 있는 건가 하는 생각에 조금은 제동이 걸리긴 했다.


나는 지금 회사에서 하는 일이 즐겁기도 하고, 이 곳에서 더 배워나갈 것들도 기대됐다. 이대로라면 시간이 지날수록 회사에서 더 많은 비중을 차지하고 인정받을 수 있지 않을까, 싶었다. 아쉬운 마음에 원래 계획이었던 여정을 조금 미뤄야하나 고민하던 차에 보조개 선생님의 이야기가 다시금 생각을 되돌리는 계기가 되었다.


내가 삶에서 진정 원하는 것은 무엇인가, 그걸 찾아가는 여정은 지금 시작하지 않으면 안될 것 같았다. 더이상 돌이킬 수 없을 때가 되어 후회하고 싶지는 않았다.


소나무 숲에서 잠시 멈춰 짧은 요가동작을 했다. 눈을 감고 몇 차례 호흡을 하고 상체를 접어 땅을 짚었다. 마른 솔잎이 손끝에 닿는 자연스러운 감각이 좋으면서도 생경했다. 접힌 몸을 다시 일으켜 호흡을 하다 살며시 눈을 떴을 때 내 앞에 펼쳐진 소나무 숲은 끝이 보이지 않았다. 숨을 쉬고 싶다는 생각이 들었다. 숨쉬기를 멈춘 적은 없었지만, 뭐랄까… 여기에서 더 오래 숨쉬고 싶었다. 더 길게 머무르고 싶었다.


진달래 능선에서 멈춰선 요가 인도자가 당신이 가진 강박은 무엇이냐고 물었다. 나는 길게 생각하지않고 단박에 ‘생산적인 사람이 되려하는 것’이라고 했다. 자본주의 슬롯가 내게 원하는 것은, 시간을 효율적으로 사용해 더 많은 생산성을 내는 것이었고 나는 그것에 부응하기 위해 주어진 시간을 알차게 사용하기 위해 노력해왔다. 하지만 내가 그렇게 생산성에 집착하는 사이에 중요한 것들을 놓치고 있는 것 같다는 생각을 지울 수가 없었다.


모두가 돌아가면서 자기가 가진 강박을 고백하는 사이 적막속에 어느 한 사람이 입을 뗐다.


강박이라는 단어의 어감 때문에 부정적으로 보일 수 있으나 자신의 삶에 중요하게 생각하는 부분이기 때문에 강박까지 가지게 되는 게 아니겠냐며, 꼭 부정적으로 생각할 필요는 없을 것 같다고 했다.


강박이라고 해서 털어버리고 싶은 것으로 여기고 생각했던 터라 그 관점은 신선하게 느껴졌다. 내적동기에 의한 강박이라면 그렇게 생각했을 것 같다. 같이 갔던 내 친구는 매일 하고 싶은 일이 너무 많고 그 모든 것을 다 해내야만 하는 강박이 있다고 했다. 단단한 자신을 만들고 싶었던 그 애는 수영도 잘 하고 싶고, 러닝도 잘 하고 싶고, 요가도 잘 하고 싶고, 매일 백팔배를 하고 싶었다. 그 강박은 자기 삶을 자기의 이상대로 꾸려나가고 싶다는 생각에 의한 거였다. 더 잘 살아내고 싶어서. 그런 강박이라면 강박마저도 사랑했을테다.


하지만 내가 꺼내보인 강박은 나를 단단히 하는 게 아니라 슬롯의 일원인 나를 자본의 논리로 잘 굴리는 데 있었다.


우리 회사의 회장님은 회사를 밥솥이라고 표현하곤 했다. 회장님은 밥솥 주인이고, 회사 사람들은 같은 밥을 먹는 사람이라는 거다. 나는 밥솥 공동체 안에서 적은 시간안에 밥을 많이 많이 잘 짓는 구성원이 되고자 노력해왔다. 다른 구성원들에게 누가 되면 안 됐기 때문에 밥 짓는 거 말고는 신경쓸 겨를이 없었다. 생산적이지 않은 것은 모두 뒷전으로 할 수 밖에 없었다. 물질적으로 여유로워도 여유를 느낄 틈이 없었기에 감사한 적도 별로 없다. 나는 회장의 밥솥에서 열심히 밥을 짓고 내가 지은 밥의 일부를 먹고 또 더 많은 밥을 짓는데만 골몰했다. 포만감이란 걸 모르는 사람처럼 계속 밥, 밥 했다.


근데 난 이제 더 이상 밥솥을 붙잡고 살고 싶지 않았다. 자연이 매일같이 내게 주는 축복을 온몸으로 받아들이며 감사함을 느끼는 삶을 살고 싶었다.


손끝에 마른 솔잎이 만져진 순간, 고개를 드니 드넓은 소나무 숲이 끝없이 펼쳐져 있던 순간

그런 순간들을 내 삶 전체로 만들고 싶었다.


월, 수, 금 연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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