정수기
아침 먹고 설거지하는데 식탁에 앉아 있던 집사람이 느닷없이 한마디 한다.
“이제 물 끓이지 말어. 우리도 생수 먹자.”
“그래?”
잠시 생각할 것도 없었다.
“이제 물도 안 끓이고 횡재했네.”
푸하하....
그런데 생각해 보니 내가 물을 끓여 먹기 시작한 것이 언제부터였지?
기억을 한참 뒤로 돌려보니 1988년 서울올림픽이 끝난 뒤였던 것 같다.
그때 우리 집에 처음 정수기를 설치했다.
요즘처럼 정수기 회사에서 사람이 와서 설치하고 몇 달에 한 번씩 찾아와 필터 갈아주고 청소해 주는 그런 정수기는 아니었다.
수도관에서 나오는 물을 바로 정수기 필터에 연결해서 사용하는 방식이었다.
당시에는 그것도 신기했다.
수돗물이 필터를 지나 나오니 괜히 더 깨끗한 물 같기도 하고.
하여간 그렇게 몇 달을 사용했다.
아마 6개월쯤 되었을까?
어느 날 정수기 필터를 보니 누렇게 변해 있었다.
헉....
이 물을 내가 마셨단 말인가?
물론 지금 생각하면 필터가 수도관을 타고 들어오는 녹이나 이런저런 찌꺼기를 걸러주었으니 누렇게 되는 것이 이상한 일은 아니었을 것이다.
문제는 그다음이다.
필터를 갈아야 한다는 이야기는 정수기를 설치할 때 분명 들었던 것 같은데,
어디서 필터를 사야 하는지.
누구한테 연락해야 하는지.
내가 갈아야 하는지.
사람이 와서 갈아주는지.
모른다.
요즘 같으면 스마트폰 열고 몇 번 두드리면 다 나오겠지만 당시에는 인터넷도 스마트폰도 없었다.
그래서?
그냥 정수기를 떼어버렸다.
끝.
그렇다고 그때부터 수돗물을 못 믿은 것은 아니다.
수돗물에서 나는 염소 냄새가 싫었다.
그래서 물을 끓이기 시작했다.
주전자에 물 받아 가스불에 올려놓고 팔팔 끓인다.
다 끓으면 식혀야 하고.
식으면 물병에 옮겨 담고.
다 먹으면 또 끓이고.
그렇게 몇 년을 했는지 계산도 해보지 않았다.
1989년부터였으니....
아이고.
30년이 훌쩍 넘었다.
그동안 이사를 몇 번 했고 아이들도 자라고 결혼하고, 나도 온라인 게임에서 퇴직하고, 검었던 아내의 머리에 흰머리가 더 많아졌는데 물 끓이는 것은 계속했다.
그냥 그것은 일이 아니었다.
밥 먹으면 설거지하는 것처럼 물이 떨어지면 끓이는 것이었다.
그런데 2~3주 전 아침.
집사람이 갑자기 그 일을 그만하란다.
“날도 더운데 물 끓이지 말어! 이제 생수 먹자.”
세상 참 많이 변했다.
오래전에는 수도관에 정수기 하나 연결해 놓고 신기해했고, 누렇게 된 필터를 보고 놀라 정수기를 떼어버렸는데 이제는 집 앞에 생수 몇 병 주문하면 문 앞까지 가져다준다.
그건 그렇고.
정말 좋은 것은 따로 있다.
물 안 받아도 된다.
안 끓여도 된다.
안 식혀도 된다.
물병에 안 옮겨도 된다.
주전자도 안 씻어도 된다.
이게 몇 가지야?
그래서 아내가 한 말이 틀리지 않았다.
“이제 물도 안 끓이고 횡재했네.”
오늘도 주전자는 가스레인지 한쪽에 그냥 놓여 있다.
생각해 보니 저 주전자도 참 오래 일했다.
이제 쉬어라.
“쉬어라! 나보다 늦게 퇴직했네.”