괴로움이 사라졌다고, 문제가 해결된 것은 아닙니다
회의 시간, 팀장이 자기가 놓친 일정을 두고 "이건 김 대리가 챙겼어야지"라며 바카라임을 떠넘깁니다.
그 일정을 놓친 게 팀장이라는 건 회의실의 모두가 압니다.
속으로는 '이건 아닌데?' 싶었지만, "어차피 내가 나서봐야... 원래 회사가 다 그렇지..." 하고 넘겼습니다.
그렇게 불편했던 마음은 다시 편해집니다.
바로 이 편해짐이 위험합니다.
이 편해짐은 자기합리화와 현실도피의 결과입니다. 둘 다 괴로움을 없애 주지만, 문제는 하나도 건드리지 않습니다. 다음 날 아침 회의실에는 같은 팀장이 앉아 있고, 바카라임을 떠넘기는 일은 또 일어납니다. 괴로움에서 벗어났다고 문제를 해결한 것은 아닙니다.
지난 이야기에서 괴로움에서 벗어나는 세 가지 길을 살펴보았습니다.
외부의 원인을 해결하거나, 내 안의 원인을 해결하거나, 그 문제에서 벗어나는 것이었습니다.
세 방법에는 공통점이 있습니다. 모두 괴로움의 원인을 다룬다는 것입니다.
그런데 원인은 그대로 둔 채 괴로움만 없애는 방법도 있습니다.
자기합리화: 생각을 비틀어 '부당하다'는 판단 자체를 지웁니다. "원래 회사가 다 그래." 판단이 사라지니 괴로워할 이유도 사라집니다.
현실도피: 판단은 그대로 둔 채 문제를 보지 않으려 합니다. 관심을 다른데로 넘기고 그 일을 잊습니다. 문제가 눈앞에서 사라지니 괴로움을 느낄 틈도 사라집니다.
둘 다 마음을 편하게 해 줍니다. 하지만 팀장은 그대로이고, 바카라임을 떠넘기는 일도 그대로입니다.
자기합리화는 늘 말로 드러납니다. 내가 알고 있던 것을 슬쩍 비틀어 '옳지 않다'를 '괜찮다'로 바꾸는 말들입니다.
"원래 회사가 다 그래." 잘못을 당연한 일로 만듭니다.
"어차피 나 하나 말한다고 팀장이 바뀌나." 내 바카라임을 작게 만듭니다.
"김 대리도 좀 꼼꼼하지 못하긴 했잖아." 바카라임을 당한 사람에게 넘깁니다.
"큰일 난 것도 아닌데 뭘." 결과를 작게 만듭니다.
이 말들은 상황을 설명하는 것처럼 들리지만, 사실은 불편함을 덮으려고 급히 만든 변명에 가깝습니다. 말 한마디로 괴로움은 사라지지만, 그 말이 바꾼 것은 내 생각뿐입니다.
두 방법이 정말 위험한 이유는 한 번으로 끝나지 않는다는 것입니다.
자기합리화는 할수록 쉬워집니다.
무단횡단을 처음 할 때는 가슴이 두근거리지만, "다들 건너잖아"를 몇 번 되풀이하면 나중엔 휴대폰을 보며 건넙니다. 같은 말로 판단을 지울수록 경보는 작아지고, 어느 날부터는 아예 울리지 않습니다. 세상론은 옳고 그름을 느끼는 이 마음을 마음의 불씨라고 부릅니다. 자기합리화가 반복되면 이 불씨가 꺼집니다.
현실도피도 할수록 쉬워집니다.
처음엔 힘든 날에만 찾던 맥주가 나중엔 매일 밤의 습관이 됩니다. 도피하는 동안 문제는 쌓이고, 쌓인 문제가 더 괴로우니 더 깊이 도피합니다.
세상론에서 문제는 피해야 할 장애물이 아니라, 성장과 가치가 생기는 기회입니다. 따라서 문제는 해결해야 합니다. 문제를 덮으면 괴로움은 잠시 사라지지만, 그 문제가 줄 수 있었던 모든 기회가 함께 사라집니다.
자기합리화와 현실도피는 팀장 같은 외부의 문제에서만 나타나지 않습니다. 나 자신이 풀어야 할 내부의 문제 앞에서도 똑같이 나타납니다.
공부. 자격증 시험에서 떨어졌습니다. "이번엔 문제가 유난히 이상하게 나왔어", "어차피 나는 시험 체질이 아니야"라고 말하면 자기합리화입니다. 채점한 시험지를 다시 펴 보지도 않고 다음 시험 접수일까지 그 생각을 하지 않으면 현실도피입니다. 괴로움은 사라지지만 실력은 그대로입니다.
운동. 큰맘 먹고 끊은 헬스장에 일주일째 가지 않았습니다. "요즘 너무 바빠서 어쩔 수 없었어", "운동도 체질이 맞아야 하는 거야"라고 말하면 자기합리화입니다. 체중계를 침대 밑에 넣어 두고 거울 앞을 피하면 현실도피입니다. 괴로움은 사라지지만 몸은 그대로입니다.
괴로움이 사라진 것은 좋은 일입니다. 다만 그날 한 번만 물어보세요. "괴로움은 사라졌다. 그런데 문제도 사라졌나?"
만약 문제는 그대로인데 마음만 편해졌다면, 그건 해결이 아니라 덮은 것입니다. 당장 해결할 힘이 없다면, 적어도 덮었다는 사실만큼은 알고 있어야 합니다.
그래야 반성의 기회라도 만들 수 있습니다.
Q. 힘든 날 맥주 한잔하거나 게임하며 잊는 것도 안 되나요?
쉬는 것과 현실도피는 다릅니다. 기준은 그다음에 있습니다. 쉬고 나서 다시 문제 앞으로 돌아온다면 그건 휴식입니다. 문제를 보지 않으려고 그 안에 계속 머문다면 현실도피입니다. 맥주 한 캔 뒤에 "내일은 팀장에게 일정 관리 방식을 이야기해 봐야겠다"는 생각이 남는다면, 그 맥주는 충분히 괜찮다고 생각합니다.
Q. 사는 게 바쁜데, 일일이 옳고 그름을 따지면 피곤해서 어떻게 사나요?
모든 일을 따지라는 말이 아닙니다. 마음이 '이건 아니다'라고 반응한 일에서만, 괴로움이 사라진 것을 해결로 착각하지 말자는 것입니다. 당장 행동할 힘이 없어도 괜찮습니다. "아직 해결하지 못했다"는 사실만 지워 버리지 않으면 됩니다.
Q. 바꿀 수 없는 문제라서 받아들인 것도 자기합리화인가요?
팀장을 변화시키고 바꿀 수 없다면, 내가 변하고 바뀌면 됩니다. 팀장이 어리숙하다면, 내가 더 현명하게 움직여야 합니다. 이렇게 문제의 상황을 자기합리화로 회피할 것이 아니라, 문제의 상황을 성장의 기회로 이용해야 합니다.
Q. 저는 이미 너무 오래 덮어 온 것 같아요.
그렇게 느낀다는 것 자체가 아직 마음의 경보가 울리고 있다는 증거라고 생각합니다. 다시 시작하는 방법은 거창하지 않습니다. 마음이 편해진 날 "문제도 사라졌나?"를 한 번 묻는 것, 그리고 덮어 둔 문제 중 가장 작은 것 하나를 꺼내는 것부터입니다. 틀린 문제 하나, 미뤄 둔 대화 한 번이면 충분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